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당신이 생각하는 여름은 무엇인가요?

고이고이 접어 오래도록 담아두고 싶은 여름 내음.

프로필 by COSMOPOLITAN 2023.07.04
 

Sea of Summer

여름 바다, 미지의 냄새
여름방학 여행은 언제나 갑자기 시작됐다. 한밤중 엄마가 어깨를 흔들면 일어나, 잠을 뒤집어쓴 채 뒷좌석에 실려 가는 식으로. 한계령 휴게소를 거쳐 동해로 갈지, 갯벌에서 조개를 잡으러 서해로 갈지, 낚싯배를 타고 남해의 어느 섬으로 갈지는 몰랐지만 분지에 살았던 우리 가족의 목적지는 언제나 바다였다. 자동차 계기판 옆에서 돌아가던 작은 지구본, 전화번호부만큼 두꺼운 지도책, 부모의 목덜미에 묻은 옅은 설렘…. 뒷좌석에 웅크려 자다 반쯤 눈을 뜨면 그런 것들이 시야로 들어왔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아빠는 그날 묵을 민박집을 찾기 전 바다 앞에 차를 세웠다. 차 문을 열면 진하고 습한 물비린내가 훅 끼쳤다. 벼농사를 짓는 그의 갤로퍼에 켜켜이 쌓인 흙냄새나 담배 냄새와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그건 바닷마을 특유의 짠내라기보다 알지 못하는 도시와 사람들이 자아내는, 끝이 없는 바다에서 밀려오는 미지의 냄새였다. 바지를 걷고 젖은 모래를 밟으면 소금기 어린 그 냄새가 우리를 안개처럼 에워쌌다. 새벽 바다로부터 온 파도가 발목에서 찰박일 때, 마음은 살짝 벅차오르고 무서웠다. 나는 너무 작고, 모르는 게 많았다. 바다의 크기는 가늠하기 어렵고, 내가 이 세상에서 무얼 할 수 있는지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두려운 마음을 안고 작게 숨을 들이쉬는 수밖에. 콧속을 타고 미지의 여름이 흘러 들어왔다.
 
text by 이현아(에디터, 아트 라이터)  photo by 이우정 
 

Forgiven Peach

여름을 용서할 수 있게 하는 복숭아 
가장 좋아하지 않는 계절을 고르라면, 주저 없이 여름이다. 더운 것도, 습한 것도, 끈적이는 것도 싫다. 여름에 심드렁하기 때문에 여름옷이 별로 없고 여름휴가도 잘 가지 않는다. 대체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그늘 속에서 시간을 보낸다. 여름 예찬론자들 사이에서 소신 있게 여름을 부정하지만, 여름이 가진 것 중 좋아하는 것도 드물게 있다. 바로 여름밤과 여름 과일이다. 수박, 참외, 포도, 자두, 복숭아. 이름도 사랑스러운 복숭아는 촉감으로 먼저 인지된다. 벨벳처럼 고운 솜털을 기분 좋게 벗겨내 먹기 좋게 조각을 내고 있노라면, 복숭아의 은은한 향이 기분 좋게 올라온다. 복숭아 향은 여름 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청춘으로부터 멀어진 지 오래건만, 여름 드라마는 나를 청춘의 한가운데로 이끈다. 여름의 온도와 습도를 용서할 수 있게 한다. 복숭아 향이 머무는 잠시 동안만.

 
text by 임나리(워드앤뷰 디렉터)  photo by 장수인 
 

Dive into a Pool

웃음 짓게 만드는 수영장 냄새 
수영장에 다다르면 나는 냄새가 있다.
그 냄새가 나면 ‘드디어 도착했구나’ 싶어 마음이 들뜬다. 락스 냄새인지 물 냄새인지 모를 그 향기를 맡으며 수영장에 들어간다. 로커 키를 받는다. 오늘은 17번 로커구나. 옷을 벗고 살짝 작은 듯 딱 맞는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높은 층고에 울리는 말소리, 첨벙첨벙 울리는 물소리가 더해지니 수영장에 왔음이 실감 난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물속에 발을 살짝 넣어 온도를 확인한다. 여름에는 온수가 꺼져 오히려 차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풀장 안으로 이어진 계단을 차근차근 밟으며 물로 들어간다. 발부터 무릎, 허벅지 다음 가슴까지, 내 몸이 놀라지 않게 천천히 물에 담가 온도에 적응한다. 아직 살짝 차가운데 용기를 내어 머리까지 물속에 풍덩 담근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물이 들어가고, 기지개 켜듯 물살을 가르며 움직여본다. 몇 번의 움직임으로 고새 물과 한 몸이 된 듯 몸이 풀린다. 아, 개운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바닥에 배가 닿을 듯 잠영을 하면 먹먹하게 고요해진다. 물고기는 없지만 물속을 자세히 살펴보면 물을 파고드는 반짝이는 햇빛, 그리고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text by 양수현(레디투킥 파운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photo by 천일홍 
 

Touching Gently

사랑의 다른 말, 선크림
 
 
 
 
엄마는 내 등 구석구석에 선크림을 펴 발라주었다. 그 선크림 냄새와 함께 우리 가족의 안온한 바캉스가 시작됐다.
야외 수영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도 선크림 냄새가 풍겼다. 몇 번이나 바르고 또 발랐길래 샤워실에도, 수영장에도 그 냄새가 났을까? 엄마의 사랑을 온몸에 골고루 바른 아이들. 나도 그중 하나였다. 향기란 참 신기하지. 여름의 거리에서 강렬한 선크림 냄새를 맡을 때마다 야외 수영장에 깔려 있는 돗자리 위로 소환되고 만다. 엄마가 락앤락에 수박과 참외를 가득 싸 왔던 특별한 날. 할머니의 손을 잡고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엄마는 물에 쓸려 간 선크림을 다시 꼼꼼히 발라줬다. 나에게 선크림의 향기는 일상보다는 일탈의 냄새고, 사랑하는 사람과 꼭 붙어 있던 날들의 냄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이 닿는 시간. 서로의 일탈이 안전하고 즐겁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향기. 목욕탕에서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것처럼, 서로의 몸을 꼼꼼히 바라보는 시간이 끝나고 나면 서로의 등이 하얗게 떠 있었다. 그럼 우리는 크게 웃었다.
 
text by 오지윤(카피라이터) photo by 최모레 
 

Scent of River

동강의 향 
이번 여름 꼭 기억하고 싶은 새 향이 생겼습니다. 강과 숲이 함께 있는 영월에 위치한 동강의 내음입니다. 말에 치이고, 말에 힘을 얻는 이상한 하루를 보냈던 터라 고요한 곳에 가고 싶었습니다. 운전하다 넋이 나간 듯 문득 차를 멈췄습니다. 숲 내음과 강의 향을 맡으니 그 앞에 정면으로 서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청량한 나무 향이 맑고 잔잔한 강의 향과 만나니 복잡하게 아름다웠습니다. 산과 강이 보내는 오라에 압도됐습니다. 물기를 입어 더 명료해지는 것 같기도 했고요. 그러나 그곳엔 처음 맡는 청명함이 있었습니다. 말 사이에 뒤엉기던 나는 어제의 기분도, 사람들도 잊고 오로지 숨을 쉬고 뱉는 데만 집중하게 됐어요. 하나의 감각에만 몰두하며 단순해지고 명쾌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 향 때문에 여름이 끝나기 전, 영월에 꼭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text by 이훤(시인, 사진가)  photo by 장기평 
 

Credit

  • Editor 천일홍
  • Photo by 이우정/장수인/천일홍/최모레/장기평
  • Text by 이현아(에디터.아트 라이터)/임나리(워드앤뷰 디렉터)
  • Text by 양수현(레디투킥 파운더.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오지윤(카피라이터)
  • Text by 이훤(시인.사진가)
  • Art designer 장석영
  • Digital designer 민경원

MOST LIK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