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우리가 되새기고 싶은 아름다운 한글 구절
오직 한글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 지금 우리가 말하고 싶은 한글의 구절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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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빛 어느 바람이 이렇게 영원할 수 있나요” - 송창식 ‘사랑이야’ 中
자연을 뜻하는 단어에는 된소리나 이중모음이 드물다. 무엇이든 밀도가 낮고 너그럽기 때문일까? 한글로 된 단어를 입안에 넣고 굴려보는 일을 좋아한다. ‘바람’이란 단어를 입에 넣으면 입안에도 바람이 부는 것 같다. ‘빛’이란 단어를 넣으면 내리쬐는 광선이 혀에 닿는 듯하다. 송창식은 자연보다도 사랑이 영원하다고 썼다. 사랑이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을 깔보는 시절에 송창식의 노래를 듣는 것이 아주 순수한 반혁 같아서 우쭐해진다. 게다가 이렇게 쉬운 단어들만 가지고 사랑을 완성하다니! 갓 한글을 배운 어린아이도 그냥 지나치지 못할 구절이다. 카피라이터 오지윤
“우리는 어둠을 이마로 밀어내며 걷는다” - 시집 <야생의 눈과 눈 안쪽의 야생> 中
이 문장은 시집 <야생의 눈과 눈 안쪽의 야생>에 수록한 시의 한 구절을 2024년 겨울,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피켓 문구로 고쳐 쓴 것이다. 이 문장이 적힌 피켓을 들고 시민들 사이에서 표결 결과를 지켜보았다. 언어는 변화와 저항, 선한 의지와 불안전함, 삶의 연약함을 통과하고 감싸는 무른 물질이다. 문장 역시 그 물질이 특정한 시간과 표면 위에서 일시적으로 이룬 형상일 것이다. 시를 쓰다 보면 언어가 제 의지로 깡충깡충 달려나가는 듯한 순간이 있다. 그 움직임은 아마 언어가 맺히는 표면이거나 그것을 둘러싼 공기와 중력인 삶의 운동성, 그 신비와 아름다움에서 비롯될 것이다. 어둠을 이마로 밀어내며 계속 걸으려는 우리를 포함해. 시인 김리윤
“결국 나는 당황했고, 상처를 받았고, 바보같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든 걸 견디기에 나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인간이었다. - 김사과 <풀이 눕는다> 中
자신을 인정해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집단에게마저 괴리를 느낀 화자가 당시에 자리를 떠나며 읊조린 독백이다. 가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 세상이 아름답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될 때가 있지 않나. 누가 더 낭만적이고, 누가 덜 낭만적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순간을 한 번 겪고 나면 마음이 조금씩 꺾이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견딘다’는 우리말이 좋았다. 도망치지 않고 끝내 이겨내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 이 구절이 마음속 깊이 남은 이유도 그렇다. 마음이 꺾일지라도 언제까지나 모든 걸 견디고 이상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작사가 이앵두
“사박사박”
소복이 눈 내린 길을 걸을 때면 사박사박하는 소리가 난다. ‘서걱서걱’보다 부드럽고 ‘뽀득뽀득’보다 가벼운 소리. 첫눈 오는 날의 걸음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 유희경 시인은 산문집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에 이렇게 적었다. “손으로 받아낸 조용한 눈송이 몇 개를 쥐고 주머니 속에 넣으면 당신이 올 것 같았다. 당신을 위한 첫눈. 그 최초의 기억. (중략) 사박사박 당신이 오는 소리가 들렸고 그렇게 듣고 싶었던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어떤 단어는 어떤 풍경을 금세 그러쥔다. 발음하는 것만으로 눈앞에 겨울을 펼쳐놓는다. 사박사박. 사박사박이라는 글자 위를 걸으며 어떤 밤의 낱말들을 지나다 보면, 가을이 가고 겨울이 곧 함께 올 것만 같다. 아침달 편집자 임수아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죽을 만큼 뛰다가는 아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보고 지나치겠네 - 장기하와 얼굴들 ‘느리게 걷자’ 中
어린 시절 가요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노래 가사에 이끌려서인지도 모르겠다. 산울림, 김수철, 김광석, 유재하 등 시처럼 아름다운 가사들에 나도 모르게 귀 기울이며 음미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들려온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는 직설적이고 독특했다. ‘느리게 걷자’는 ‘죽을 만큼 뛰는’ 우리와 ‘사뿐히 지나가는’ 고양이를 대비하며,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걸어가라고, 그게 진짜 사는 것이라 말해주고 있었다. 가사든 일상이든 외래어가 난무하는 요즘, 더 귀하게 느껴지는 장기하의 행보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을유문화사 편집장 김경민
Credit
- 에디터 천일홍
- 타이포그래피 RIOTYPE(김리윤·김경민)·SUI(임수아·오지윤)·추지원(이앵두)
- 아트 디자이너 장석영
- 디지털 디자이너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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