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맨발 투혼으로 우승을 거머쥐며 IMF로 침체된 한국에 활력을 불어넣어준 사람. 22년 만인 2020년에는 ‘은퇴한 운동선수’로 예능에 출연해 먹는 게 가장 행복한 삶도 좋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사람. DIY 팬트리에다 감자칩을 가득 채워 넣은 뒤 드러누워 TV를 켜는 전직 골프 슈스, 화면에 음식이 나오자 그제야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닫고 냉동 닭꼬치를 꺼내는 40대 여자의 모습은 묘한 위안을 준다. 〈노는 언니〉에서 함께 캠핑 간 후배가 브래지어를 하나밖에 안 가져왔다고 걱정하자 “내일은 안 입으면 되지”라 말하는 털털함과 은퇴 후 허전함을 걱정하는 후배에게 “생각보다 더 좋아”라고 말하는 솔직함은 고생 끝에 성공을 맛본 ‘리치 언니’라서 더 돋보인다. 그리고 거기에는 후배들이 운동 선수로서 또한 여자로서 잘 살기를 응원하는 그의 마음이 묻어난다.
「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게 진보 정치인의 일!”
」 21대 최연소 국회의원이자 헌정 사상 최연소 여성 국회의원. 이것만으로 주목받아 마땅하지만 그는 얼마 전 국회 본회의장에 원피스를 입고 나타나서야 언론의 세례를 받았다. 이에 류호정은 “여성 정치인을 원피스로 소비하지 말라”면서 “일하는 모습도 이만큼 보도해줬으면 좋겠다”라고 클릭 장사를 꾀하는 언론에 ‘사이다’를 한 방 먹였다. 그는 지난 8월 비동의강간죄 내용이 담긴 형법 개정안을 발표했고, 7월에는 채용비리처벌법 특례법 개정 초안을, 6월에는 차별금지법을 장혜영 의원과 공동 발표했으며, 같은 달에 월성원자력발전소의 안전 이슈, 쿠팡 노동자 사망 이슈와 관련해 꾸준히 기자회견과 캠페인 등으로 발언해왔다. 결국 류호정의 ‘원피스 일침’은 이 모든 의제를 한꺼번에 알리기 위한 큰 그림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지난 3월과 8월 코로나19 대유행의 고비를 두 번 넘기는 동안, 정은경 청장의 밤잠은 줄었고 흰머리는 늘었다. SNS에서는 “5천만 명을 이끌고 조별 과제하는 조장”이라는 비유도 생겼다. 그러나 말 안 듣는 국민들을 위해 브리핑할 때도 그는 단 한 번도 품위를 잃은 적이 없다. 침착하고 차분한 말투로 세세한 부분까지 사려 깊게 살핀다. 치명률에 대해 언급할 때는 “치명률을 언급해 송구스럽지만”, 사망자 수를 발표할 때는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와 같은 멘트도 잊지 않는다.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브리핑에서는 “코로나19에 걸렸던 친구와 놀면 안 되나요?”라는 질문에 “회복 후 따돌리거나 놀리지 말고 따뜻하게 맞아 달라”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자신의 일을 정말 무겁게 생각하고 책임감을 가지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깊이다.
「 “언론에 알려진 것보다 조금 더 받습니다.”
」 세계에서 남녀 통틀어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배구 선수인 그는 ‘월클’에 성별은 필요없다는 산증인. 머리를 묶을 땐 빈틈없이 빗어 넘긴 포니테일을 선호하는 성격만큼이나 늘 불필요한 감정 노동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 돌직구를 날린다. 유튜브 촬영 도중 “남자가 봤을 땐…”이라는 말을 듣자 바로 “여자, 남자가 뭐가 달라”라며 강스파이크로 맞받아치고, 2년간 선수로 활동했던 터키에서 “올여름 최악의 선수로 꼽혔다. 어떻게 생각하냐”라는 인터뷰 질문을 받자마자 “뻥치지 마”라며 웃는 얼굴로 리시브해낸다. 예능에서는 “겸손을 모른다”라는 출연진의 반응에 한껏 신이 나 “사실이니까”라고 응수한다. 그의 근거 있는 자신감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 스포츠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가끔 스포츠 스타가 필요한 이유다. 여자들에게는 더더욱.
「 “이 맛이 아니다, 그러면 미원을 좀 넣어.”
」 ‘코리안 그랜마’ 스웨그로 구글도 평정한 한국 유튜버의 자랑. 자칭 ‘유튜브대학 염병과’인 그는 무수한 어록 보유자다. 욕설 섞인 ‘팩폭’이 마냥 사랑스러운 건, 박막례의 세계관이 워낙 긍정적인 데다 순도 100% 잘되라고 하는 말처럼 느껴져서다. 손녀들에게 할머니란 종종 무한한 애착의 대상이자 패션 아이콘, 최고의 요리사가 되곤 하는데 박막례는 이런 ‘코리안 그랜마’의 판타지를 채워준다. 지금까지도 그의 채널 명예의 전당은 ‘박막례의 대충 비빔국수 레시피’. 킬링 포인트는 “대충”, “닉김대로”를 연발하며 패스트푸드 만들듯 국수를 버무리는 태도다. ‘손맛’을 강조하는 그를 보다 보면 ‘도대체 저 비빔국수를 몇 번이나 만들었을까?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먹였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의 손맛 어린 인생 조언을 오래오래 듣고 싶다.
「 “싫으시면 하지 마세요. 제가 할게요.”
」 〈문명특급〉은 ‘재재쇼’라고 불릴 만큼 기획자이자 MC인 ‘연반인’ 재재가 하드캐리하는 프로그램이다. 출연하는 게스트마다 이구동성으로 “정말 편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라고 말하는 건 그의 예능 철학 덕분이다. 그는 가수들에게 노래나 춤, 무대 재현을 강제로 시키지 않고, 먼저 의사를 묻거나 많은 경우 같이 하는 방식으로 콘티를 짠다. 그러면서 텐션을 잃지 않고 분위기를 이끌어가는데, 게스트에 대한 존중과 철저한 사전 조사, 관찰력이 선행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문명특급〉 댓글창에는 “게스트에게 연애 얘기를 캐묻지 않고, 여자 연예인들의 외모보다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기 때문에 볼 때마다 ‘재입덕’한다”라는 글이 많다. 때로 예능에서는 무슨 말을 하는지보다 무슨 말을 하지 않는지가 더 중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