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엄마에게 물려 받은 시계, 가방, 웨딩드레스. 엄마의 물건들

물질적인 것과 사랑의 감정이 교집합처럼 만난 물건들. 엄마로부터 시작된 위대한 유산

프로필 by 김소연 2025.05.24

Timeless Touch

오랜 시간 곁에 머물며 나만의 이야기를 쌓아가는 스타일을 지향한다. 계절이 바뀌고 트렌드가 달라져도 여전히 손이 가는, 시간이 흘러도 빛을 잃지 않는 그런 패션 말이다. 이런 내 스타일 철학에 가장 큰 영감을 준 아이템이 있다. 바로 엄마에게 물려받은 까르띠에 머스트 방돔 워치와 트리니티 링이다. 패션 에디터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 엄마는 이 2가지를 입사 선물로 건넸다. 그날 이후, 나는 두 아이템과 수많은 계절을 함께 보냈다. 시계의 가죽 스트랩은 두 번이나 교체할 정도로 자주 착용했고, 트리니티 링은 폴리싱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스크래치들이 생겼지만, 이미 그 자체로 손에 익어버렸다. 오히려 그 작은 흔적들이 더 깊은 애정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타임리스 디자인과 엄마의 시간이 겹쳐질 때, 단순한 액세서리를 넘어선 의미가 탄생한다. 시계를 볼 때마다, 손끝에서 반지가 반짝일 때마다 문득 엄마가 떠오른다. 그 기억은 늘 따뜻하고, 어떤 옷보다도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김주연(<코스모폴리탄> 편집장)


쓰임을 다할 때 살아 있는 물건들

오랫동안 고미술품을 수집하신 어머니가 대학 졸업 선물로 내게 주신 골동품들이다. 왼쪽은 조선시대 분청사기 다완이고, 오른쪽은 색감이 아름다운 분채자기 필통이다. 세월의 흔적이 아름답게 스며들어 더욱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다. 어머니는 늘 “골동품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쓰임을 다할 때 진정으로 그 물건이 살아 있다”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 가르침대로 차(茶)를 업으로 하는 나는 이 물건을 곁에 두고 부지런히 사용 중이다. 덕분에 다완에는 차의 색감이 아름답게 배어 있고, 필통에는 자주 쓰는 기물들이 꽂혀 있다. 이 물건이 언제나 쓰임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내 미래의 자녀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게 작은 소망이다. 주은재(다실 ‘월하보이’ 대표)



나와 맞바꾼 엄마의 젊은 날

1986년 가을쯤 맞춘 엄마의 웨딩드레스다. 몇 차례 이사를 다니고 집안에 희로애락이 스칠 때도 옷장 깊숙한 곳에서 나올 일이 없던 낡은 옷이다. 사실 물려준 적도, 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 유행은 한참 지났고, 취향도 아닐뿐더러 결혼도 요원한 내겐 그저 오래된 가구처럼 그곳에 존재했을 뿐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양금명’ 결혼 신을 보다가 비슷한 이 드레스를 떠올렸다. 심드렁한 건 나뿐만 아니었다. 기사를 위해 오랜만에 드레스를 꺼내던 엄마 역시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며 “이걸 어디다 쓰냐. 다시 갖고 오지 마라”라고 말했으니까. 그제야 40년은 된 이 드레스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당연한 존재, 이 드레스는 엄마였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더 어리고 예뻤을 그때 오빠와 나를 낳아 키우며 맞바꾼 엄마의 20대, 기억이 바래 본인조차 묻어둔 그의 청춘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젠 내가 엄마를, 이 드레스를 어여삐 여길 때란 걸. 그래서 아무도 주지 않고 내가 보듬고 기억할 거다. 그리고 때론 엄마의 청춘을 다시 꺼내 보여줄 거다. 서지현(<코스모폴리탄> 패션 디렉터)


My Muse, My Mom

어릴 적 엄마가 자주 메던 아이코닉 샤넬 백이다. 10년 전 처음 빌려 샤넬 행사에 갔다가 오염시켜 큰 고민에 빠졌지만, 엄마는 “그냥 물건일 뿐”이라며 너그럽게 받아주셨다. 그 경험을 통해 관계와 감정처럼 물건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중요함을 더 크게 느끼게 됐다.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결국 물건일 뿐이고, 넓은 마음으로 나누면서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된 순간이랄까? 이 가방은 내게 엄마의 사랑과 철학이 담긴 유산이다. 언젠가 딸이 생긴다면 그 기억까지 함께 물려주고 싶다. 한지나(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지나 에리카’ 대표)


엄마의 엄마로부터

외할머니에게서 엄마로, 엄마에게서 내게로 온 칵테일 링들이다. 뉴욕 다이아몬드 디스트릭트에서 일했던 진취적인 여성인 할머니의 취향이 돋보인다(칵테일 링은 1920년대, 여성의 사회 진출을 상징하는 재즈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그중 오팔 반지는 3개의 링에서 스톤만 빼내 원하는 디자인으로 리세팅했다. 당시 마음이 힘들 때였는데 ‘행복’이란 의미를 가진 오팔에 마음을 기댔던 것 같다. 언제 어디에서 샀는지 눈을 반짝이며 말씀해주시는 아흔이 넘은 할머니가 소녀 같아 보였다. 박현정(프리랜스 마케터)


Worn with Love

가벼우면서도 따뜻한 코트를 찾던 중, 엄마가 빌려준 이후로 자연스레 내 것이 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코트와 스퀘어 토 부츠. 모두 군더더기 없이 클래식한 디자인이라 앞으로도 20년은 거뜬하다. 특히 스퀘어 토 부츠는 나의 애착 신발. 엄마는 뭐든 새것처럼 관리하는 신의 손을 가진 걸까? 내가 5살 때 구매했다는 사실이 가끔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데 편하기까지, 아직도 이만한 부츠를 못 만났다. 조성원(브랜드 ‘델보’ 시니어 마케팅&커뮤니케이션 매니저)


차와 예술을 향유하는 시간

어머니가 주신 건 단순히 미술 작품과 다기가 아니다. 작품을 감상하는 ‘시각’과 차를 마시며 여유를 가지라는 ‘삶의 태도’다. 엄마가 20대 때부터 수십 년에 걸쳐 한 점 한 점 모은 다기들은 저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시간과 가치를 품고 있다. 그래서 새로 산 다기보다도 물려주신 이 다기 세트에 손이 더 자주 간다. 나는 매일 아침 이 다기에 차를 우려 마시며 스스로에게 쉼을 선물한다. 벽에 걸린 이 작품은 신현경 작가의 ‘변명하지 않는 혀’. 오직 색연필 하나로 긴 시간 동안 여러 겹으로 그려 완성한 작품이다. 볼수록 오묘하고 심도 깊은 질감이 특징이다. 어머니는 이 작품이 가진 흡입력과 무엇보다 작품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며 내게 선물해주셨다. 인생을 살아가며 힘든 순간을 마주하면, 변명 대신 이 그림을 들여다보라는 메시지와 함께. 최유진(복합문화공간 ‘플레이스 씨’ 대표)

Credit

  • Editor 김소연
  • Photographer 이호현/곽동욱
  • 아트 디자이너 장석영
  • 디지털 디자이너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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