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되는 날 찾는다는 베타 차단제, 정확히 뭔데?
분홍색 알약 하나가 바쁘고 정신없는 삶의 만능 해결책처럼 떠올랐다. 불안을 잠재우고 자신감을 북돋워주는 베타 차단제, 그게 정확히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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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자 물이 끓기도 전에 약을 주문해버렸다. 주전자를 올리고 노트북을 켠 뒤 온라인 상담 양식을 작성했다. 솔직히 말하면 답변에 약간의 허구를 섞었다. 잠시 후 도착한 메일에는 프로프라놀롤 10mg 28정이 35파운드(한화 약 6만원)에 배송될 예정이라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틀 뒤 약이 도착했다. 프로프라놀롤은 베타 차단제의 일종으로 최근 셀러브리티부터 친구와 직장 동료, 틱톡 크리에이터까지 많은 사람이 이 약을 불안한 삶을 버티는 간편한 해결책처럼 이야기한다. 처방약이 어떻게 하나의 ‘트렌드’가 된 걸까?
2026년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 카펫에서 배우 레이철 세넛은 한 기자가 “이렇게 큰 행사에 참석할 때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무슨 말을 하나요?”라고 묻자 잠시 뜸을 들인 뒤 “베타 차단제 먹어, 얘야. 꿀꺽 삼키고 정신 바짝 차려”라고 답했다. 이어 기자가 “이제 ‘무감각함’이 대세네요”라고 받아쳤다. 세넛만이 아니다. 케이티 페리, 클로이 카다시안, 샤론 호건 등도 불안 증상 때문에 베타 차단제를 복용한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2024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베타 차단제를 먹었으니, 이건 ‘식은 죽 먹기’겠네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소셜 미디어에는 특정 상황에 어떤 약을 먹으면 좋은지 공유하는 콘텐츠가 넘쳐난다. 핀란드의 틱톡 분석 플랫폼 엑솔리트에 따르면 #betablockers의 누적 조회 수는 5500만 회를 넘어섰고, 2026년 6월을 앞둔 두 달 동안 관련 영상은 142% 증가했다. #propranolol 역시 1820만 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베타 차단제, 그게 뭔데? 베타 차단제는 아드레날린의 작용을 억제해 심박수를 낮추는 약이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1956년, 갑상선 질환 환자의 높아진 심박수를 치료하기 위해 프로프라놀롤을 연구하던 과정에서 불안으로 인한 심박수 증가, 손 떨림, 발한 같은 신체적 증상을 완화하는 효과가 알려지면서 불안과 관련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타 차단제가 불안이라는 감정 자체의 원인을 치료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의료 지침을 담당하는 국립보건임상연구원(NICE) 역시 불안 장애 치료 목적으로 베타 차단제를 권고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약은 점점 더 불안을 다루는 수단으로 소비되고, 환자가 직접 처방을 요청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만병통치약? 1994년 작가 엘리자베스 워첼은 회고록 <Prozac Nation>에서 정신 질환과 약물 치료를 둘러싼 세대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울증을 앓는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풀어낸 이 책은 정신 건강에 대한 논의를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미국 의료계의 과도한 처방 관행을 비판했다. 약 30년이 지난 지금, 정신 건강 치료는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오히려 ‘힘들면 약을 먹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해 과거보다 훨씬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된 것은 분명 긍정적인 변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약을 복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라이프스타일처럼 소비되기도 한다. 특히 전문적인 진단이나 상담 없이 온라인에서 약을 쉽게 구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약이 있으면, 불안할 게 없어요.” 브리스톨 대학교 의과대학 연구원 샬럿 아처 박사는 불안 장애에 베타 차단제를 사용하는 현상을 살펴보기 위해 17명의 가정의학과 의사를 인터뷰했다. 의사들은 대체로 베타 차단제를 위험성과 중독성이 낮은 약으로 인식했고, 환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복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환자 주도형’ 약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환자들이 베타 차단제를 비교적 편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항우울제나 항불안제처럼 ‘정신 건강 약물’이라는 인식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근거를 살펴보면 베타 차단제가 특정 상황에서 긴장이나 불안으로 인한 신체적 증상을 줄이는 데는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불안의 근본 원인을 해결한다는 증거는 부족하다고 아처 박사는 설명한다. 부작용도 있다. 피로감과 어지러움, 메스꺼움, 수면 장애 등이 나타날 수 있다. 무엇보다 문제는 약 자체보다 약에 의존해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는 태도다.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장 빠른 답은 약일 수 있다. 하지만 빠르게 증상을 잠재우는 것과 그 감정을 다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상처 위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만으로 상처의 원인이 사라지지는 않는 것처럼.
무감각해지기 위한 노력 “네, 솔직히 말하면 그냥 먹어요.” 트랜스젠더 뮤지션 수는 자신의 친구들도 대부분 베타 차단제를 복용한다고 말했다. 공연이 매진되기 시작하면서 프로프라놀롤을 더 습관적으로 복용하기 시작한 그는 약을 먹으면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통제하고 있는 상태”가 된다고 설명했다. 공연이 아니더라도 긴장되는 일이 있으면 한 알씩 먹었는데, 올해 1월 복용을 중단했다. 숨이 가빠져 그제야 프로프라놀롤을 검색해보니 천식 환자에게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여전히 약을 복용한다. “그게 결국 지금의 기본값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그냥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트렌드가 된 ‘무심한 태도’ 영국에서는 최근 ‘numb girl’, ‘lobotomy chic’ 같은 표현이 등장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듯 멍한 상태를 오히려 하나의 스타일로 소비하는 문화다. 베타 차단제는 바로 그 미학을 그대로 구현한다. 실제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게 해주기 때문이다. 레이철 세넛부터 찰리 XCX, 조 크라비츠까지 냉소와 무심함을 ‘쿨함’으로 포장하고 감정의 흔적을 지우는 태도가 하나의 갑옷처럼 기능한다. 이를 두고 일종의 ‘해리적(dissociative)’ 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 세기 동안 여성은 감정적이고 히스테릭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제 여성들은 자신의 공적인 모습에서 감정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있는 것이다. < Prozac Nation>에서 워첼은 정신 건강 약물 처방이 늘어나는 현상을 돌아보며 의사들이 약을 너무 쉽게 처방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약물을 제공하는 것이 합리적인 대응인지 되묻는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 역시 비슷할 것이다. “많은 약이 그렇듯, 이건 빠른 해결책입니다. 한두 시간 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해결책이죠.” 런던 대학교 명예 약학 교수이자 <How To Take Drugs>의 저자 닉 바버 박사의 말이다. 문제는 약을 먹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치료를 받는 것도, 증상을 완화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다만 불안을 없애는 것과 불안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두려움은 결국 마주해야 한다. 불안을 견디고 관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 역시 마찬가지. 젊은 여성들을 짓누르는 압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지고, 많은 사람이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지쳐 있다. 하지만 불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겨우 하루를 버티기 위해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이 당연해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문제는 우리가 하루를 견디기 위해 약에 의존하는 이 상황을 계속 방치할 것인지, 아니면 무감각함이 일상이 되기 전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것인지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겠다. “우리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까?”
Credit
- 에디터 이유진
- 글 Harriet Hall(<코스모폴리탄 UK> 에디터)
- 일러스트레이션 Elina Arbidane
- 아트 디자이너 김진림
- 디지털 디자이너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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