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패션계는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였다. 돌고 도는 패션계의 흐름 속에서 화려하게 귀환해 다시금 전성기를 맞이한 Y2K 스타일은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이들에게는 즐거운 볼거리를, 그 시대에 태어난 젠지들에게는 색다른 스타일링의 재미를 선사하는 메가트렌드로 우리 일상에 깊숙이 침투했었으니까. 덕분에 배를 과감하게 드러낸 크롭 톱과 미니스커트, 레그 워머와 두툼한 통굽 슈즈, 복고적이고 화려한 분위기의 액세서리와 헤어&메이크업이 런웨이는 물론 거리를 수놓으며 침체된 패션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문제는 한 편의 쇼처럼 현란한 트렌드 속에서 에디터를 비롯한 많은 이들, 즉 30대 이상 연령층이거나 간결하고 실용적인 옷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마치 ‘강 건너 불구경’처럼 생경한 이야기로 느껴졌다는 것. 과묵하게 늘 나의 곁을 지켜줄 든든한 친구 같은 패션이 절실히 그리워질 때쯤, 마침 Y2K 패션의 뒤를 이은 새로운 트렌드가 도래했으니 바로 간결하고 우아한 올드머니 스타일이다. 두 눈을 현혹하는 대범하고 호화로운 디자인에 피로감을 느낀 이들을 필두로 오랫동안 입어도 질리지 않을 고급스러운 디자인과 소재를 내세운 고요한 미니멀 룩이 ‘역주행’하며 강세로 떠오른 것. 캐럴린 베셋 케네디의 클래식하고 심플한 룩, 케이트 미들턴 왕세자비와 아말 클루니의 상류층 스타일이 다시 회자되며 새 시즌 런웨이에 대거 등장했고, Y2K 트렌드에 푹 빠져 있던 젊은 층 역시 점점 우아한 미니멀 스타일로 눈길을 돌리게 됐다. 이처럼 올드머니 스타일이 다시 고개를 들자, 디자이너들은 가장 먼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블랙 컬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2000년대 초반의 자유분방함과 퇴폐미에 매료됐던 디자이너들이 약속이나 한 듯 완전무결한 블랙 컬러, 특히 블랙 컬러의 코트를 대거 선보이며 미니멀리즘으로의 회귀를 외쳤다.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인 블랙 코트를 말이다! 과감한 실루엣과 볼거리로 압도적인 패션 판타지를 전하는 발렌시아가도 오버사이즈 블랙 코트 시리즈를 선보였고 유려한 허리 라인을 추가한 알렉산더 맥퀸과 돌체앤가바나, 스텔라 맥카트니의 블랙 코트는 시즌과 트렌드에 구애받지 않는 클래식한 멋을 자랑한다. 올드머니 스타일을 선도하는 대표 주자 더 로우와 케이트, 빅토리아 베컴 역시 간결한 블랙 코트를 무심하게 걸친 모델들로 ‘Y2K 스타일의 종말’을 당당히 선언했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 화려하게 컴백해 ‘피비 효과’를 제대로 입증한 디자이너 피비 필로의 브랜드에서도 블랙 코트가 뚜렷한 존재감을 발했다. 오랫동안 그녀의 귀환을 기다려온 골수팬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낸 피비 필로 컬렉션은 피비만의 탁월한 미감이 돋보인 아이템이 가득했는데, 그 사이에서 유려한 실루엣의 검은색 코트는 홀로 표표히 빛나는 듯했으니까. 그야말로 블랙 코트의 재발견이라 할 만한, 할머니가 돼서도 즐길 수 있을 듯한 고급스럽고 클래식한 피비의 블랙 코트는 만듦새가 훌륭한 옷을 고르는 즐거움을 아주 오랜만에 일깨웠다. 이처럼 수많은 디자이너의 러브콜을 받으며 메인 무대로의 안정적인 컴백을 알린 블랙 코트는 기본적이고 단정한 디자인이라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에센셜 아이템이지만 각자의 스타일과 체형에 따라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기에 의외로 세심하게 고를 필요가 있다. 실패 확률이 적은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블랙 코트는 1990년대 미니멀 룩의 상징이었던 패션 아이콘 캐럴린 베셋 케네디의 옷차림을 참고해보길. 수수한 헤어&메이크업과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액세서리를 즐겼던 캐럴린 베셋 케네디는 무릎길이와 일자 실루엣이 특징인 단정한 블랙 코트를 자주 입었는데, 캐주얼한 데님부터 힘을 준 미니스커트와 부츠 룩까지 이질감 없이 잘 어울리며 에센셜 코트 룩의 모범이 된다. 좀 더 젊고 ‘힙’한 모습으로 블랙 코트를 연출하고 싶다면 헤일리 비버와 켄달 제너 벨라 하디드의 룩을 눈여겨봐야 한다. 발렌시아가 컬렉션에 등장한 룩처럼 과장된 오버사이즈 코트와 매끈한 가죽 소재 등 동시대적으로 변모한 블랙 코트는 같은 블랙 컬러라도 천차만별의 매력을 선사한다. 게다가 블랙 코트는 그 어떤 아이템도 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지닌 전천후 피스니까. 회전문처럼 돌고 도는 패션 트렌드의 특수성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자면 자연의 섭리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지난 팬데믹 기간에는 편리함을 우선시했던 원마일 웨어가, 본격적인 엔데믹이 시작되자 억눌렸던 욕구가 분출하듯 개성 넘치고 화려한 Y2K 스타일이 오랫동안 메인 트렌드로 자리했다. 시끌벅적한 유행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이제 고요한 미니멀 스타일이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블랙 코트가 조용히 속삭이며 우리를 구원하는 듯하다. 더 이상 헤맬 필요 없다고, 이 코트와 함께 비로소 완전무결한 ‘광명’을 찾을 수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