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루 네크리스 6천8백61만원, 울루 링 1천8백6만원 모두 Qeelin. 드레스 Goen.J.
드라마 <정년이>에 쏟아지는 열렬한 호응, 체감 중인가요? 그 중심에 모두의 왕자님, ‘문옥경’이 있죠.
어르신들이 알아봐주시는 건 확실히 느껴져요. 제가 평소 편하게 잘 다니는데, 요새는 어르신들이 많이 말을 걸어주세요. ‘아, 이 작품이 다양한 연령대의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기쁘죠.
자신이 이렇게 잘생겼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멋지다는 말, 들으면 기분이 어떤가요?
기분 너무 좋죠. 예쁘다는 얘기보다 멋지다는 말을 듣는 게 더 기분 좋아요. 멋지다는 건 극찬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문옥경의 매력에 힘입어 저도 덩달아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 좋아요.
현장에서도 여성 동료들에게 왕자님이라 불렸다던데요.
처음엔 스태프분들이 그냥 재미로, 농담 삼아 한 건데 나중엔 정말 다들 입에 붙어버려서…. 저는 옥경이라는 이름보다 ‘왕자님’으로 더 많이 불린 것 같아요.(웃음) 어린 친구들이 그렇게 부르는 게 쑥스러웠지만, 오랜 시간 왕자님으로 지내며 적응이 됐어요. 매란국극단 단원으로 출연한 친구들이 여고생처럼 조잘조잘 모여서 얘기하는데 저랑 (김)윤혜 씨는 그 에너지를 따라가지 못해 뒤편에서 “아, 너무 귀엽다” 하면서 구경하곤 했죠.
왕자 분장을 하고 거울 앞에 서서 문옥경을 처음 바라봤을 때, 느낌이 어땠을지 궁금해요.
국극 분장이 실제로 보면 훨씬 더 세거든요. 어색하기도 하고, 이 분장을 뚫고 내 연기가 보일까 걱정도 됐는데, 그래도 무대는 확실히 무대 분장을 하는 게 맞나 봐요. 강렬한 분장과 맞붙는 에너지를 표출해야 하니까, 연기하는 데 힘을 많이 받았어요. 이렇게 가면을 하나 쓰고 연기하는 게 좋더라고요. 거기다 왕자 의상은 엄청나게 여러 겹을 입거든요. 무대 위에 사람이 산처럼 우뚝 서서, 그 어떤 장치 없이도 호동 왕자가 무대 위에 등장했을 때 시선이 집중될 수 있는 아우라, 품새가 중요했죠. 그건 의상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울루 이어링 7백만원, 울루 네크리스 3천3백16만원 모두 Qeelin. 드레스, 스타킹, 스니커즈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문옥경이라는 역할을 제안받았을 때 어땠나요? 조금 의외라고 느끼진 않았나요?
제가 연기했던 캐릭터들이 대체로 여성스러운 캐릭터여서 의외기도 했고, 신선하기도 했죠. 여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연기를 보여드릴 기회가 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감독님과 만나 왜 제게 이 역할을 제안해주셨는지 여쭈었을 때, 지금까지 제 짧은 머리를 본 적은 없지만 충분히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해주셔서 감독님의 취향을 믿어본 결과이기도 해요.
하하. 사실 제 실제 성격이나 취향은 중성적이고 보이시한 편이에요. 스스로가 한 번도 여성스럽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죠. 그래서 문옥경 같은 태도의 역할이라면 완전히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뭔가를 꺼내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여성들의 선망과 애정의 대상이 되는 경험은 아마도 처음 겪는 일일 것 같은데, 국극 안에서나 밖에서나 왕자님인 문옥경을 연기할 땐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사랑을 받는 행위는 그 자체로 충만한 느낌을 주죠. 현장에서 연기를 할 때도, 떠나 있을 때도 계속 옥경이라는 사랑받는 캐릭터를 마음속에 품고 있으니 항상 많은 동료, 스태프들에게 사랑받는 기분이었고 촬영하는 내내 되게 행복한 1년이었어요. 제가 영국에서 여자 중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여학교에는 스포츠에 능하거나 리더십이 있다거나 해서 친구들의 사랑을 받는 캐릭터가 있잖아요. 저는 학창 시절 그냥 조용한 애였는데, 마치 그런 인물이 된 기분이었어요.
문옥경을 멋지게 보이게 하는 건 잘생긴 얼굴이나 키다리 아저씨 같은 행동뿐 아니라, 권태롭고 나른한 분위기 때문이기도 해요. 이런 무드를 연출하기 위해 의도한 바가 있나요?
옥경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신비로운 면이 있어요. 모두에게 친절하고 따듯하지만 선을 넘지 않죠. 모두에게 조금씩 거리를 두는 듯한 캐릭터여서, 저 사람이 진짜 무슨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미스터리한 감각을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왕자로서 굵직한 선을 보여주고, 멋진 모습을 보여줄 때 말고 옥경이가 혼자 있을 땐 어떤 모습일까, 그런 걸 생각했죠. 저는 어떤 배역을 맡을 때마다 그 캐릭터가 혼자 있을 때 어떤 모습일지 상상을 많이 하거든요. 그 태도나 몸의 감각이나, 표정을 지니고 카메라 앞에 설 때 제가 만들어놓은 것들이 묻어나온다고 생각해요.
울루 이어링 8백4만원, 울루 네크리스 2천1백44만원 모두 Qeelin. 탱크톱 Recto.
느긋해 ’보이는’ 것? 하하. 적당히 간격을 지키고, 기복이 심한 편이 아니라 사람들도 절 그렇게 느끼는 면이 있는 듯해요.
2023년 8월 정도였을 거예요. 지금 이 길이가 기른 거예요. 과감하게 자르고 나니 이렇게 자르기를 너무 잘했다 싶었죠. 자주 길이를 다듬어야 하지만, 머리를 감거나 말릴 때는 정말 완전 새로운 세상이구나 싶더라고요.(웃음) 덕택에 드라마 <유어 아너> ‘강소영 검사’도 짧은 머리로 연기했는데, 그 작품도 감독님이 이 헤어스타일을 너무 좋아하셨어요.
남자보다 더 번듯한 남자 역을 소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요?
국극 무대 연기를 할 때는 좀 과장되게 표현해야만 뚫고 나오는 부분이 있어서 몸에 익히기 위해 정말 많이 연습했어요. 제 몸동작이 여성스럽다는 걸 모니터링하면서 처음 알았죠. 어떻게 해야 무대에서 좀 더 커 보일 수 있을지, 좀 더 남성스러울지 많이 고민했는데, 그 모든 걸 하나하나 의식하고 연기하면 로봇같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더라고요. 오히려 제가 남성성의 스테레오타입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아예 그건 걷어내고, 편안한 상태에서 옥경이가 입을 법한 중성적인 셔츠와 팬츠를 입고, 그런 태도로 살다 보면 그런 모습이 보일 거라 생각해 스스로에게 믿고 맡겼죠. 다만 목소리는 가능한 톤 다운했는데, 점점 자리를 잡아서 이제 평소에도 옥경이 톤으로 말하며 살고 있어요.(웃음) 저는 잘 몰랐는데, 주변에서 “어, 지금 방금 옥경이 같았어”라는 말을 자주 해요. 아무래도 긴 시간 동안 몸이 체득해서인가 봐요.
이렇게 여성 캐스트들끼리 드라마 한 편을 견인해간 경험은 어땠나요?
굉장히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소중한 작품이죠. 사실 남성 위주로 나오는 작품은 이미 너무 많아서, “우리 남자들끼리 끌고 갑시다!” 이런 대화를 할 일이 없잖아요. <정년이>처럼 대다수가 여성 캐스트인 작품이 앞으로 좀 더 다양하게 나오는 자체가 굉장히 의미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정년이>는 다들 소리와 국극 연습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같이 보낸 시간이라는 걸 무시 못 하거든요. 촬영 시간보다 연습 시간이 더 길었을 정도라서. 같이 합을 맞추고, 스킨십하고, 웃으며 보낸 시간이 길어서 한 명 한 명 너무 애착이 생겼죠. 극단 생활을 실제로 한 느낌? 특히 (김)윤혜 씨랑은 계속 파트너로 연기하면서 지내다 보니 서로 눈만 봐도 어떤 컨디션인지 알 수 있을 정도가 됐어요.
생각해보면 거칠고 중성적인 역할도 적지 않게 했어요. 드라마 <손 the guest>의 ‘강길영 형사’나 <유어 아너>의 강소영 검사 같은. 이런 인물을 연기할 때 드는 쾌감 같은 것도 있나요?
많은 분들이 강길영 캐릭터를 사랑해주셨죠. 피지컬로 밀어붙이는 여성 형사라니, 드문 캐릭터잖아요?(웃음) 액션 스쿨에서 살다시피하면서 온몸으로 연기했죠. 불같은 캐릭터라 저도 연기하면서 쾌감이 컸어요. 모든 캐릭터가 서로 다른 지점에서의 쾌감을 주지만, 이런 강한 캐릭터들은 부당한 상황, 권력 앞에서도 탱크처럼 밀어붙이잖아요. 굉장한 카타르시스를 줬죠.
결은 다르지만 드라마 <파친코>의 ‘경희’나 <안나(anna)>의 ‘현주’처럼 ‘현모양처’이거나 ‘아가씨’ 같은, 매우 페미닌한 연기에도 최적화돼 있죠. 여성성과 남성성, 어떤 얼굴이든 연기할 때 꺼내어 쓸 수 있는 배우처럼 느껴져요. 어떻게 그 경계를 넘나드나요?
<정년이> 전에 <파친코 시즌2>가 나와서, 두 작품 다 보신 분들은 옥경이와 경희의 대비를 많이들 재미있어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남성성과 여성성을 둘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부분을 좀 더 확대해서 쓰기도 하고, 어떤 부분을 좀 더 억제하기도 하면서. 저는 그걸 연기로 더 극적으로 푼 것뿐이고요. 이렇게 극과 극인 캐릭터를 왔다 갔다 하며, 가치관이나 취향도 실제로 더 확장됐어요.
1년 정도 짧은 머리로 지냈잖아요. 긴 머리에 스커트를 입고 구두를 신었을 때와 이렇게 짧은 머리에 팬츠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다닐 때 주변에서 나를 다르게 대하는 게 느껴지진 않던가요?
느껴지죠. 정말 대부분의 사람이 보여지는 것, 시각적인 것에 민감하다는 걸 느낀 경험이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지레짐작하거나 프레임을 씌우기도 하고. 저는 그 시선이 진짜 저 자신을 만든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다양한 시선을 느끼는 건 재미있는 경험이었고 배우로서 연기 폭이 더 넓어졌다고 생각해요.
<파친코 시즌2>의 경희는 외유내강의 정말 멋진 여자였는데, 정은채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기품이 있다면요?
일할 때, 사람을 대할 때 진실된 마음을 품은 것. 그것이 절 지탱하는 원동력이에요.
라지 울루 이어링 2천93만원, 오른손의 울루 링 4백35만원, 왼손의 스몰 울루 솔리드 링 6백36만원 모두 Qeelin. 재킷 , 데님 팬츠 모두 Jacquemus.
실제로도 정은채에게서는 어떤 품위가 느껴진단 말이죠. 큰 키와 살짝 굴곡이 있는 콧대, 근사한 턱, 몸짓이나 목소리 같은 것에서 발산되는.
글쎄, 그건 DNA로 만들어진 것일 테지만. 하하. 그 밖에서 느껴지는 것은 제가 살아온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요. 저는 뭐든 되게 잘, 소중하게 생각해요. 현장에서의 경험이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나 제게 주어진 사소하고도 많은 일들을. 일상적이고 평범한 하루가 실은 간절한 하루하루라고 생각하면서요.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으로 각종 신인상을 휩쓸었을 때가 생각나요. ‘해원’은 모두가 싫어하고 또 모두가 주목하는, 특이하고도 특별한 여자아이였죠. 그 역할을 마치 정은채 자신처럼 연기해냈어요. 그때의 정은채와 지금의 정은채는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나요?
그땐 젊었죠. 하하. 아직 연기 경험이 많지 않은 신인인데 너무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엄청 정신차리고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한편, 계산하지 않고 틀 안에 갇히지 않고 정말 자유롭게 연기했던 때이기도 했어요. 청춘의 특정 시기, 딱 어떤 나이대에 있었죠. 삶의 여러 방향성에 대해, 배우로서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이 무겁게 있던 아이였던 것 같아요. 그런 고민들은 아직도 있지만 지금은 좀 더 유연해지고 가볍게 느껴지는 시기예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제인 버킨이 당신을 보고 자신의 딸 샬럿 갱스부르를 닮았다고 했을 때 공감했어요. 정말 샬럿 갱스부르를 닮았거든요.
하하. 실제로 제인 버킨을 현장에서 만났을 때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되게 닮았다고. 그날 그 신이 현실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뿌옇고, 정말 환상 같은 느낌이에요.
수많은 작품에서 캐릭터를 연기했죠. 실제 정은채와 가장 닮아 있는 배역은 어떤 캐릭터였나요?
강길영 형사의 투박하고 몰입하는 면모와 뜨거운 성정, 문옥경의 기복 없고 거리를 두는 태도와 느긋한 속도, 경희의 평화주의자형 태도, 다 조금씩 저와 닮아 있죠.
그러면 해원이는 이제 배우님을 완전히 떠났나요?
해원이는 저의… 너무 애정하는 캐릭터죠. 제 청춘의 고민과 방황도 담겨 있고요. 십몇 년 전의 작품이지만, 지금도 아주 생생한 캐릭터예요. 그 영화를 생각하면 살아 있는 느낌이어서 되게 좋아요. 돌아가신 김자옥 선생님과 모녀 사이로 나와 다정한 신들을 연기했는데, 그 몇몇 신이 제게 무척 깊고 좋은 느낌으로 남아 있어요. 지금도 그 영화를 떠올리면 김자옥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위부터)울루 네크리스 3백10만원, 체인 네크리스 2백93만원, 라지 울루 펜던트 8백96만원, (오른손, 왼쪽부터)울루 에코 뱅글 8백37만원, 로즈 골드 뱅글 1천5백41만원, 뱅글에 결합한 스몰 울루 버클 5백91만원, 울루 에코 링 2백90만원, 울루 링 4백35만원, (왼손, 위부터)울루 링 8백79만원, 울루 미니 솔리테어 링 2백43만원, 울루 미니 쁘띠 링 1백47만원, 울루 미니 솔리테어 링 1백21만원, 울루 뱅글 1천55만원, 레드 아케이드 울루 뱅글 9백46만원 모두 Qeelin. 튜브톱, 트라우저 모두 Re Rhee.
영국의 기숙사에서 살던 시절엔 어떤 아이였나요? 동양인이 별로 없었을 것 같은 환경인데요.
튀기 싫어하고 그냥 제 할 일에 몰두했던 착한 학생. 처음 영국에 가 언어가 자유롭지 않았을 때는 되게 위축도 많이 되고 외롭고 힘들었어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혼자 책과 영화를 많이 보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했고, 감수성을 많이 키웠죠.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나 <미술관 옆 동물원> <봄날은 간다> 같은 비디오테이프를 구해다 보면서요. 그 시절의 섬세한 한국 영화들을 참 좋아했어요. <고양이를 부탁해>는 지금도 가끔 생각나면 보는, 좋아하는 영화예요.
센트럴 세인트 마틴 대학교를 중퇴하고 연기를 하기로 결심했던 걸 떠올려보면, 어떤 마음이 정은채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것 같아요?
집과 학교만 오가며 쳇바퀴처럼 한 우물만 파다 보니, ‘이 일을 내가 평생 하는 게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디자인 전공이었는데, 혼자 작업을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좀 더 사람들과 부딪히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창작에 관심이 생기기도 했죠. 어릴 때부터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영화에 대한 동경이 컸기에, 어쩌면 연기를 시작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주변 사람들은 정은채를 어떤 사람이라고 해요?
보기보다 편안하고, 소탈하고 소박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고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 거의 자연인에 가까운 사람. 실제로 자연을 좋아하기도 하고, 인위적인 걸 좋아하지 않아요.
용감해진다는 감각은 평소와는 다른 뭔가를 꺼내는 감각인 거잖아요. 전 연기할 때밖에 없는 것 같아요. 평소에는 볼 수 없는 그런 모습을 현장에서는 해낼 때. 작품에서 연기를 할 때는 매번 용감합니다.
울루 후프 이어링 6백68만원, (왼쪽부터)티엔디 더블 링 3백90만원, 울루 링 8백79만원, 위아래로 착용한 울루 미니 솔리테어 링 2백43만원, 1백21만원, 울루 링 4백35만원 모두 Qeelin. 슬리브리스 톱 Carriere.
전 혼자 있는 시간을 무척 좋아하고 그 시간을 지루하다거나 따분하다고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필요한 사람이죠. 그럼에도 두려움을 떠올리면, 기약 없이 홀로 있는 것이 떠올라요. 가족들, 좋은 친구들은 어딘가에만 있어도 충분한 마음인데, 저 혼자 있다고 생각하면 두려워요. 그런 걸 생각하면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아요. 제가 힘들었던 어떤 시기에도 절대적으로 저를 지지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힘으로 버텨낼 수 있었죠.
글쎄요. 제가 오래 관계를 갖는 사람들을 쭉 나열해보면 공통적으로 정서가 따듯한 사람들, 인간적인 사람들, 표현에 있어선 서툴고 쑥스러움이 많을지언정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던 같아요. 그리고 또 다른 특성은 담대함인 것 같아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자신만의 밸런스를 찾은, 담대하고 내적으로 강인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인간적인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베풀고, 허들 앞에서는 더욱더 강해지는 사람들.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때의 정은채와 비교해본다면 어떤가요?
더 단단해졌죠. 더 단단해질 거고요. 그렇다고 믿습니다.
현장.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현장에서 정말 많은 사람이 각자의 역할에 집중하며 치열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들고, 힘이 나요. 저는 묵묵하게 자기 일을 오래도록 해나가는 사람들이 가장 멋지고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정년이> 현장에도 그런 좋은 자극을 준 사람들이 있었겠죠?
배움의 현장 그 자체였죠. 하하. 스태프, 배우 모두 너무나 실력자들이 많은 데다 인격적으로도 성숙한 사람들이어서 제가 정말 복이 많다는 걸 되새겼어요. 아마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현주로, 경희로, 옥경으로, 정은채는 끝없이 다면적인 얼굴을 드러내고 있어요. 다음에 보여주고 싶은 얼굴이 있다면요?
제가 아니라 작품이 운명처럼 저를 택하는 것 같아요. <정년이>의 문옥경이 그랬듯, 운명 같고 선물 같은 또 다른 작품과 새로운 배역을 만나고 싶네요.
전 항상 시작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는 현장에 나가면, 거긴 제가 기존에 알던 현장이나 했던 캐릭터가 아니잖아요. 다시 거기서부터 시작이에요. 그래서 이 일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면도 있고, 그렇기에 매일매일 다시 용기를 내야 하죠. 제가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시기는, 한참 더 나이 들어서 얘기해보고 싶네요. 한, 80대?
멋지게 나이 들 것 같아요. 경희 분장을 보면서, 정은채 배우가 나중에 백발이 되면 정말 근사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라는 사람을 가장 투명하게 대변할 수 있는 건 제가 살아온 시간들이에요. 저는 그 시간들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