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낡다’는 말로는 부족한 폐가를 하나하나 뜯어고치고 자기 취향대로 꾸미는 과정을 몇 개월 동안 지켜봤어요. 지금 어디까지 완성됐나요? 마당만 좀 정리하면 거의 다 끝나요. 본채는 침실·안방 문을 떼고 만든 안 거실, 멍 때리며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는 밖 거실, 목욕탕처럼 조적 욕조를 짜 맞춘 욕실과 화장실, 부엌, 서재로 꾸몄어요. 독채로 난 별채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공간으로 쓰려고요.
흙벽에 벌레, 비 오면 물에 잠기는 마당이며… 진짜 만만치 않던데요. 이런 사람은 시골살이 다시 생각해봐라, 하는 점이 있다면요? 부지런함과 상극이라면 ‘비추’예요. 집에서 엄마가 방 안 치우면 잔소리하며 막 치워주시잖아요. 여긴 옆집 어르신들이 그래요. 마을이 한가족 같은 분위기라서요. 그래서 계절에 따라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해야 할 일이 많아요. 내 땅이니까 내 맘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땅을 그냥 놀리면 안 되는 분위기가 있거든요. 하하. 루콜라, 비트, 콜라비, 알타리무, 고수, 부추, 상추, 갓, 시금치 등을 심었어요. 좀 바쁘긴 하지만 그 분주함 속에 여유가 있더라고요.
농부이자 PD로서 보내는 일과가 궁금해요. 새벽 6시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효리(반려견)랑 마당 한 바퀴를 돈 뒤 그냥 앉아서 텃밭의 작물이 자라는 걸 멍하니 봐요. 시골살이를 하고 있지만 회사에 소속된 직장인이기 때문에 아침 9시부턴 일을 시작해요. 거의 매주 평일엔 촬영을 하는데 마을 어르신들의 일정이 날씨, 계절에 따라 매일 달라지기 때문에 그걸 따라가느라 계획은 따로 못 세워요. 편집하는 날이 아니면 오후 6시엔 퇴근을 해요. 저녁 시간은 대부분 여유롭고 졸려요.
동네 친구들이 주는 기쁨, 위로가 되게 큰 것 같아요. 어느 날엔가 ‘나 사랑받고 싶어서 여기에 왔나봐’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옆집 아버님, 이 여사님, 이 여사님네 아버님, 죽산반점 어머님과 아버님… 마을분들이 다 엄마처럼 살뜰히 챙겨주세요. 한번은 제가 1박 2일 동안 서울에 가면서 효리를 이 여사님께 부탁드리고 올라갔는데, 강아지가 없어진 줄 알고 온 동네가 뒤집혔대요. 하하. 쉬고 싶어 온 건 줄 알았는데 사랑받고, 돌봄받고, 관심받고 싶어 온 것 같아요.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장면은 뭐예요? 바깥 거실에 앉아서 보는 창밖 풍경. 가만히 멈춰 있어요. 그런데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이 멈춘 건 아니라는 걸 알려줘요. 그걸 보고 있으면 어떨 땐 눈물이 나고 어느 날엔 웃게 돼요. 서울에선 감성이 너무 메말라서 서러웠는데, 여기선 이런 마음이 든다는 게 기뻐요.
바뀐 것도 있나요? 지금은 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게 돼 좋아요. 사실 여기 오기 전에 심리 상담을 받고 있었어요. 고1 때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그게 큰 트라우마로
남아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나를 찾고 싶어 온 거예요. 서울에선 일로 자꾸 도망치는 게 습관이 돼 쉽지 않더라고요. 이곳에 내려와서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요. 몇 달째 상담 없이도 잘 지내고 있어요.
‘집’의 의미도 달라졌겠어요. 예전에도 집이 각별하긴 했지만, 이 집은 그냥 나예요. 오랫동안 버려진 집을 만나 고치고 다듬고 꾸미는 과정을 기록하면서 하나하나 살펴보니 자존감이 높아지는 기분이에요. 사실 집 자체의 본질은 참 좋거든요. 위치도, 채광도, 땅도. 그래서 뭘 과하게 더하지 않고 원래 있었던 걸 살리려 노력했고,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살면서 하나씩 바꿔나가려 해요. 그게 참 좋아요. 이 집에 하는 말이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