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울 거야! || 코스모폴리탄코리아 (COSMOPOLITAN KOREA)
Society

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울 거야!

여자들이 취미로 농구를 하고, 피구 대신 축구를 하는 세상. 다이어트가 목적이 아닌 복싱, 여성 코치에게 배우는 주짓수는 어떤 느낌일까? ‘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운다’ 프로젝트 기획자가 사력을 다해 전하는 ‘여가여배’의 기쁨, 그리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팀 스포츠의 쾌감에 대하여.

COSMOPOLITAN BY COSMOPOLITAN 2022.03.08
 
‘여자 여자 여자’. 내가 진행할 팟캐스트 제목이다. 아무도 제안한 적 없고, 아무 계획도 없지만 만약 팟캐스트를 하게 된다면 저 제목으로 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여자 이야기가 형편없이 부족하던 시절을 어떻게 살아왔나 싶을 만큼, 요 근래 부쩍 많아진 여자들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여자들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싶고 더 많이 듣고 싶다. 여성 대상 비정기 클래스 ‘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운다’에서 ‘여자’를 두 번이나 썼는데도 이제는 여자를 적어도 세 번은 언급하는 제목을 원한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모여서 하는 일은(그중에서도 팀 스포츠는) 엄청나게 재밌고 믿을 수 없이 신나기 때문이다. 성인이 돼 팀 스포츠를 처음 경험한 여자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이 재밌는 걸 왜 이제 알았지?” 그리고 분노한다. “아니,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
 
‘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운다’(이하 ‘여가여배’)를 처음 기획한 이유는 단순했다. 인도의 금메달리스트 레슬러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당갈〉을 보고 뽕이 차올라 레슬링과 주짓수, 복싱 도장을 뒤지며 배울 곳을 찾았다. 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한 가지를 알게 됐다. 더 이상 남자에게 배우고 싶지 않다는 것을. 살면서 남자가 가르치는 곳에서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너무 많이 들었고,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신경을 건드리는 일을 너무 많이 겪었다. 그렇게 다소 충동적으로 첫 클래스를 만들어 진행한 뒤 큰 충격에 휩싸였다. 아니, 이렇게까지 쾌적하다고?
 
강한 여성 지도자들을 눈앞에 두고, 함께 배우는 사람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며, 서로의 몸을 재단하고 평가하지 않는 매트 위에서 함께 뒹굴며 땀 흘리는 기쁨이라니(쩐내도 나지 않는다!), 아… 나는 그 맛을 보아버렸다. 그러자 더 많은 맛을 보고 싶어졌다.
 
여자 농구단과 축구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20명이 넘는 낯선 사람 사이에 끼어 무언가를 해야 하다니. 내 엉성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다니. 그동안 적당한 곳에서 적당히 잘할 만한 것들만 해왔을 뿐인 나는 아무런 필터 없이 미숙함을 드러내기가 몹시 두려웠다. 그러나 여자들은, 우리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들은, 누가 봐도 어리숙한 나를 절대로 어리숙하게 여기는 법 없이, 곧 함께 경기를 뛸 동료로 귀하게 대해주었다. 날아오는 공을 잡지 않고 피해버리는 초보에게 잘 잡는 법을 알려주었고, 받기 좋은 속도의 공과 조금 용기를 내야 하는 공을 적절히 섞어 던져주었다. 그곳에는 “여자들은 아무래도” 같은 내려치기도, “여자치고는” 같은 올려치기도 없었다.
 
평등이란 얼마나 폭신한 우레탄 코트 같은지. 헌법에 명시된 그 권리를 오랫동안 누려보지 못한 여성은 눈물을 훔치며 “이곳이 내가 묻힐 곳”이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운동 에세이 〈내일은 체력왕〉에 소개한 바 있는 ‘미친 고구마 줄기 이론’의 근간이 세워진 게 이 무렵이다. 고구마를 캐본 적이 있는지? 줄기를 하나 잡아당겨봤을 뿐인데, 눈물이 날 만큼 수많은 고구마가 줄줄 따라 나오는 경험 말이다. 마치 고구마처럼, 나는 그렇게 운동에 미쳐버린 여자들의 줄기를 잡았다. 여자 농구단과 축구단의 입구를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한번 찾고 나니 그들은 끝없는 고구마 줄기처럼 연결돼 있었다. 이제 이 미친 줄기를 온 세상에 이식하는 게 내 사명이다. 거창한 단어를 썼지만 솔직히 이건 매우 쉬운 일이다. 팀 스포츠를 하면서 느끼게 될 기쁨(및 다양하고 찬란한 감각들)의 씨앗을 가슴에 품고 있는 여자들에게 여자 동료들이라는 비를 맞게 해주면 된다. 여자 동료들만이 가진 단단한 햇살을 쐬게 해주면 된다. 그 비와 햇살에 대해 몇 가지 적어보겠다.
 
여자들이 팀 스포츠를 하면,
① 검은 속내가 없는 친절을 경험할 수 있다. 초보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대가로 뭘 어떻게 해보겠다거나, 시혜를 베푸는 스스로에게 도취하는 그런 진절머리 나는 부분이 없는 깨끗한 친절이다. ‘내가 뉴비일 때 받은 그 친절을 나중에 팀에 들어오는 뉴비에게 그대로 베풀고 싶다’는 내 안의 살아 숨 쉬는 선한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건 덤이다.
 
②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한다는 강박 없이 잘 지낼 수 있다. 대체로 사람을 만날 때는 내가 누구이고 상대가 누구인가를 토대로 그것을 증명하고 확인하는 데 골몰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팀 스포츠에서 골몰해야 하는 건 오직 경기다. 덕분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 지나치게 알 필요가 없다. 그 적당한 거리감이 좋다.
 
③ 각양각색의 여자를 만날 수 있다. 현재 내가 속해 있는 농구단과 축구단에서 만난 사람들의 직업을 나열해보면 뮤지션, 영화감독, 교사, 변호사, PD, 대학(원)생, 미술 작가, 디자이너, 각본가, 그림 그리는 사람, 건축설계사, 공무원, 타투이스트, 회사원, 배우 등이다. 선거 때 주민센터에서 우연히 한 줄로 서는 것 말고 어디서 이런 조합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④ 3번과 비슷한 맥락인데, 멋진 여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실력이 멋진 사람, 태도가 멋진 사람, 체격이 멋진 사람… 심지어 실력과 태도가 멋진 데다 체격까지 멋있어서 마냥 좋아하기엔 배가 아픈 사람들까지. 여기서 멋진 체격이란 세간의 기준과 좀 다를 수 있다. 일단 운동을 잘하는 여자를  보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멋있게 보인다. 굵고 탄탄한 허벅지는 물론 그 사람이 들고 다니는 텀블러까지도.
 
⑤ 내가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대한 신경이 꺼졌을 때의 자유로움을 맛보게 된다. 비 오듯이 쏟아지는 땀을 받아내는 여자들의 맨얼굴을 보면서, 흘러내리는 땀을 막기 위해 이마 저끝까지 헤어밴드를 올려 찬 그들의 모습에서, 누구도 내 가슴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 옆구리가 튀어나왔는지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는 곳에서 나는 그냥 나여도 된다는 안도감에 젖어들게 되고, 그것은 나중에 코트나 운동장을 벗어난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길러온 머리를 잘랐고, 내 얼굴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화장을 벗었다. 그냥 그렇게 돼버렸고 아주 편안해졌다.
 
⑥ 오만 가지 감정을 마주할 수 있다. 경기가 잘 풀릴 때의 벅차오름, 점점 깊어지는 신뢰, 기용되지 않은 경기에서의 분함, ‘존잘’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질투 같은 것들. 코트나 운동장 위에서의 감정은 일상에서의 그것보다 좀 더 높은 밀도와 선명함을 가지고 있다. 내게 이런 감정이 남아 있었나 싶었던 것들까지 되살아난다. 그것을 총칭하는 말은 아마도 ‘살아 있음’이 아닐까 싶다.
 
나는 두 마리의 고양이와 살고 있다. 그중 둘째 ‘미탁이’를 보면서 ‘안전’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한다. 생후 1개월쯤 구조돼 길고양이 자아가 덜 장착됐던 첫째 ‘반차’에 비해 길에서 3개월 넘게 살다가 구조된 미탁이의 경계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집으로 데려온 지 두 달이 돼가도록 나는 미탁이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밤에 물 마시러 가다가 후다닥 숨는 그림자를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미탁이를 볼 수 없는 채로 한 집에서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미탁이가 자고 있던 내 발가락을 툭 치고 도망갔다. 다음날엔 살며시 머리털을 물어뜯었다. 세상에, 미탁이가 내게 장난을 치다니! 내 머리털 다 가져! 침대 밑에서 나와 인간에게 장난을 치게 되기까지 미탁이에게는 안전이라는 감각을 확보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모든 여자가 팀 스포츠를 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도 검열할 필요도 없이, 서로를 믿으며 생겨나는 안전한 감각 속에서 맘껏 우리여도 되는 경험을 꼭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한 명 한 명이 미친 고구마 줄기가 돼 이 세계를 친친 휘감아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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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freelancer editor 강소희(‘여가여배’ 기획자/ TBWA 카피라이터)
    editor 강보라
    illustrator 손정민
    digital designer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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