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인도 저한테 그런 말 안 해요
」‘좋게좋게’ 해결하지, 꼭 고소까지 해야겠어?
」그는 한 번의 실수일 뿐이라 여겼겠지만, 이 사건은 그동안 일부 나쁜 어른 남자들 때문에 겪은 불쾌한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회식 자리에서 내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내가 오늘 얘를 집에 보내야겠냐”라며 주색잡기 하는 왕처럼 거들먹거렸던 사진가, 자신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를 지금 머물고 있는 호텔 방으로 갖다 달라고 했던 아티스트, 상담할 때 껌을 주며 이제 우리는 입에서 같은 냄새가 나니 입을 맞춰보자며 억지로 끌어안았던 선생님까지. 말이 됐든 행동이 됐든 삶의 여러 시기에 무례한 사람은 늘 있었다. 대부분은 습관적으로 성희롱을 일삼는, 혹은 자신의 행동이 성희롱이라는 인식조차 없는 사람들이었을 거다. 일부는 TV에 나올 만큼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뉴스 사회면에서 목격한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미투 사건으로 시끄럽더니 사회에서 조용히 묻혔다. 이들을 고발한 피해자 다수는 “그때는 차마 못 했지만 뒤늦게나마 용기를 내게 됐다”라고 입을 모았다. 경중은 다르지만 같은 사람에게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으로서, 처음엔 저들이 좀 더 빨리 목소리를 냈다면 내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잠재적 방관자 중 하나였다. 돌이켜보면 황당한 일을 겪을 때마다 그냥 속으로 욕하고 넘어갔지, 공식적으로 문제 삼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체구가 작고 순한 인상 때문에 만만해 보여 유독 이런 일을 자주 당한다고 생각해 괜히 내 외모를 자책한 적도 있다. 사실 문제는 작은 체구가 아니라, 행동하지 않기에 작은 사람이 된다는 걸 몰랐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좋게좋게’ 넘기는 것만큼 당장 속 편한 일도 없지만, 나는 소리 내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내게 의미 있는 건 사과 자체가 아니었다. 사과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자신이 내뱉은 말의 무게와 응당한 사과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게 중요해졌다. 이후 난 그 일을 인사팀에 정식 회부했고, 회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기 때문에 법적 대응도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다행히 우리 회사는 사내 괴롭힘이나 성희롱 이슈에 민감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 그에게 나와의 접근을 금지했고, 머지 않아 사안에 걸맞은 중징계를 내렸다. 인사팀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D는 이메일로 형식적인 사과를 보내왔는데, 뒤에서는 퍽 억울한 모양이었다. 좁은 업계다 보니 이런저런 말이 들려왔다.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 무섭다”, “막말로 내가 걔를 만졌냐”, “내가 지금은 숨어 지내지만” 등등, 듣고 싶지 않은 ‘TMI’가 전해졌다. 반성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쳤으나, 더 이상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가해자 서사 안 궁금하고요
」그런 ‘피가 마르는’ 피해자의 마음을 알기 때문일까? 최근 박원순 사망 사건은 내게 더 무겁게 다가왔다. 언론에 보도된 의혹이 사실이라면, 고소인은 3년간 마음고생하다 용기를 냈는데 당사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됐다. 나는 상상만으로도 괴로웠던 일이 그녀에겐 현실이 돼버렸다. 까마득한 진실 너머 고소인을 ‘시장 죽인’ 가해자처럼 몰아가는 이들도 존재하는 가운데, 사실을 밝혀줄 당사자는 이제 영원히 말이 없는 것이다. 그 마음을 감히 헤아려보자면,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 속 한 구절처럼 어떤 식으로든 이 “자살은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가 됐다. 그런데 대가라는 것은 상호적인 개념이다. 사람들은 잘못된 것에 대해 잘못이라 얘기할 때,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 역시 많은 걸 잃는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특히 피해자와 가해자를 모두 아는 제3자가 많은 일반적인 사내 성희롱 사건이 더욱더 그렇다. 가해자가 처벌받게 될 경우, 고발하는 피해자와 처벌받는 가해자 사이에 존재하지도 않는 위계가 상정되고 가해자가 핍박받는 것처럼 강자와 약자가 전복된다. 대가를 치르게 된 가해자의 딱한 처지와 절박함에 가려, 그것이 값을 치러야 할 만큼 잘못된 일임을 증명하기까지 피해자가 행한 노력과 희생은 쉽게 잊히고 마는 것이다. 그런 무책임한 연민 속에서 나는 종종 ‘너무한’ 사람이 됐다.
정의보다는 정(情), 혼자가 아니지만 혼자
」또 한 가지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부분이 있다. 혼자가 아니지만 결국 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소송으로 사람을 잃기만 한 건 아니다. 어떤 관계는 더없이 견고해졌다. 몇몇 동료는 회사가 합당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함께 회사를 그만둘 테니, 쫄지 말고 직진하라고 응원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의 역할은 어느 문턱 앞까지만 유효했다. 이를테면 소송 과정 전반을 세심하게 챙겨줬던 남자 친구조차 경찰서와 법원 문 앞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어도, 조사실 안까지는 동행하지 못하는 것이 진짜 현실인 것이다. 어느 선을 넘으면 모든 것이 혼자만의 영역이다. 소송의 모든 과정이 이와 다르지 않으니, 결정적인 순간에 감당해야 하는 무게는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는 걸 깊이 고민해야 한다. 변호사 수임료를 송금할 때 통장 앞에서, 주 2회 1시간씩 30분당 1만8백원의 상담료를 내고 바닥까지 가라앉은 감정을 끌어올리려 고군분투하는 것 모두 내 몫이었다. 진지하게 소송을 고민하고 있다면, 혼자여도 씩씩할 수 있다는 마음의 가드부터 올리는 게 좋다.

소송, 해보니까 꼭 하라고는 못 하겠어
」하나, 가장 놀랐던 건 합의할 때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의 신분증 사본을 교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법적 분쟁까지 한 상대와 주민등록번호는 물론 현 거주지 주소까지 기재된 개인정보를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에 크게 당황했다. 실제로 판결 후 개인 신상이 노출되는 것이 두렵고 꺼림칙해 소송을 고민하다 포기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둘, 대한민국에는 성희롱 죄가 없다. 현행법상 성희롱이라는 죄목 자체가 없기 때문에 고소를 진행할 때는 ‘명예훼손죄’를 적용한다.
셋, 그런데 이 명예훼손이라는 게 팩트를 말해도 죄가 성립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명예훼손죄는 크게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과 ‘허위 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으로 나뉘는데,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건 전자다. ‘저 사람이 저를 때렸어요’라는 명제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라 해도, 이를 제3자에게 발설하면 내가 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다(아, 개새끼를 개새끼라 부르지 못하다니…). 이 때문에 부당한 일을 당해 피해를 호소했으나, 가해자가 명예훼손당했다고 소송을 걸어 도리어 피해자가 2차 가해를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넷, 소송은 상상 이상으로 돈이 많이 든다. 승소만 하면 변호사 수임료로 쓴 돈을 다 돌려받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점점 더 합당한 판례가 많아지긴 하지만, 그동안 성희롱(명예훼손죄) 재판에 대한 배상금이 높았던 사례는 드물다. 변호사 수임료도 ‘못 뽑는’ 사람이 대부분이다(승소할 경우 소송 비용까지 배상받으라는 조항이 추가되기도 하는데, 이는 변호사 역량). 합의금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종종 “그래도 합의금은 많이 받았지?”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합의금에서 변호사 선임료, 병원비, 법적 서류를 준비하는 데 들어간 비용을 제외하니 쓴 돈을 충당하는 수준이었다. 정신적 피해는 둘째치고 금전적 손실이 없는 나는 그나마 운이 좋은 케이스라 했다. 게다가 승소를 하면 수임료의 일정 비율을 성공 보수로 지급해야 해 또 추가 비용이 든다. 결국 소송을 할 때는 지갑이 든든해야 마음도 든든하다는 게 결론이다. 돈 1천만원은 없어진다는 각오로 시작하고, 이 비용에 연연하지 않는 게 마음 편할 것이다. 하다못해 짧은 녹취록 하나도 증거로 제출하려면 공인 속기사의 인증을 받아야 할 만큼, 말 그대로 다 돈이니까.
이런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소송을 결심했다면 적어도 남는 게 눈물뿐인 싸움이 아니어야겠다.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 마음 맞는, 그리고 일 잘하는 법률 대리인을 만나는 거다. 변호사를 고를 때는 로펌의 규모나 승률도 중요하지만, 고소인의 인간적 성향과도 결이 맞는 법률 대리인과 함께해야 한다. 긴 분쟁 내내 의지해야 하고,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는 사항을 방어하기 위해 개인의 말과 행동을 세부적인 것 하나까지 공유하며 긴밀하게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변호사의 말투 때문에 상처받을 수도 있고, 일을 처리하는 성향이 달라 서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법의 언어는 인정의 언어와 다르다. 주위에서 감정적으로 하는 조언이 법 앞에서는 무력해질 때가 많다. 법정 싸움에서 믿을 건 정말 변호사밖에 없다.
나는 3명의 변호사를 만났다. 우선 인권 단체에서 무료 법률 자문 봉사를 하는 법조인과 상담했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였는데, 그는 ‘언어적 폭력’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신체적 접촉도 없었고, 지인인데 꼭 문제 삼아야겠냐”라는 식이었다. 나는 다행히 사설 변호사를 알아볼 수 있는 형편이었지만, 만약 영화 〈도가니〉에서 그랬듯 돈 1천원이 아쉬운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대형 로펌의 공세 앞에 피눈물을 흘리겠구나 싶었다(인권 단체를 신뢰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성폭력상담소, 국가인권위원회 등 많은 단체가 무료 법률 상담을 지원하고 있고, 실력 좋고 생각이 건강한 변호사도 많다. 나는 당시 대기 인원이 많아 급히 사설 변호사와 상담했다). 사설 로펌에서 만난 두 번째 변호사는 상냥한 옆집 언니 같아 좋았지만, 내겐 센 언니가 필요했다. 세 번째 변호사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매서운 오라가 느껴지는 ‘환불 프리패스’ 상이었는데, 어딜 가도 내 돈은 절대 안 떼일 것 같은 기개에 신뢰가 생겨 함께 소송을 진행했다.
잃는 게 많겠지만, 적게 잃고 크게 얻을 테니까
」사람들은 종종 피해자가 ‘힘없고 불쌍한’ 모습일 거라는 고정관념에 의존해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라본다. “재밌게 잘 지내던데?” “웃는 거 보니 별로 심각한 거 아닌 것 같던데?” 나는 소송하며 겪는 시련에 힘이 빠질 때는 있었지만 한순간도 당당하지 않은 적 없었다. 동시에 제대로 사과받지 못한 것에 대한 노여움을 한시도 가라앉힌 적이 없다. 지금도 여전히 잊힌 기억이 아니라 시간에 묻어뒀을 뿐이다. 성희롱 소송은 유독 인화성이 좋은 주제다. 자극적인 줄거리만 입에 오르다 묻히고, 피해자가 소송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나 대처법 같은 유용한 경험은 공유되지 않는 것이 아쉽다. 해본 사람만 아는 실질적인 스트레스와 어려움,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져야 할 것이다. 만만하게 보고 소송을 시작했다가 현실적인 난관에 몸과 멘탈이 탈탈 털리는 일이 없어야 하니까. 소송에 따르는 고난을 견뎌낼 체력이 없다면, 행동할 수 있는 자신만의 다른 방법도 분명 있을 테니까. 나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분명 힘든 일이다. 다만 어떤 부분이 힘들고, 어떻게 해야 덜 힘든지, 언제 힘주어 말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목소리에 기합도 들어간다. 그래야 당당한 피해자가 되는 거다. 어디에도 이상적인 피해자는 없다.
소송을 하는 동안 주위에서 저마다의 언어로 응원을 전해왔다. 그중에는 고해성사 비슷한 경험담도 있었다. 상사 손에 이끌려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 화를 당할 뻔했는데, 문제 일으키는 인상을 남기기 싫어 그냥 넘어갔다는 말. 남초 회사에 다니는데 “너희가 오늘 해야 할 것은 뭐다?”라고 선창하면 “임신!”이라고 후창하는 건배사에 충격을 받았으나, 말 한마디 못 했다는 말. 그래서 후회하는데 나는 용감하다는 말. 그래서 자신도 용기를 낼 수 있겠다는 말이었다. ‘연대’니 ‘선한 영향력’이니 하는 단어는 어딘가 거창해 잘 쓰지 않는데, 이 말 외에는 내가 느낀 감정을 표현할 명사가 없는 걸 보니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가 보다. 그 마음은 내게 그 자체로 목소리를 냈다는 자부심, 그러기 위해 보낸 고단한 시간에 대한 위로가 됐으니 말이다. 어려운 기사를 다 썼다고 하니 마침 친구에게 메시지가 왔다. “다음엔 나도 너처럼 가만있지 않을 거야. 수고했다, 고기 사줄게.” 이제 적어도 2명은 아는 거다. 성희롱 혹은 직장 내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일이 나만 겪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그럴 때는 소리 내어 말해도 괜찮다는 것도 안다. 최소한 동지 하나는 더 얻은 셈이다. 나는 그거면 됐다. 이제 마음 편히 고기 먹으러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