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너 팔뚝 진짜 굵다.” “고마워. 소도 때려잡겠지?” 신체에서 유일하게 가늘었던 팔. 나는 이 팔을 내 몸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부위로 여겼다. 아니, 밖으로 드러내도 그나마 안 부끄러운 부위로 생각했다는 게 맞겠다. 상체보다 하체에 살집이 있던 내게 친구들은 “그래도 ‘상비’보단 ‘하비’가 나아. 너는 팔 강조해서 입으면 완전 말라 보여”라고 칭찬했다. 폴댄스를 시작한 후, 나는 폴 위에서 재난 상황을 맞이할 경우 이 가는 팔 때문에 제일 먼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팔뚝 힘을 열심히 키우고,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넓적해서 보기 싫다고 생각했던 허벅지는 폴 위에서 넓은 마찰면을 자랑하며 동작 성공률을 높여주었고, 여기저기 든 멍은 영광의 상처가 됐다. 결과적으로 폴댄스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전시용으로만 존재했던 내 몸을 삶의 훌륭한 도구로 바꿔주었다. 흔들리는 버스에서도 손잡이를 잡고 버티는 편안함, 조카들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파워 이모, 양손 가득 산 와인을 가뿐히 드는 기동성…. 폴 위에서 ‘브라자’와 ‘빤쓰’만 입고 사실상 기계체조를 하면서, 온몸의 근력에 의지해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 몸의 형태보다 기능에 집중하게 됐다. 가늘지 않은 부위를 ‘미완성 부위’ 취급하며 쇼핑을 미루던 날들을 지나, 몸 전체가 날 위해 일하는 훌륭한 팀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가 온몸의 근육을 감각하며 그들의 협업을 만끽하는 과정을 여전히 전시용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스트리퍼가 되고 싶은 거냐”라는 메시지, “도대체 왜 ‘그런 걸’ 인스타에 기록하냐”는 의견도 많았다. 나는 스포츠 브랜드의 옷을 입고 안전 매트를 깐 상태에서 힐 없이 맨발로 대부분의 동작을 ‘바닥에서의 춤’이 아닌 ‘폴 위 체조 수준’으로 해내고 있지만, 그들은 폴 옆에 살을 드러낸 여자가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디테일은 지운 채 ‘스트리퍼’만을 떠올렸다. 심지어 그걸 당사자에게 전하는 것에 수치심이 없었다. 단단해지고 커진 내 몸에 대해서도 부피로 우열을 가렸다. 사회가 정한 기준대로 예쁘고 가늘게 만든 몸을 조신하게 전시하지 않고, 감히 폴 위에서 춤추며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걸 용인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마치 예전에 누군가 “저 다리로 치마를 입는 건 예의가 아니다”라고 했던 것처럼, 허락받지 않은 형태의 몸과 동작을 눈앞에서 치우고 싶어 안달이었다. 하지만 타인의 몸은 그런다고 해서 치워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는다. 그들이 우리와 공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동안 못 본 사이즈의 몸, 못 본 몸의 움직임을 좀 더 견디며 여성의 몸은 전시용이 아니라는 당연한 진실을 징징대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몸내산, 내가 데리고 사는 내 몸이야. 그래, 내 팔뚝 굵다 어쩔래.
-곽민지(〈난 슬플 땐 봉춤을 춰〉 저자) 책 〈말하는 몸〉 초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난 후 집 근처에 있는 필라테스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딱 붙는 레깅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선 내 몸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언제나 그 학원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나는 이 화려한 잡지 속에서 내 몸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본다. 나는 성폭력 생존자를 비롯해 화상 경험자, 운동 애호가 등 90여 명의 여성과 몸을 주제로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그간의 인터뷰를 묶어 책으로 출간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살찐 내 몸도 사랑하게 됐노라!” 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그것이 진실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프리하지 않은 ‘프리 사이즈’ 옷을 입거나 입으려고 애쓰는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슬퍼 보인다. 나는 지금도 타인들이 곁을 지나면서 내 몸을 쳐다볼 때 몸의 존재를 강하게 느낀다. ‘어 그래, 너 거기 있었구나!’라며 화들짝 놀라는 동시에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하지만 그 느낌은 어쩐지 전과 다르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작은 몸 이야기를 함께 공유했던 여성들이 열어주었다. 다양한 삶을 사는 여성들을 인터뷰했고, 그들이 건넨 말에 나도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책을 쓴 이후에는 종종 인터넷으로 책 제목을 검색해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들여다본다. 누가 보든 말든 책을 읽고 나서 자기 몸에 대해 고요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내가 몸에 대한 책을 낸 줄 아는 지인들은 나를 만나면 먼저 자신의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그들의 고백을 듣는다. 더 많은 말을 영원히 듣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 날이면 기분이 좋아 마치 취한 듯 몸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내가, 그리고 나의 몸이 정확하게 이해받았다고 느낀다. 나는 〈말하는 몸〉이 거대한 어깨동무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라디오 프로그램 〈여성시대〉의 진행자 양희은은 몇 년 전 나와의 인터뷰에서 〈여성시대〉와 청취자를 두고 ‘거대한 어깨동무’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분명 태초에 침묵을 깨고 말했던 여성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여성이 그 여성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말을 한다. 그 말은 이어지고 이어져 나에게 닿는다. 나의 말도 누군가에게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그 어깨동무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유지영(기자, 〈말하는 몸〉 저자) 나는 이따금 통증을 몸의 한 부위로 인식한다. 다른 이들에게 없는, 나의 지느러미라고 부른다. 내 뿔이라 부르고, 나의 두 번째 자궁이라고 부른다. 나는 통증으로 많은 일을 한다. 통증으로 읽고, 듣거나 만지며, 맡고 맛본다. 사실 이는 불가피한 일이다. 통증에 사로잡힌 감각기관은 외부 자극에 둔감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통증은 눈을 어둡게 한다. 주변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과 함께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오직 코앞뿐. 심한 통증은 더러 사물의 윤곽을 흔들고 찌그러트린다. 통증의 출현은 사물의 갖가지 감촉을 선명히 느낄 수도, 타인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없게 한다. 횡격막의 수축과 그로 인한 통증이 엄습할 때는 몸의 기울기가 커져서 균형 감각마저 떨어진다. “앞을 보시래도요.” 진료실 안, 나는 의사의 지시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묻곤 한다. “앞이 어딘가요?” 무엇보다 통증에는 소리가 있는데, 반음이 올라간 날카로운 호른의 음색 같다. 쓸림, 으깨짐, 어긋남의 몸-소리들. 전신은 내부의 귀가 된다. 몸은 통증을 배제하고 외부를 향해 나아갈 수 없다. 그러기에 통증을 뛰어넘어 다가오는 타인의 만짐과 스밈 역시 존재할 수 없다. 통증으로부터 출발하고 통증으로부터 받아들이려는 노력 외에, 몸에게 다른 방도 같은 건 없다는 얘기다. 나는 통증이 보게 한다. 통증이 말하게 하고, 통증이 감응하게 한다. 근육병을 진단받았을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다. 지금은 30대니, 살아온 날들의 절반을 통증으로 감각하며 지낸 셈이다. 근육의 경련이 도도록이 일어섰다가 가라앉기를 하루에도 수십 번, 시간은 분초보다 더 미세하고 얇은 단위로 쪼개졌다. 약속 시간 30분 전에 약속을 취소하는 것은 예삿일. 통증에 잘린 몸은 말을 베었고, 움직임을 베었고, 소통을 베었다. 아픈 몸은 혼란의 지대다. 그 몸과 사는 동안 나는 매일같이 혼란스러웠다. 생생하고 미려한 감각들이 사라진 자리는 여러 모양의 불확실로 채워졌고, 몸은 연속적 몸짓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운동과 재활 치료를 하며 감각을 뾰족하게 깎고 다듬기 위해 무진 애를 써봐야 뭉뚝뭉뚝 다시금 둔해지는 몸 끝들이 야속스러웠다. 게다가 지금, 지금도 나는 혼란스러울 참이다. 연일 집요했던 경직이 몇 시간째 뚝, 멈춘 오후. 몸-소리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통증의 침묵이 반나절 이상 계속될 때면 도리어 몸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나는 몸 없이 살았던 사람 같다. 몸이 멀리서 응시된다. 조용한 전신이 놓여 있음을 인지한 선뜩하고 슬픈 얼굴이 거울 안에 있다.
-홍수영(보디 에세이스트, 〈몸과 말〉 저자) 「 다이어트를 졸업하자 비로소 찾아온 것들
」 완전한 암흑. 마침내 조명이 켜지고, 음악이 시작됐다. 그리고 무대로 첫발을 내딛는 모델들. 사이즈 33부터 120까지, 몸의 형태는 가지각색이었으나 그들이 가진 진심만은 같았다. 모델들이 100여 명의 관객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다양한 우리가 여기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벌써 2회를 맞이한 〈사이즈 차별 없는 패션쇼〉 이야기다. 쇼를 직접 기획하고 진행한 내게 이것은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 특별한 경험이었다. 동시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할 경험이기도 했다. ‘대체 이런 끼를 가진 사람들이 어디 숨어 있다 이제 나온 거지?’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몸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몸은 이걸 할 수 있고, 저 몸은 저걸 할 수 없어!”라는 식으로 몸의 한계를 구분 짓는다고 할까. 나 역시도 내가 정한 몸의 의미를 따라 열심히 마라톤을 달린 경험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적어온 버킷 리스트 속 가장 첫 번째 목표는 늘 165cm에 45kg. 태어나서 한 번쯤 남들이 봤을 때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몸을 가져보고 싶어서, 그리고 죽기 전 모델이라는 꿈에 한번 도전이라도 해보고 싶어서, 공부를 핑계로 휴학까지 했다. 정석부터 건강하지 않은 방법까지 안 해본 다이어트가 없을 정도. 그러다 결국 섭식 장애를 겪고, 나의 의지력과 몸을 저주하며 혐오하는 과정을 거쳤다. 동기는 하나였다.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당시 내게 있어 뚱뚱한 몸이 가진 의미는 불행이었고, S라인의 몸이 가진 의미는 행복이었다. 그게 내게 없는 이상 나는 평생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섭식 장애를 치유했고, 그 과정 속에서 구분 짓기를 내려놓은 순간 내추럴 사이즈 모델이라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이후 3년 넘는 시간 동안 보디 포지티브와 관련된 일을 했다. 다양한 기회로 사람들을 만나며 몸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사람들은 남들이 말하는 ‘의미 있는 몸’을 갖기 위해 투자했다. 노력과 돈, 시간은 당연하고 나아가 인간관계, 평범한 일상 심지어 건강까지도 기꺼이 지불했다. 이상했다. 사람은 많은데 그들이 생각하는 ‘의미 있는 몸’에 대한 스케치는 거의 같았다. 의문을 던지고 싶었다. 내가 가졌던 몸의 의미가 정말 순수하게 ‘나의 것’이었을까? 그렇게 큰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얻고 싶은 몸, 그 몸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정말 우리 것일까? 다이어트가 나쁘다거나 잘못된 의미를 좇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몸의 한계를 구분 짓느라 귀중한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많이 봐서, 사이즈 때문에 빛도 못 보고 사라지는 그들의 열정과 타고난 재능이 아까워서, 그간 꾹꾹 눌러 담았던 무거운 주제를 조금이나마 꺼내보고 싶었을 뿐. 살면서 한 번쯤 나만의 ‘몸의 의미’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치도·박이슬(내추럴 사이즈 모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