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 포항 시민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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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진정하 대표
나름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운 회사 생활을 하던 중, 서른다섯에 제과제빵 기술을 배우러 프랑스로 떠났죠.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고민을 쭉 했었는데, 가업을 이으면서 비로소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가치와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평생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과 그 일로 고객에게 추억을 선물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가업을 이을 명분은 충분하죠.
Q. 리브랜딩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뭔가요?
포항 시민의 추억 속 제품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요. 폐점한 지 13년 된 가게를 재오픈하려다 보니 공간적인 재현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 제품에 더욱 신경 썼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의 시민제과를 모두 경험하신 베테랑들의 도움이 컸죠. 그 과정에서 30년 이상 시민제과에 몸담았던 예전 공장장님과 16살에 입사해 20년 이상 근무하셨던 기술자분들을 다시 모셔왔고요. 특히 밀크셰이크는 창고를 뒤져 찾아낸 아버지의 수첩에 기록된 레시피를 고스란히 복원했어요.

포항이 시로 승격되던 1949년에 시작해,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포항 시민과 함께해온 가게다 보니, 포항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민제과에 대한 추억 하나는 갖고 계시더라고요. 퇴근길에 아버지가 시민제과 빵을 사 오실 때 가장 행복했다고 말씀해주시는 손님부터 시민제과 2층에서 미팅한 분과 결혼까지 하셨다는 분, 갑자기 다가오셔서 제 손을 꼭 잡으시고 다시 오픈해준 것만으로 너무 감사하다고 말씀해주시는 분, 1980년대 시민제과 빵 봉투를 돌려주시는 분, 시민제과 덕에 쇠퇴하던 구도심이 살아난다고 응원해주시는 분까지. 각자의 시간 속에서 시민제과를 추억하는 오랜 단골들 덕에 저희 브랜드가 70년 이상 지속될 수 있었어요.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포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성장하고 싶어요.
1987 부산 신기산업, 신기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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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이성광 대표
카페를 경영하기 전에는 에버랜드에서 대형 초식동물 사육사로 일했는데, 가족과 함께 살자는 형의 제안으로 고향으로 돌아왔죠. 어느 날 형과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 우리가 대를 이어 더 멋지게 보여주자”라는 대화를 하면서, 그때 처음으로 ‘가업을 잇는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어요. 제게 가업을 잇는다는 건 거창한 의미가 아니라 아버지가 시작한 터에 세운 신기카페가 다음 세대에게도 사랑받고 언젠가는 옛것이라고 불리울 때까지 이어지는 걸 의미해요. 몇십 년 후에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어요. “와, 여기 아직도 있네. 근데 아직 멋있다.”
Q. 리브랜딩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뭐예요?
컨베이어 벨트가 상징하는 ‘반복’과 ‘이어짐’의 선형 이미지가 많은 영감이 됐어요. 과거와 현재로 이어져온 신기산업이 걸어온 길과 닮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신기카페의 매력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아버지 세대의 문화와 지금 저희 세대의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라는 점이에요. 인테리어에서부터 ‘우리’가 여기에 계속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1987년 오픈 당시 청룡금속 현판, 신기산업 옛 현판, 아버지가 방울을 찍을 때 썼던 기계와 컨베이어 벨트 같은 요소를 카페 밑에서 운영하는 신기잡화점에 오브제처럼 전시해뒀죠. 건물 외관은 청룡금속과 신기산업의 정체성인 철 디테일을 살려 컨테이너 느낌으로 지었고, 건물 곳곳에 철제 디테일을 녹여냈어요.

신기산업이 부산 영도에서 나고 자란 기업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해요. 우선 신기산업이 영도라는 지역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고, 신기카페로 영도에서 큰 규모의 카페를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의미도 커요. 이후 영도에 대형 카페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물론, 전시 같은 콘텐츠 사업 제안도 속속 들어오고 있거든요.‘영도에선’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죠.
1969 강화 금풍양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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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양태석 대표
식품공학을 전공하고 약 15년 동안 홍보·마케팅 사업을 했어요. 클라이언트 제품 대신 우리 양조장 제품을 홍보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가업에 뛰어들게 됐죠. 2020년은 저희 양조장이 건축된 지 90주년이자 아버지가 팔순이 되신 해라 이를 기념해 양조장을 새롭게 리브랜딩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양조 사업에 그치지 않고 전통주와 농업, 업사이클링을 연계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강화도 전통주의 명맥을 새롭게 이어보려 해요. 강화도는 쌀이 유명한 지역인데, 막걸리의 주원료가 쌀과 물이잖아요. 지난 100년을 넘어 앞으로의 100년을 준비하는 양조장으로 만들어보려 노력 중입니다.
Q. 리브랜딩하면서 신경 썼던 부분은요?
가장 큰 변화는 패키지예요. 라벨 디자인부터 변경했는데, 전체적인 브랜딩 키 컬러를 블랙&골드로 설정해 100년 양조장의 품격을 표현했어요. 패키지는 트렌디하게 바꿨지만 맛만큼은 전통주의 명맥을 그대로 잇고자 노력했고요. 강화도 쌀, 온수리의 지하수로만 막걸리를 만들고 무농약, 무감미료, 제로 웨이스트라는 3무 원칙을 지키는 프리미엄 막걸리를 선보여요.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을 위해 금풍양조장 시설 역시 원형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요. 강화도를 대표하는 100여 년 양조장인 만큼 건물의 원형을 계속 유지하고 보존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금풍양조장은 강화도 온수리 지역의 랜드마크로 100년 동안 자리해왔어요. 잠시 영업을 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는지라, 이 지역분들에겐 양조장이 새롭게 출발한다는 것만으로도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요. 리뉴얼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책임감과 감사함을 느끼는 대목이죠. 이런 훌륭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아 대를 이어 지킬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럽고, 한편으로는 겸손해지기도 해요. 한번은 가수분들이 양조장에 오셨다가 즉흥 콘서트를 열게 됐는데, 저희 지역 그리고 저희 가족이 오랜 세월 일군 공간에 유명 인사들이 찾아와 함께 노래하며 응원해주시는 모습을 보니 문득 가슴이 벅차더군요. ‘앞으로 더 잘 버티자, 잘 만들어가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9 강릉 초당소나무집&순두부젤라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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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김범준 대표
20대 초·중반까지 독일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하다가 부상과 병역 문제로 귀국했어요. 어려서부터 즐겨 먹던 순두부를 디저트로 만들어보고 싶던 차에 유럽에서 즐겨 먹던 젤라또가 떠올랐죠. 그런데 당시 강릉 사람들에게 젤라또는 너무 생소한 먹거리였어요. 초창기엔 “젤라또?” 하며 젤리로 착각하는 어르신도 많았고요. 지금은 순두부젤라또가 인기를 끌면서 유사 제품을 만드는 업체도 많이 생겨났어요. 맛을 인정받은 건 기쁘지만, 순두부 아이스크림을 식후에 추가로 매출을 높이는 방법으로만 생각하고 메뉴의 퀄리티나 본질을 훼손시키는 경우가 많아 최초 개발자로서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해요.
Q. 가업의 전통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브랜드를 새롭게 리뉴얼했어요. 지키고 바꾸기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변치 않는 브랜드의 정체성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저희 젤라또는 인공 응고제 대신 바닷물로 간수를 한 초당 전통 순두부 제조법을 고수해요. 덕분에 질감이 무척 부드럽고 고소하죠. 그런데 저희 부모님께서는 전통은 이으시되 옛 방식을 고집하진 않으세요. 저 역시 전통을 지키면서도 부모님의 순두부 식당에 얹혀가는 사업체가 아닌, 저만의 방식으로 디저트 브랜드를 개발했고요. 처음 순두부로 젤라또를 만들겠다고 했을 땐 순두부와 아이스크림의 생소한 조합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던 사람도 많았어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로 저희 두부가 건강한 디저트로 탄생했듯, 100년이 지나도 오리지널 메뉴를 지키는 가게로 남고 싶어요.
Q. 가업을 잇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주중에는지역 단골이 많이 찾아오세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출근 도장을 찍는 어르신, 퇴근길에 들르는 아이 아빠 등 다양한 분들이 저희 젤라또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 순두부젤라또를 개발한 게 제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일로 느껴지곤 합니다. 오래된 가업을 잇는다는 건 한 지역의 일부가 되고, 그 지역 사람들에게 상징적이고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명맥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역 사람들뿐 아니라 타 지역 사람들, 나아가 국외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며 숙제를 풀어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