운명 같은 사랑을 꿈꾸는 당신에게
우리는 모두 영화 속, 소설 속, 드라마 속에 나오는 ‘운명 같은 사랑’의 주인공이 되길 꿈꾼다. 그런데 과연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운명 같은’ 사랑이 현실에 적용되면 어떻게 될까? 시작부터 다를까? 어쨌든 지금의 사랑보단 더 대단한 형태일까?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면 절대 헤어질 수 없는 걸까? 코스모가 갑자기 ‘운명적인 사랑’을 얘기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당신의 사랑과 지금의 감정도 충분히 ‘운명적인 사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으니까. 철학자, 정신과 전문의, 소설가, 연애 칼럼니스트가 얘기하는 운명적인 사랑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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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처한 공주와 그녀를 구해야만 하는 백마 탄 왕자님이 등장하는 동화와 소설 덕에 많은 여성들의 마음속엔 언제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고 사랑해주는 남자에 대한 환상이 있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서의 사랑은 꼭 그렇지만은 않기에, 연애 초보자들은 이내 곧 대혼란에 빠지고 만다. 문제는 “내 남자가 동화 속 왕자님과 다르게 행동하는 걸 보니, 아마 난 동화 속 공주처럼 예쁘지 않나 봐!”라며 자신을 혹사시킨다는 거다. 스킨케어 숍이나 성형외과에 불티나게 가는 이유다.
우리는 ‘환상’을 통해 어른이 되는 것, 이를테면 질투나 성적 욕구와 같은 위협에서 오는 불안을 피할 수 있다. 그러면서 곧잘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아직은 낯설고 위협적인 어른들의 사랑 방식에서 느껴지는 불안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상에 너무나 도취된 나머지, 종종 이들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쏟아붓거나 일부러 투정을 부리기도 하며, 자신을 현란한 포장지로 치장한다. 그러다 결국 나중에는 자신의 환상과 현실이 뒤섞여버리는 바람에 연인과 오해와 싸움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환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인데, 자존감이 모자란 이유는 바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니 가까운 애인조차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란 단정을 전가해 항상 노심초사하면서 사는 거다. 그래서 그녀들이 강구해낸 처방은 바로 ‘특별한 여자’가 되는 것이다. 드라마나 소설 속 운명적 만남처럼 특별한 사람이 된다면야 심지어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고 발로 뻥 차도 좋다. 그의 사랑이 없어도 적어도 난 비운의 여주인공이 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니까. 하지만 특별함이라는 전략의 밑천이 드러나면 그녀들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진다. 운명적 만남이란 콘셉트 자체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면서 그 화살은 이제 본인이 아닌 상대를 향하게 되는 것이다. 마침표가 되지 않기 위해 벌였던 필사적인 몸부림이 그렇게도 우려했던 쉼표가 되어버리기 쉽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소망의 씨앗은 어릴 적 부모에게 받았던 굴욕스러웠던 거절의 상처에서 움튼다. 그 결과 이들은 연애 관계에서도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에 급급하다. 그녀들의 사랑이란 것의 시작 자체가 오로지 내가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길 바라는 갈망에 뿌리를 둔 것이라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건 당연하다. 보테가 베네타의 우븐 양식이 풀려버리거나 금실로 리프트할 곳은 많은데 돈이 없다면 그녀가 절박하게 가꾼 이미지는 풍선처럼 터져버리게 된다. ‘난 특별해’란 느낌은 허상에 만족하는 착각이요, 망상이다. 특별한 사랑을 좇아 살아가는 자세는 현실에서는 비극만 불러올 뿐이다.
기억하자. 그런 환상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미 당신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김현철(정신과 전문의, <우리가 매일 끌어안고 사는 강박> 저자)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사랑이 신적인 것이라고, 다시 말해 술 취한 에로스 신의 장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다. 이미 그들은 직감했던 셈이다. 사랑은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우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타자와의 우발적인 마주침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설렘과 기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설렘과 기쁨이 잔잔한 파문 정도로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절정으로 치솟아 올라가는 태풍과 같은 감정을 일으키는 사랑도 있을 수 있다. 이 후자의 사랑이 바로 숙명이나 운명으로 느껴지는 사랑이 아닐까? 한스 에리히 노삭의 소설 <늦어도 11월에는>에 나오는 다음 대목만큼 이런 운명적인 사랑의 특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거의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무척 가까운 거리였다. 내가 테이블에서 일어나자마자 테이블은 곧 사라져버렸다. 주위의 모든 것이 안개구름처럼 낮게 떠올라 우리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흔들리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것은 우리가 서 있는 마룻바닥뿐이었다. 그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는 그런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 분명 그렇게 오래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일단 스쳐 지나가고 나면 계속 그리워하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니, 내가 한 말 같았다.”
여주인공 마리안네는 남편 대신 문학 시상식장에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상자로 선정된 어느 소설가를 만난다. 아주 우발적인 일이었다. 시상식이 끝난 뒤 만찬에서 두 사람은 그야말로 섬광을 발하듯이 마주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짧은 순간에 일어났던 여주인공의 내면 변화는 사랑이 가진 모든 특징을 매력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모든 사람과 사물이 흐릿한 배경으로 물러나면서, 두 사람만이 절대적인 주인공으로 대두하는 경험이 찾아온다. 이어서 마리안네는 이렇게 둘로 마주 서는 순간을 “일단 스쳐 지나가고 나면 계속 그리워하는 순간”으로 경험하게 된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절대적인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운명적인 사랑, 혹은 영원한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 속 두 주인공의 사랑도 어느 사이엔가 꽃이 지듯이 시들어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운명이나 영원은 시간적으로 변치 않는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운명적인 그래서 영원한 사랑은 활짝 핀 꽃에 비유할 수 있겠다. 활짝 피었는지의 여부만이 문제일 뿐이다. 비록 꽃이 지더라도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마리안네의 감탄처럼 “일단 스쳐 지나가고 나면 계속 그리워하는 순간”이 바로 운명적인 사랑, 혹은 영원한 사랑의 징표인 셈이다. 누가 이런 사랑의 마력에 저항할 수 있을까?
‘영원한 현재’,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절정의 향유, 이것이 바로 숙명적인 사랑이 지닌 영원성 아닐까? 비록 그 사람과 언젠가 헤어질지라도, 죽는 순간까지 마음속 깊은 곳에 그 사랑의 감정과 기억만큼은 영원히 찬란한 순간으로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조화처럼 피지도 않고 지지도 않는 영원성을 꿈꾸지는 않는다. 찬란하게 피었기에 언젠가 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 절정은 우리에게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마음속에 남아 있을 수 있다. 마지막 숨을 내쉴 때도 그 순간을 기억하면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사랑, 바로 이것이 누구나 꿈꾸는, 그렇지만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숙명적인 사랑이 아닐까? -강신주(철학자, <철학이 필요한 시간> 저자)

언젠가 한 선배와 함께 연애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미혼인 그는 나보다 나이가 10살 이상 많았지만, 유전자의 축복으로 실제 나이보다 10살 이상 어려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덕분에 어린 여자들과 많은 연애를 할 수 있었다. 시내의 한 카페에서 우리가 얘기했던 건,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들 공동의 심리였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내가 아는 한 남자는 중학생 때 자신보다 15살이 많은 학원 선생님을 짝사랑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녀가 다녔다던 여자 대학교의 명부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녀를 멀리서나마 보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첫사랑이 짝사랑인 남자의 사랑은 나이에 비해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정해서, 뉴욕에서 십수 년을 살며 쉬지 않고 여자를 사귄 그가 딴 나라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어째서 남자들은 첫사랑을 운명적이라고 느끼는 걸까? 질문을 바꿔보면, 어째서 여자들의 첫사랑은 과소평가되는 걸까? “남자들이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건, 그것이 처음이기 때문이야. 남자에게 사랑이 전부인 시절은 고작해야 10대에서 20대 사이거든. 서른이 넘으면 남자의 정체성은 ‘사랑’이 아니라 ‘일’ 쪽으로 대부분 옮겨가니까. 일을 통한 성취가 사랑보다 훨씬 더 중요해지는 거지.” 우리는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었다. 나는 ‘운명’을 ‘우연’으로 잘못 바꿔 부르는 착시 현상에 대해 토로했다. 이를테면 ‘우연’을 ‘운명’이라 오독하는 경우 말이다. 사랑에 빠지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만의 아름다운 신화로 만들길 원한다. 그것이 사랑을 더 강력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믿음 때문인데, 결혼 정보 회사조차도 사랑에 ‘우연’을 가미하기 위해 수많은 이벤트를 세밀하게 기획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운명적인 사랑에 대해선 소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여러 번 말했다. 가령 깊은 사랑에 빠진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장 세심하게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외로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외로운 건 일평생 자신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외로운 건 바로 그렇기 때문” 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모하게도 사랑에 빠진 인간은 결국 절망을 절망하고, 슬픔을 슬퍼할 수밖에 없는 동어 반복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세계에 편입돼 가망 없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라는 얘기. 내가 아는 운명적 사랑에 대한 정의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중 한 가지를 얘기해보자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음’의 세계에 편입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적이란 말이 자연스레 덧붙는 사랑 앞에는 신분의 차이가 극명한 사랑이나 불륜이란 단어가 붙기도 한다. 모든 스펙이 찰떡궁합인 미남미녀 커플에게 운명적이란 말은 가당치 않다. 사실 ‘운명적’이란 말은 21세기 자본주의 시대에 희소한 것이다. 우리는 모험이 존재하지 않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다. 오디세이식의 모험도, 미치광이 전쟁광이 창궐하던 시기거나, 집안의 복수를 위해 칼을 휘두르며 일 년씩 배를 타고 남태평양을 건너는 시대는 아닌 것이다. 사랑 역시 그렇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얼마 전 읽은 알랭 드 보통의 <사랑의 기초> 마지막 장면은 기억 속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운명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운명’과 이미 많은 부분 달라졌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한때 그는 용기를 다르게 상상했다. 어렸을 적 그는 용을 잡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행군을 그렸었다. 지금 그는 새로운 그림을 가졌다. 진정한 용기는 불안에 시달린다고 쉽사리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상대의 약한 모습에 좌절하여 상처 주지 않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을 자신과 똑같이 상처받은 사람들로 보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죄에 오염되었다고 아이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그럭저럭 계속해나가는 단순한 일. 이것이 진짜 용기이며 영웅주의다. 헬리콥터 안에서의 짧은 순간, 그리고 그 뒤로도 가끔씩 우리의 영웅 벤은 이 과제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운명은 행복처럼 먼 어딘가에서 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내 옆에 있고, 내가 애써 지켜야 할 무엇인지도 모른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라고 말하고, 그 사람의 실수에 대해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 운명을 만드는 사소한 말의 축적이라는 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백영옥(소설가,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저자)

“왠지 느낌이 달랐어.” 결혼을 앞둔 지인 앞에서 또 한 번의 데자뷰를 경험했다. 타인의 애정 생활에 딱히 관심이 없어도 묻게 되는 ‘이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 뭔가에 홀린 표정부터 짓던 친구 H. 가끔 만날 때마다 남자 친구의 꼴사나운 버릇, 시어머니의 남다른(!) 성격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던 그녀였지만 ‘날짜를 박고 나서’부터는 그러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본인조차 이해할 수 없는 연애를 시작한 후배 J에게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평소의 이상형과는 딴판이고 서로 비슷한 구석도 없으며 그동안의 연애 패턴과도 한참 동떨어져 있는 관계라고 말하면서도, 그녀는 마주 앉은 내내 ‘이 남자만큼은 특별하다’를 온 얼굴로 표현했다. 평소엔 잘 발음하지도 않는 ‘운명’이라는 말은 어느새 그들의 ‘생활 필수 어휘’가 되어 있었다.
독일의 소설가 사라 쿠트너는 “연애는 반하는 단계, 사랑에 빠지는 단계, 정말 사랑하는 단계로 나뉜다”라고 했다. 간단히 분류해보면 1단계는 만남, 2단계는 연애, 3단계는 결혼쯤 될 거다. 그 각기 다른 세 단계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필수 옵션이 있으니 바로 ‘운명’이다. 누군가에게 끌리기 시작할 때나 사랑에 빠졌을 때, 또는 그와 함께할 미래를 약속하거나 실행하는 데 있어서도 납득할 만한 이유는 필요하니까. 하지만 그 이유라는 게 매번 내 능력으로 설명될 리 없고, 남들에게는 더더욱 이해시킬 방법이 없으니 그럴 때 쓰라고 ‘운명’이라는 단어가 있는 거다.
나 역시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우리를 관통한 운명의 힘에 맥없이 사로잡힌다. 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나의 숙명이며, 온갖 장애에도 불구하고 이 애정을 더욱 크고 단단하게 키워나가는 일은 내 의무라고 믿어버린다. 시간이 흘러 그 만남과 관계에 뒤통수를 맞고 저절로 커질 거라 장담했던 애정에 숨은 반전을 경험하고 나서 다시는 사랑 같은 거 안 한다고 중얼대다가도 어느새 누군가에게 빠지고 나서는 오랫동안 방치해왔던 ‘운명’이라는 말을 끄집어낸다. 이 우스꽝스러운 쳇바퀴를 몇 번쯤 경험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운명적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은 내가 주고받는 애정, 그리고 그 애정에 대한 자부심의 크기와 정비례한다는 것. 나로 하여금 운명적이라는 말을 자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일수록 그만큼 더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며, 누군가에 대한 튼튼한 애정만 있다면 그 어떤 만남과 관계도 운명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거였다.
지금 당신 옆에 있는 그에게 무언가 특별함이 없다고, 우리는 운명적인 사랑이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이 든다면 먼저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애정부터 가늠해보자. 나의 사랑이 운명의 유무를 떠올리게 할 만큼 단단하지 않은 건 아닌지, 혹은 누군가에게 충분히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아쉬움을 운명이라는 두 음절로 ‘퉁’치고 싶은 건 아닌지.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운명이라는 비현실적인 단어보다 그렇게라도 그 사랑을 믿고, 누리고, 인정받고 싶은 나와 우리의 마음 아니겠는가. 헤세는 말했다. 우리는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해야 하며,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한다고. 스탕달은 연애는 열병과 같아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겨나거나 사라진다고 했다. 운명적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 느끼고 발견할 수 없는 애정은 운명적 사랑으로 발전할 수 없으며 분명 내 것이라 믿었던 그 운명도 어느새 또 다른 운명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진리. 적어도 그건 연애에서만큼은 예외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운명적이다. 찰나에 끝나버리거나 언젠가 ‘팔자’로 전락하더라도 내가 느끼고 경험한 어떤 ‘순간’만큼은 진실임에 틀림없으므로. 판단은 보류하고 감정에 충실할 것. 의심은 접어두고 현재를 믿을 것. 그것이야말로 나를 둘러싼 이 짐짐한 연애를 운명적 사랑으로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김신회(칼럼니스트, <남의 사랑 이야기> <그래도 연애는 해야 하니까> 저자)

지금 사랑하는 자, 누군들 자신의 사랑이 지상 최고의 운명적 사랑인 듯 보이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자꾸만 남의 연애가 더 대단하고 남의 남자가 더 커(?) 보인다. 영화와 소설, 드라마에 줄기차게 나오는, 번갯불에라도 맞은 듯 대책 없이 불타오르는 자연재해 같은 사랑, 혹은 백만 볼트의 전류는 없었다 해도 그와 함께라면 허름한 순대국밥집에서건 복닥거리는 마트 식품 코너에서건 오롯이 둘만 존재하는 듯 충만한 느낌을 주는 그런 사랑의 감정이야말로 진짜 ‘운명’처럼 보이는 걸 어쩌겠나.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운명적인 사랑’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몇 가지 클리셰가 있다. 그 판형에 지금의 내 사랑을 끼워 맞추다 보면 어그러지거나 빈틈이 보인다. 지금의 이 사랑 말고 어디 다른 곳에 진짜 운명적인 사랑이 하나의 완전체로서 따로 존재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다. 꼭 미디어가 조장한 환상만 탓할 일은 아니겠다. “좋긴 좋은데 이 남자가 내 인생의 베스트인진 잘 모르겠어요”(L, 27세), “이 사람과 결혼한 후에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어떡하나 불안해”(M, 33세),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뭔가 좀 더 찌릿찌릿한 건데, 너무 편안해서 오히려 불만이에요”(K, 29세) 이런 고민을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단 하나. 왜 자꾸 자신의 사랑, 지금의 사랑을 폄하하려 드는 걸까? 어쩌면 아직 ‘운명’을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진심까지 퇴색시키려 드는 ‘태도’에 있는 건 아닐까?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저스틴 레밀러 박사는 ‘완벽한 사랑’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결혼)의 또렷한 플롯을 갖춘 대하서사극 같다기보단 ‘서로에 대한 열정과 친밀함과 헌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상태’라는 것이 그의 설명. 물론 이런 사랑을 찾는 것도 힘들고 유지하기도 쉽지 않지만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완벽한 사랑’으로 업그레이드시킬 수도 있다고 레밀러 박사는 말한다. 그 노력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여전히 그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매일같이’ 확인시키는 것이다. 최대한 자주 서로에게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사랑 에너지가 재충전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로맨틱한 이벤트나 대단한 제스처도 필요 없다. 갑자기 그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불쑥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바쁜 오후에 그를 사랑하는 당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문자로 보낸다거나 하는 식의 간단한 노력으로도 충분하다. 관건은 사랑의 선서를 얼마나 자주, 깜짝 놀랄 타이밍에, 분명하게 전달되도록 하느냐는 것뿐이다. 두 번째는 지속적으로 둘 사이의 성적인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그동안 코스모에서도 누누이 강조해온 것이기도 한데, 역으로 그만큼 안정적인 관계에 돌입한 커플이 성적인 긴장감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레밀러 박사는 ‘새로운 시도’만으로도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해 설렘을 일깨울 수 있다고 얘기한다. 갑자기 그를 끌어안고 연애 초기의 열정을 담아 ‘지금 당장 하고 싶어’라고 속삭인다든가 그동안 시도해보지 않았던 체위를 먼저 제안하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자극이 된다는 것이다.
자, 이쯤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볼 일이다. 현재의 사랑이 불만족스럽다면, 과연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스스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편해졌다는 이유로 무릎 나온 추리닝에 노메이크업으로 그를 만나러 나간다거나, 바쁘고 피곤하다는 그를 격려하는 대신 애정이 식었네 운운하며 삐치거나 하진 않았는지 말이다. ‘사랑의 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서로에 대한 열정이 식은 것 같은 때일수록 “서로 매력적인 존재로 남아라. 상대를 존중하라.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고 역설했다. 모두 당신이 지금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당신의 ‘노력’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있다. 당신이 꿈꾸는 완벽한 사랑, 운명적인 사랑은 어쩌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랑’일 수 있는데도 말이다. ‘있을 때 잘해라’라는 연애 고수들의 입에 발린 충고는, 그와 함께일 때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지금의 사랑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충실하게 임했을 때야 비로소 ‘이 사랑이 아니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거라는 얘기가 아닐까? 섣불리 당신의 사랑을 폄하하지 말자. 지금 당신의 사랑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이미 자연스럽게 당신의 운명에 편입되어 있으니까. -박지현(코스모폴리탄 피처 에디터)
Credit
- Editor 박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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