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는 도도하면 안 되나요? || 코스모폴리탄코리아 (COSMOPOLITA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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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는 도도하면 안 되나요?

“비건은 한 뭉텅이의 초록색으로 인식돼 있어요.” ‘천년식향’의 안백린 셰프는 지금 한국의 비거니즘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녀는 비거니즘을 넘어 식물성 요리의 다채로운 세계에 집중하고 싶다.

COSMOPOLITAN BY COSMOPOLITAN 2022.04.16
 
순식물성 요리를 선보이는 다이닝 ‘천년식향’을 3년째 운영 중이죠. 그간 방송 출연 및 인터뷰도 여러 차례 했고요. “말보다 요리로 설명하고 싶다”는 셰프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려니 좀 멋쩍더라고요.
해외에서는 뉴욕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일레븐 매디슨 파크’가 작년 여름 비건으로 전환을 선언했을 정도로 비거니즘이 화두예요. 유학하는 동안 저는 너무 자연스럽게 접했던 문화인데 한국에선 아직 낯설다 보니 최대한 많이 알리고 싶어요. 우리나라 정서상 어려웠던 점도 물론 있죠. 그런데 인터뷰를 하면 보통 ‘비건도 맛있을 수 있다’, ‘비건이 멋있다’ 같은 앵글만 원하시더라고요.
 
2018년 해방촌에 ‘소식’이라는 사찰 식당을 열었다가 운영난으로 문을 닫고 2020년에 천년식향을 다시 열었어요.
소식에서는 ‘속세의 사찰 음식’을 표방했는데,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사찰 음식’의 틀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죠. 천년식향은 ‘천년 동안 이어가고 싶은 요리의 방향’이라는 뜻이에요. 자연이랑 연결된 요리를 하고 싶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 우드 톤, 베이지예요. 매장의 가구와 데커레이션으로 쓰는 나뭇가지도 모두 직접 골랐어요.
 
방문하는 손님의 90% 이상이 비채식인이라고요.
애초에 논비건을 타깃으로 만든 공간이에요. 논비건들이 한 끼라도 더 채식을 해봤으면 해서요. 그래서 저희는 ‘비건’이나 ‘파인 다이닝’이라는 수식어를 지양해요. 음식 플레이팅에 엄청난 공을 들이지만, 고기가 들어가지 않으니 그만큼 인정을 받지 못하거든요. 사람들은 ‘자연’에 가까워질수록 음식 가격이 저렴해진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반대예요. 공장식 축산으로 얻은 고기가 오히려 가격이 더 저렴하죠. 그러다 보니 요리 하나에 3만원대인 천년식향 가격을 이해 못 해요. 가격대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좀 더 클래식한 다이닝을 찾기 마련이고요. 가격이 높아지면 그만큼 좋은 서비스를 기대하게 되는데, 천년식향의 음식 가격이 높은 이유는 재료와 인건비 때문이거든요. 이곳에서 쿠킹 클래스도 진행해봤지만, 많은 분이 “차라리 사 먹겠습니다”라며 포기하고 돌아가세요.
 
오늘 촬영한 요리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다면요?
피자 같은 경우 유기농 밀가루에 흑마늘을 넣어 도우를 직접 만들고, 캐슈너트를 불려 만든 크림소스, 3일 동안 불린 아몬드 껍질을 까서 만든 리코타 치즈에 허브 청이 들어가요. 초당 옥수수를 토치해서 올리고, 비건 베이컨을 로스팅해 뿌리고, 완두순과 완두콩 칩에, 참나물 줄기를 버리지 않고 피클로 내죠. ‘피자 소금’이라는 소금 레시피도 따로 있어요. 다른 셰프들이 와서 먹어보더니 ‘피자’라고 하지 말라더군요. 이건 그냥 요리라고.
 
비건 식당에서는 메뉴 이름 짓는 것도 고민이 많을 것 같아요.
치즈케이크를 치즈케이크라 하면 “왜 비건인데 육식을 따라 하느냐”고 비난받고, 치즈라고 얘기하지 않으면 “뭔지 모르겠으니 설명해달라”고 하죠. 그렇지만 저희가 “칡 전분을 3시간 동안 졸여서”부터 설명할 순 없잖아요.
 
처음 비거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영국 유학 때였다고요.
영국에서 학사 때 의료생물학을 배웠고, ‘영성, 신학, 건강’으로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환경, 비거니즘, 음식과 사람의 연결 고리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한국에 와서 처음엔 강의를 많이 다녔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요리를 시작한 거예요. 미국에서 요리의 세계에 눈뜨면서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도 공부했고요. 잠시 한국으로 들어왔다가 우연한 기회에 팝업 레스토랑을 열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 눌러앉은 거죠.

 
프랑스 셰프 도미니크 크렌을 무척 좋아한다고 알고 있어요. 그녀의 플레이팅도 마치 한 폭의 자연 풍경 같죠. 천년식향이 선보이는 독특한 플레이팅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모든 요리를 산 같은 자연 속에서 볼 수 있는 모양으로 풀어내려 해요. 정형적인 스타일보다 흩뿌려져 있는 형태가 제겐 더 와닿아요. 또 음식에 높이감을 주기 위해 여러가지 요소를 꽂아요. 자연 상태에서도 식물들이 아래에서 위로 자라잖아요. 플레이팅에서 생명력이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음식과 인간이 단절돼 있는 게 안타까워서 비거니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니까요.
 
사람이 음식과 단절됐다는 게 어떤 의미예요?
그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사람들이 만들었는지 모르고 먹는다는 거죠. 농부부터 셰프까지, 농장에서 식탁까지요. 우리가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을 먹는 거잖아요. 그 생명을 죽임으로써 우리는 하루를 더 살 수 있는 거죠. 너무 슬프지만 감사한 일이기도 해요. 그래서 요리에서 잘 안 쓰는 참나물 줄기도 피클로 재활용하고, 조리하고 남은 당근 껍질은 퓌레로, 아몬드 껍질은 디저트에 재사용하는 거예요.
 
인스타그램에서 ‘유다이모닉 해피니스(Eudaimonic Happiness)’라는 개념을 언급한 적 있는데, 방금 말한 내용과 연관되는 것 같네요.
유다이모닉 해피니스란 가치 있는 선택을 하거나 남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 삶의 이유를 깨닫는 의미로서의 행복이에요. 잠시 머무르는 쾌락이 아니라 오래가는 행복을 뜻하죠. 재료를 충분히 이해하고, 재미있고 아름다운 식사를 즐기면 조금 먹어도 배부르다고 느끼거든요. 섹스에 비유하면 단순히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원나이트를 즐기는 게 아니라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교감하며 천천히 관계를 갖는 느낌에 가까워요.
 
메뉴마다 스토리텔링도 열심히 하고 있죠.
식물성 달걀 제품 ‘저스트 에그’와 협업해 코스 요리를 선보였을 때 디저트 메뉴로 산 모양으로 쌓아놓은 아이스크림과 함께 구름을 연상시키는 라이스 페이퍼를 올려드렸어요. 마지막에 허브에 불을 붙여 연기를 내고요. 미니 캠프파이어 같은 느낌을 생각했어요. 산을 떠서 구름에 발라 먹는 거죠. 아까 피자 도우에 흑마늘이 들어간다고 얘기했는데, 흑마늘은 남해 바람을 맞으며 발효해 검정색이 되거든요. 그걸 알고 먹으면 남해 바람을 먹는 기분이잖아요. 보통 요리에 ‘먹’을 쓰면 오징어 먹물만 생각하는데 다양한 재료가 있어요. 채식은 초록이란 인식이 있지만 중후한 오크 톤의 베이지, 브라운도 자연의 색이에요. 채소는 땅에서 자라니까요. 그래서 연어 요리나 샤퀴트리뿐 아니라 채소에도 훈연 향이 잘 어울려요. 제가 토치로 훈연 향을 입히는 요리를 많이 하는 이유죠.
 
깨어 있는 사람만이 투자할 수 있는 가치 소비의 영역이네요. 그런 가치를 누릴 여유가 없는 사람도 많은데요.
제가 돈 얘기하는 게 치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국 자본주의사회에선 돈을 얼마만큼 쓰는지가 자신이 마음을 얼마만큼 쓰는지를 대변한다고 생각해요.
 
이전에 ‘천년식향 델리’를 따로 운영하며 베이커리류를 판매했던 걸로 아는데, 간편식이나 델리를 운영해 수익을 낼 생각은 없나요?
가격을 낮추면서 맛있게 만들려면 콩기름이나 미원을 많이 쓰게 돼요. 간편식을 3만원 주고 먹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델리를 시작했던 건 사실 식재료를 농장에서 배송받을 때 딸려온 포장재를 재사용하기 위해서였어요. 당연히 재사용 포장재임을 명시하고 판매를 시작했죠. 그런데 저희 델리가 가격이 저렴하지 않다 보니 “친환경적이지 않은 포장이다”, “대충 포장한 느낌이다”라는 컴플레인이 들어오더라고요. 겉보기에 깨끗하지 않으니 친환경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음식 맛을 얘기하자면 천년식향의 음식은 달거나 짭조름하고, 자극적이기도 해요.
한번은 사찰 음식 하시는 셰프님이 오셔서 “비건인데 왜 달고 짜냐”고 하시더라고요. 같은 날 방문한 다른 분은 너무 맛있다고 칭찬을 하시고요. 천년식향의 타깃은 논비건인데, 그들의 니즈에 맞추다 보면 비건 손님들에게 불편한 점이 생기고, 그 반대의 일도 자주 일어나요. 저는 궁극적으로 비건과 논비건이 함께  이 식당에 와서 비거니즘을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소식을 운영할 때 실제로 그런 적이 있어요. 채식을 한단 이유로 부모님과 늘 싸우던 손님이 소식에서 함께 식사한 뒤 부모님과 화해했다고요.
 
‘비건인데 얼마나 맛있나 어디 한번 보자’ 하는 마음으로 오는 손님도 많을 것 같아요. 비건 요리는 늘 동물성 식품을 사용한 비슷한 메뉴와 비교되고요. 얼마 전에는 “비건을 표방하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내놓았죠.
사실 채식을 ‘건강한’ 음식 정도로만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채소가 고기보다 더 건강한 건 사실이지만 저는 건강을 테마로 한 요리를 배운 게 아니에요. ‘비건’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식물을 기반으로 셰프 안백린의 철학을 담은 요리를 펼치고 싶은 거죠. “비건 여부를 비밀로 하겠다”라고 말한 건, 비건이지만 비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먹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죠. ‘비건’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얼마 전 스프레이로 페인팅하는 작업을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 스토리에 올린 적 있는데, 갑자기 팔로어가 수십 명이 주는 거예요. ‘비건’에 엄격한 잣대가 있는 거죠. 친구들이 이곳을 소개해준다며 ‘비건 파인 다이닝’이라고 인터넷에 후기를 써요. 그럼 저는 “차라리 생면 파스타 집이라고 해!” 하죠. 오죽하면 모든 음식에 조개가루라도 뿌릴까 생각해봤을 정도예요.(웃음) 모든 천일염에 조금씩 섞여들어가는 성분이라 비건인지 아닌지 모호하거든요.
 
한국에서 비건 식당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 수 있을까요? 천년식향은 얼마나 지속 가능할까요?
우선은 희망적이라 생각해요. 일단 맛에 대한 편견은 타파했다고 보거든요. 앞으로 제가 15년만 버티면 될 거예요.(웃음) 지금 천년식향을 즐겨주시는 20대가 구매 능력이 큰 40대가 되면요. 사실 가격을 절반으로 내리면 손님이 엄청 많아져요. 업장에 적자가 심각하겠지만, 저야 괜찮다고 쳐요. 진짜 ‘현타’ 오는 부분은 직원들이 너무 힘들어한다는 거예요. 제가 비건 요리로 동물권 지킨다면서 직원들 착취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좀 더 많은 사람이 이 생각에 동참해줬으면 좋겠어요. 논비건들이. 특히 중년 남자들이요.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다 의문점이 생겼어요. 비거니즘을 더 많이 소비하는 건 여성인데, 막상 여성 비건 사업가는 별로 없더라고요.
한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여성으로서 그런 용기를 내기 힘든 구조예요. 제가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한국에 사는 여성은 무모해져야만 사업을 할 수 있어요. 유명한 셰프들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문화가 있잖아요. 삼겹살에 소주 먹으면서 모임을 가지는데, 제가 거기에 어떻게 낄 수 있겠어요?
 
공감합니다. 전쟁터 같은 식당에서 벗어나 개인 시간이 생길 땐 뭘 하나요? 천년식향의 도자기도 직접 만든 걸로 알아요.
제가 도예를 어느 정도로 좋아하냐면, 집에 물레가 있어요. 도예나 뭔가 칠하는 걸 좋아해요. 얼마 전에도 폐차 직전의 차를 직접 페인트칠해서 타고 있어요. 폐차가 될 차를 저렴한 비용으로 직접 칠해 재사용하는 이 과정이 제게는 마음을 다듬는 명상 같은 거예요. 요즘은 다른 와인 바에 방문해 시장조사도 많이 해요. 이 식당은 어떻게 인정받을 수 있었는지 탐구하는 거죠. 어쩔 수 없이 동물성 식품을 먹으며 맛 분석도 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소화가 안 돼서 약을 엄청 먹어요.
 
천년식향은 끊임없이 제철 식재료를 재해석하는 공간이에요. 인터뷰가 나갈 즈음 셰프님이 가장 사랑하는 식재료가 있다면요?
그때쯤이면 산지 직송으로 올라오는 채소와 허브가 엄청 다양해지겠죠. 꽃도 많아져서 플레이팅이 더 아름다워질 거예요. 7월에는 내추럴 와인 7종이 새로 들어오고요. 한번 식사하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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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김예린
    photo by 송시영(점점점점점점/ 위켄드랩/ 천년식향)
    photo by 최남용(오픈플랜 이옥선)/ 각 브랜드(나머지)
    digital designer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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