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더 셔츠 2백50만원 레더 팬츠 2백77만원 모두 오프화이트, 슈즈 8만9천원 컨버스.
고등학생 때 엄마가 많이 아프셨거든요. 당시에 사진도 많이 찍고 일기도 많이 써놨는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꺼내보니 사진이나 글은 생각보다 생생하지가 않았어요. 그러다 아이폰으로 찍었던 영상을 봤는데 엄마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안정되더라고요. 그때부터 제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친구들을 찍은 아카이브가 쌓였어요. 〈DQM(다운큐멘터리)〉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편집한 영상을 한 편씩 올렸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봐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상하는 사람이 됐고요.
다큐멘터리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한 인물의 면모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이에요. 이 작업을 7년 동안 꾸준히 해온 사람이 말하는 ‘인간 기록’의 기쁨은 뭔가요?
다큐멘터리는 시나리오가 따로 없어 촬영 중에 돌발 상황이 많은 게 매력이에요. 돌아다니는 도중에 갑자기 친구를 만나거나 불현듯 차 사고가 나기도 하죠.
그렇게 계획 없이 무작정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날 인물 다큐 촬영하는 친구에게 “너 하고 싶은 거 해” 하는 식이죠. 바다에 가거나 꽃꽂이를 하거나요. 꾸미지 않고 솔직한 걸 좋아해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는 편이에요. 허재혁이라는 친구 편은 친구들과 즐겁게 술 마시는 게 주제였어요. 다들 신이 나서 카메라도 제대로 못 들 정도로 취한 상태에서 서로를 계속 찍고 있었죠. 만취한 채로 노래방에 가고, 노래방에서 나오자마자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막걸리를 파는) ‘홍대 막걸리 아저씨’를 만나 막걸리를 사고, 샹송을 부르는 일의 연속이었는데 유독 재밌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이렇게 일부러 쓰라고 해도 못 쓸 현실 서사를 재밌게 봐주는 것 같아요. 심지어 저는 그날 길에서 잠들었더라고요. 다행히 그건 안 찍혔지만.(웃음)
가끔 예기치 못한 상황을 겪을 때 누가 나 좀 찍어줬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이 있잖아요. 그때마다 옆에 ‘다운큐멘터리’가 있었던 거네요. 요즘은 영화 작업을 한다고요?
영화 촬영감독 일을 시작했어요. 배우로도 활동하는 조현철 감독님의 첫 장편 영화 〈너와 나〉라는 작품이에요. 제게도 촬영감독으로서의 입봉작이죠.
개인 작업을 주로 하던 비디오그래퍼에게 큰 변화네요.
작년에는 〈너와 나〉 촬영하고 후반 작업하는 데 모든 시간을 다 썼어요. 올해는 단편 영화를 준비하고 있고요. 정말 엄청난 배우들이 나와요.
DQM 영상은 카메라 앵글이 자유분방하잖아요. 걸을 때 카메라가 흔들리는 채로도 찍고, 무심하게 창가에 툭 놓고 상황을 포착하는 등 정해진 문법이 없죠. 영화 촬영할 때는 촬영감독으로서 엄격한 촬영 스킬을 지키나요?
자유롭게 찍는 신도 있지만 요즘은 거의 인간 삼각대로 살고 있어요. 촬영 기술이나 카메라의 메커니즘을 본격적으로 배워나가고 있어 정말 재밌어요.
영화 장비가 부피도 크고 무게도 상당하잖아요. 그래서 더 여성 촬영감독이 많이 없나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요즘 오른쪽 몸의 밸런스가 다 깨져 골반이 엄청 올라가 있어요.
본인이 주도적으로 일하다가 타인의 디렉션에 따라 움직이는 게 힘들진 않아요?
오히려 〈너와 나〉를 찍으면서 촬영감독이 더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감독님이 원하는 콘티에 최대한 가깝게 카메라 무빙을 구현하는 것도 성취감이 있더라고요. 상상하던 그림에 가까운 결과물이 완성됐을 때, 스태프들이 멋지다고 할 때 엄청난 기쁨이 느껴지고요. DQM은 어떤 대상을 제 주관대로 바라보고 마음껏 바꿔나가며 찍는 제 중심적 작업인 반면, 영화 촬영은 감독님을 서포트하는 엄청난 재미가 있어요.
그러고 보니 커리어가 ‘별안간’ 이어져왔어요. SNS를 매개로 어쩌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됐고, 촬영감독으로서도 갑자기 영화판에 등장한 셈이죠. 소위 말하는 도제 시스템을 거치지 않은 것에 대한 텃세는 없어요?
텃세는 처음 커리어 시작할 때 많이 겪었죠. 도제를 안 거치면 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인정 안 해주려는 분위기가 있어 어려웠어요. 스튜디오 어시스턴트를 한 사람들은 기존 네트워크 안에서 서로 친분이 있는데, 저는 감독이나 조명팀, 프로덕션을 잘 모르다 보니 초반에는 겉돌기도 했고요.
영상 분야가 남초 환경이기도 하잖아요. 한 인터뷰에서 그런 남성주의적 환경에서 ‘명예 남성화’됐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어요.
촬영장에서 분위기를 잡기 위해 큰소리치거나 험한 말을 하기도 했죠. 기분이 좋을 때도 괜히 뭔가 무게 있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요. 나이 많은 남자 스태프들을 대할 때 괜히 “아~ 행님” 식의 바이브를 해야 남초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었거든요.
새롭게 경험해본 영화계 분위기는 어땠어요?
영화판도 아직 남성주의적이긴 해요. 여성 스태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지만 그들이 제대로 존중받는 환경이 조성됐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조명 감독은 더 없고요. 이제 막 독립 영화 한 편 찍어본 제가 영화계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요. 〈너와 나〉 팀은 이상적일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는데, 그 덕에 영화를 조금 더 해보고 싶어진 것 같아요. 다른 여성 동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분위기는 드물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좋은 환경도 분명 있기 때문에, 인터뷰어로서 “여자라서 힘들었지”라는 답변을 유도하는 건 아닌지 경계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여자라서 힘든 건 확실히 있어요. 옛날부터 자연스럽게 익숙해져서 그냥 넘어가는 것도 많을걸요. 적어도 내가 지금 차별당하고 있다는 건 알아차리고 싶고, 아무리 조그마한 일이라도 제대로 고치고 싶어요. 부당한 상황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넘어갔다가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요.
성차별적인 상황을 마주할 땐 짚고 넘어가는 편이에요?
싹부터 자르는 스타일이에요. 여성 비하와 관련된 구설수가 따르는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훌륭해도 절대 함께 일하지 않아요. 여자 스태프 머리채를 잡는다든지, 여성 스태프도 같이 있는 단톡방에 야한 농담을 한다든지, 무례한 사람이 여전히 많거든요. 여자 스태프들과 얘기하다 보면 이런 경험을 쏟아내듯 얘기하더라고요.
때로는 무례한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정신을 정화해주는 근사한 사람도 많죠. 요즘 눈여겨보는 멋진 사람이 있다면요?
김홍 감독님의 영화를 진짜 좋아해요. 산후우울증을 겪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산후〉라는 단편 영화가 있는데요, 미장센도 아름답고 뭔가 마음을 건드리는 다큐멘터리스러운 지점이 있어요.
궁금한 창작자를 발견하면 SNS 등으로 연락해 협업을 요청하기도 하나요?
저는 생각보다 인간관계의 바운더리가 좁아서요.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편은 아닌데, 최근 가수이자 영화감독인 이랑 씨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얼마 전 이랑 씨 언니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에서 언니 친구들과 함께 춤추고 공연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거든요. 저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치마를 입고 왼쪽에 앉아 있었는데, 그분은 남자가 입는 편한 바지 상복을 입고 오른쪽에 서 계시더라고요. 최근엔 심상정 후보를 지지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던데, 글이 너무 감동적이고 멋져 이 사람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싶었어요.
정다운은 요즘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요?
최근 발견한 건데요, 평생을 ENTP로 살았는데 〈너와 나〉를 찍고 ENFP가 됐어요. 제 생각에는 지금 저한테 가장 영향을 많이 주는 두 인물이 조현철과 김홍이거든요. 냉정하면서도 사랑이 많고 똑똑하고 야무진 사람들이에요. 저도 그들이 가진 오라를 갖추고 싶어 그 사람들을 따라 하기도 해요. 무엇보다도 촬영하느라 1년을 같이 붙어 있다 보니 ‘Feeling’하는 성향으로 바뀐 것 같아요.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들과 함께 변화해나가는 건 큰 기쁨이죠. 나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어떤 점이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요. 사랑이요. 제 영상에 대해 “마음이 따뜻해져요” “아련해요” “사랑이 느껴져요” “뭔지 모르겠지만 자꾸 보게 돼요” 같은 반응이 많거든요. 저도 계속 찍어봐야 알겠지만, 보는 사람이 사랑을 느끼는 영상이 됐음 해요.
여성 친구들과 함께 활동하는 비주얼 아트 크루 ‘다다이즘’, 혁오 등 영향을 주고받는 동료가 많아요. 5년 전 오혁을 인터뷰했는데 다다이즘에 대해 얘기하면서 “친구들이랑 같이 잘돼서 몇 년 뒤에는 우리가 다 먹어버렸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 기억이 나요.
“같이 큰다”는 말에 대해서는 조금 부정적이에요. 같이 큰다는 건 기적적인 일이고, 보통은 어떤 친구가 끌어주기 마련이니까요. 과거에 다다가 콘텐츠적으로 혁이를 끌어줬지만 인지도와 상업적인 기회로 연결되는 데 혁이가 영향을 준 건 사실이니까요. 지금은 조현철 감독님이 저를 끌어주고 계시고요. 다 같이 잘되기 위한 과정 안에서 시기마다 영향을 주는 사람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같이 컸다”는 말은 사실상 이상적인 표현 같고요.
이제는 감독님이 끌어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네요.
〈너와 나〉 촬영할 때, 제 친구들이 한 분야씩 참여해 작업했거든요. 서로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가가 돼 만나 함께 작업하니 너무 기쁘고 든든해요. 저는 아직 너무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 더 그렇게 (이끌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고요.
일하면서 어떤 고민을 가졌나요? 다큐멘터리 감독 혹은 촬영감독 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고민과 해답을 공유한다면요?
계속 찍어나가는 사람이 제일 멋진 것 같아요. 어느 분야든 한 가지 작업을 계속하는 게 생각보다 너무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전 오늘도 찍었어요. 제 포트레이트 찍는 순간에도 깨알같이 지금을 기록했죠.
평소에 경계하는 행동이나 말이 있다면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우는 소리 하는 거요. 예를 들어 SNS에 “집에 가고 싶다, 며칠 만에 쉬는 건지, 드디어 첫 끼” 같은 한탄을 습관적으로 올리는 사람도 있잖아요. 스스로 선택한 일을 하면서, 힘든 감정을 과하게 표현하는 건 왠지 별로예요. 힘들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일은 줏대 있게 해나가면 좋겠어요.
물론 힘들 때도 많죠. 그렇기에 좋아하는 일을 계속 좋아하는 것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다운 감독님은 찍는 일을 계속 좋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영상이 됐든 글이 됐든, 나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자주 기록해요. 요즘은 어떤 음식과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는지, 내가 사랑하는 것 모두를요. 진짜 나를 알아야 취향이 일로 연결되고 자신과 ‘착’ 붙는 작업을 할 수 있으니까요. 스스로를 제대로 알고 좋아할 줄 알아야 좋은 작업이 나오는 것 같아요.
결론은 또 사랑이네요.
네, 너무 오그라드나요?(웃음) 그렇지만 사랑이 하는 일을 누가 막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