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에 젠더는 없다. 요즘 느좋남 옷장에 하나쯤 있다는 '이 컬러'의 정체
핑크를 입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고? 요즘 멋 좀 아는 남자들은 그런 낡은 공식에 관심 없다. 핑크를 가장 쿨하게 즐기는 남자들의 시대가 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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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셔츠 입은 남자에게 한 번쯤 따라붙는 말. “핑크가 잘 어울리네요.” 가만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다. 블랙이나 네이비를 입었을 때는 듣지 않는 말이다. 아직도 핑크를 입은 남자를 특별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색의 과거를 알면 이야기가 꽤 재미있어진다. 핑크는 애초에 남자에게 낯선 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화려했던 남자들의 옷장을 차지한 색이었다.
시간을 18세기 유럽으로 돌려보자. 당시 상류층 남성에게 밝은색 실크와 화려한 자수, 레이스는 전혀 부끄러운 취향이 아니었다. 로코코 시대의 남성 초상화에서도 핑크색 코트와 베스트를 입은 귀족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루이 16세의 초상에도 핑크 코트가 등장한다. 값비싼 염색 직물은 그 자체로 부와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이었고, 부유한 남녀 모두가 세련된 색을 즐겼다. 우리 역사에서도 담홍색 관복을 입은 남성 관리들의 초상화가 종종 등장한다. 당시 남성에게 핑크색은 지금처럼 ‘여성적인 색을 선택했다’는 설명이 필요한 컬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핑크는 원래 남자의 색이었다기보다 ‘핑크에 굳이 성별을 붙이지 않던 시대가 있었다’는 쪽에 가깝다.
Prada
Miguel Vieira
A$AP Rocky
Maison Mihara Yasuhiro
대체 언제부터 우리는 핑크에서 여성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 걸까? 답은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다. 옷을 더 많이, 더 명확하게 구분해 팔아야 했던 대량생산 시대가 도래하면서다. 20세기를 거치며 기성복 시장의 몸집이 커지고 백화점과 아동복 브랜드가 성별에 따라 제품을 세분화하면서 핑크와 블루에도 점차 젠더 딱지가 붙기 시작한 것.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 성별을 알고 옷과 장난감을 준비하는 문화는 핑크의 성별화를 부추겼다. 어릴 때부터 핑크를 입고 자란 여자아이들, 만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에 빠지지 않는 핑크 코스튬 등 환경과 미디어의 영향으로 ‘핑크=여성의 색’이란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패션계가 규칙을 얌전히 지키던 곳이었던가. 핑크에 여성이라는 이름표가 단단히 붙어 있는 동안에도 그 색을 자기 방식대로 입는 남자들은 꾸준히 등장했다. 오히려 반항, 개성, 독특함의 상징으로 멋쟁이들의 손에 쥐어졌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핑크 슈트와 핑크 캐딜락을 자신의 자유로운 이미지 안으로 끌어들였고, 데이비드 보위와 커트 코베인은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경계를 대수롭지 않게 넘나들며 핑크를 입었다. 그리고 지금 그 계보는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해리 스타일스가 화려한 핑크 퍼 코트를 걸친 채 무대를 누비고, 루이스 해밀턴이 핫 핑크 셋업을 입고 마이애미 그랑프리에 참석한다고 해서 ‘남자가 핑크를 입었다’는 것을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퍼렐 윌리엄스나 지드래곤,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처럼 일상에서 핑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하는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디자이너들 역시 그 경계를 느슨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톰 포드는 핑크를 클래식한 남성복 안에 자연스럽게 끌어들였고, 라프 시몬스는 유스 컬처와 테일러링 사이에서 여러 차례 핑크를 변주했다. 색과 소재에 붙은 오래된 성별의 규칙을 흔든 킴 존스와 조나단 앤더슨은 어떠한가.
Harry Styles
Lewis Hamilton
G-Dragon
Tyler The Creator
Dylan O’Brien
Jaehyun
Timothée Chalamet
핑크를 입은 남자를 “용감하다”고 콕 집어 칭찬하던 시대는 한물갔다. 젠더리스 트렌드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색이 남성적이고, 어떤 소재가 여성적인지를 구분하는 행위 자체가 점점 낡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젠더리스의 흐름이 반가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성의 것을 남성이 ‘빌려 입는’ 1차원적인 생각을 넘어 애초에 무엇이 남성적이고 무엇이 여성적인지 되묻게 만드니까.
2026 F/W 맨즈 컬렉션 전반에도 여성복에 익숙했던 로맨틱 디테일과 장식, 다양한 채도의 핑크가 등장하며 경계가 느슨해졌다. 과거 남성이 핑크를 입는다는 사실 자체가 스타일이었다면 지금은 어떻게 입느냐가 관건이다. 핑크를 입었다고 해서 유난히 대담한 것도, 젠더의 경계를 허무는 거창한 선언을 한 것도 아니다. 잘 어울리니까 입고, 그저 멋있으니까 선택한다. 그러니 올가을 옷장 앞에서 핑크 카디건을 바라보며 ‘이걸 내가 입어도 될까?’ 망설이고 있을 남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입을지 말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스타일링 할지를 고민할 것! 색 하나를 놓고 누구의 것인지 따지기엔 핑크가 가진 스펙트럼은 너무 넓다. 옅게든 짙게든, 단정하게 혹은 화려하게 취향대로 입어보자. 핑크에 필요한 건 성 역할이 아니라 마음껏 향유할 사람뿐이다.
Dries Van Noten
Amiri
Louis Vuitton
Yohji Yamamoto
Credit
- 에디터 김성재
- 사진 게티이미지(인물)·IMAXtree.com(런웨이)·인스타그램(@8lo8lo8lowme)
- 아트 디자이너 김지원
- 디지털 디자이너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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