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헤어질까 말까? 지금의 연애 상대와 이별하면 좋은 점

헤어져야 할 때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주저하는 여성들에게 전하는 <코스모폴리탄>의 따뜻한 위로.

프로필 by 김미나 2025.12.22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넘기며 생각했다. ‘올해는 뭘 했지?’ 단편적인 일들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뭐 하나 제대로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첩을 들여다봤다. ‘1월엔 친구들과 청계산에 올랐고, 2월엔 우붓 리조트 선베드에 누워 있었지. 그리고 3월엔… 맞아, 헤어졌지.’ 3년 연애의 끝은 생각보다 싱거웠다. 별일 없으면 토요일은 늘 그와 보내는 시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우리는 만나서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거나 전시를 봤다. 그게 3년 동안 지속된 우리의 일상이었다. 우리도 처음에는 꽤 뜨거운 커플이었다. 매일같이 연락을 주고받고, 퇴근 후에 고작 한 시간을 보겠다고 서로에게 달려가기 바빴다. 슬프게도 3년이라는 시간은 이 모든 감정과 태도를 둔감하게 만들었다. 점점 연락의 횟수도, 만나는 빈도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언젠가부터 그의 표정과 말투, 행동도 예전 같지 않음을 느꼈다. 그러나 꼭 활활 타올라야만 사랑은 아니니까. 어쩌면 지금처럼 편안하고 무감해지는 것 또한 다른 형태의 사랑이라고 자위했다.


그날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주말 오후였다. 영화관 앞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상영 시간까지 조금 시간이 남아,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영화 끝나면 저녁 먹을 시간이네. 어디서 먹을까?” 내가 묻는 말에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휴대전화를 보며 무심히 대답했다. “글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당기는 거나?” “딱히?” 그저 습관처럼 튀어나온 무심함이었다. 우리가 매번 싸우던 지겨운 레퍼토리였는데, 그날따라 냉담한 그의 말투가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때였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끊어지는 느낌. 그건 내가 가까스로 잡고 있던 실낱 같은 희망이었다. “너한테 나는 그냥 루틴이지?” 내가 묻자, 그는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곤 다시 휴대전화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순간, 결심했다. 미지근해지다 못해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이 관계를 마침내 끝낼 결심을. 그날은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눈물이 나지도, 특별히 슬프지도 않았다. 그와 함께한 3년이라는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헤어질 결심은 단 한 번의 순간 때문이 아니었다. 그동안의 서운함, 기대와 실망이 켜켜이 쌓인 순간들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인 감정의 무게가 지금, 이 순간 임계점을 넘어선 것뿐이었다. 그와의 3년은 여기서 충분했다.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그만하자.”


이별의 순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물론 상대의 바람이나 폭력 같은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 쌓여 끊어지는 경우가 많다. 조금씩 마음이 멀어지는 순간이 쌓이고 쌓여 끝까지 갔을 때. 그 사람과 있을 때의 내가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지는 순간, 수십 번을 삼키고 참았던 말을 기어이 내뱉는다. 그날도 그랬다.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던 실이 툭- 끊어진 기분이었고, 그게 다였다. 그의 마음이 식었다는 걸 이미 눈치챘지만, 나는 어떻게든 사랑의 형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우리의 행복했던 지난날을 곱씹으며,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고 합리화했다. 어느 순간 이게 사랑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됐지만, 이 관계를 끝내는 것보단 내가 참는 편이 훨씬 쉬워 보였다. 혼자가 되면, 주말 저녁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조차 막막했다. 함께하는 외로움이, 혼자인 외로움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혼자인 게 두려워서 함께하는 건 사랑이 아니었다.


막상 헤어지고 나니 홀가분했다. 더 이상 기대할 것도, 불안해할 것도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하고, 평온했다. 그제야 보였다.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쏟은 에너지가 얼마나 컸었는지. 나는 왜 그토록 미련하게 이 관계에 매달렸던 걸까? 그때는 어리석게도 헤어지면 내 세상이 끝날 것 같았다.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고,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30대의 이별은 20대 때와는 밀도가 달랐다. 함께한 시간의 무게가 다르고, 그 시간 동안 쌓인 루틴이 있었다. 20대 때의 나는 걸핏하면 헤어졌다.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았으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연애도, 이별도 하나같이 쉽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은 이미 결혼을 하거나 육아 중인데, 나만 제자리걸음인 것 같았다. 30대의 이별은 단순한 관계의 끝이 아닌, 삶이 재구성되는 일이었다. 매일 일상을 공유하던 사람이 사라지고, 함께 그렸던 미래가 물거품이 된다. 내 삶의 일부였던 상대를 지워나가는 일은 마치 오래 살던 집을 떠나는 것처럼, 내 삶의 지형도를 다시 그려야 하는 일이다. 연애가 깊어질수록 관계는 단순한 설렘을 넘어 시간과 감정, 계획이 복잡하게 얽힌다. 서로의 삶에 깊이 관여하고, 오랫동안 쌓인 정이 관계를 붙잡는다. 설레는 데이트보다 퇴근 후 맥주 한 잔에 넷플릭스를 보던 금요일 저녁이, 아슬아슬한 스킨십보다 함께 장을 보던 평범한 주말 오후가 더 선명하게 남는다. 이별은 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게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했던 수천 번의 순간을 동시에 놓는 일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연애에는 언젠가 결심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 혼자만 이 관계에 매달리고 있음을 인정하게 될 때. 그제야 비로소 헤어질 결심의 순간이 찾아온다. 헤어지고 나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보였다. 앞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지, 관계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어떤 순간에 행복하고, 어떤 대화에서 살아 있다고 느끼는지, 관계를 빠져나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혼자가 된다는 건 결국 다시 나로 돌아오는 일이다. 다시 나의 리듬으로 하루를 살고, 나에게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 처음엔 낯설고 외롭지만, 점차 그 속에서 자유로움을 발견하게 된다. 연애에 쓰던 모든 에너지를 이제는 오로지 나에게 쓸 수 있다.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일정을 맞추고, 관계를 유지하느라 허비했던 시간은 이제 온전히 내 것이 된다. 그동안 미뤄뒀던 일을 하거나,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거나,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쉴 수도 있다. 나를 돌아보며 내면을 더 단단하게 다지는 시간. 이별은 그동안 잊고 있던 나를 되찾는 과정이었다. 그와 헤어진 후로 나는 달리기를 시작했고, 한 달에 한 번 독서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고, 주말엔 하루 종일 집에서 넷플릭스를 정주행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다시 내 일상을 채워나갔다. 이별은 내게 상실의 시간이 아닌 회복의 시간이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충만해진 느낌이었다.


가을이 되자, 그와 함께 걸었던 길을 혼자 아무렇지 않게 걸을 수 있게 됐다. 술집에서 우연히 같이 듣던 노래가 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눈물이 날 것처럼 슬프지 않았다. 그저 지나간 계절의 한 장면처럼 담담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정말 괜찮아진 것 같았다. 시간은 때로 잔인하지만, 약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슬픈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해 가을은 누가 옆에 없어도 충분히 괜찮을 수 있음을, 나 혼자서도 온전할 수 있음을 조용히 증명해낸 계절이었다.


다시, 연말이다. 찬 바람에 마음이 여기저기 부대낀다. 다가올 새해를 좀 더 가볍게 맞고 싶기 때문일까? 연말이 오면 괜히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래서 다양한 결심을 하게 된다. 술과 헤어질 결심, 직장과 헤어질 결심, 전 남자 친구의 망령과 헤어질 결심…. 그동안 끝내지 못한 관계, 스스로에게 미뤄둔 다짐들, 입는 옷과 입지 않는 옷을 정리하는 것처럼 관계에도 정리가 필요하다. 나를 좀먹는 관계, 서로가 서로에게 불행한 관계라면 더는 망설일 필요 없다. 결심이 어려울 뿐, 막상 하고 나면 별것 아니다. 끝맺음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오듯, 용기 내어 마침표를 찍는 순간 다음 문장을 쓸 수 있는 여백이 생긴다. 올해의 마지막 달력 위에 무엇을 결심할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결정하는 일은 오로지 당신의 몫이다.

writer 이봄(프리랜스 에디터)

Credit

  • Editor 김미나
  • Writer 이봄(프리랜스 에디터)
  • Illustration by LIMOO
  • Digital designer 변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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