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직장에서 성희롱 당해서 진짜 고소해봤다

입에 담기도 민망한 성희롱을 하고도 사과하지 않는 무례한 상사에게 고소로 대응했다. 주위에서 힘들고 상처받은 티를 내고 다니라며 ‘피해자다움’을 조언했고, 나는 되물었다. “아니, 피해자는 웃고 즐거우면 안 돼?”

BYCOSMOPOLITAN2020.09.16
 

애인도 저한테 그런 말 안 해요

살다 보면 깜빡이도 안 켜고 불쑥 실례하러 들어오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가까운 친구 A는 회식 자리에서 모욕적인 일을 당했다. 회사 팀장 B가 A에 대해 “얘는 개방적이라 SM도 즐길 스타일이다. 빵댕이에 채찍 자국도 있을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남자 동료 C가 “아, 그거 성희롱이에요. 요즘 그런 말 하면 큰일나요”라며 제지하자, B는 “아냐, 쟤가 좀 개방적이야. 지난번에 스리섬도 못 할 게 없다는 말도 했어”라며 있지도 않은 사실을 얘기했다. 이에 A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으나 B는 같이 들은 사람도 있다며 자신의 말이 사실인 것처럼 뒤집어씌우기까지 했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나 역시 비슷한 성희롱을 당한 기억이 있다. 직장 상사 D가 농담이랍시고  동료들 앞에서 “쟤는 ‘거기’에 달랑달랑 장신구도 달고 다닐걸” 따위의 무례한 말을 내뱉은 것이다(실제로는 입에 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저급한 단어였지만). 화가 나 항의하자 “네가 좀 취향이 극성맞지 않냐. 원나이트 스탠드도 거리낌 없잖아”라며 나는 입 밖에 낸 적도 없는 말을 사실처럼 얘기했다. 말실수 아니냐고? 법의 언어를 빌려 표현하면 그의 실언이 얼마나 엄중한지 극명해진다. “D는 제3자가 있는 자리에서 공연히 고소인의 특정 신체 부위를 언급하고, 문란한 여자처럼 인식돼 사회적 평가와 이미지를 저하할 만한 구체적인 허위 사실을 적시함으로써 성적 모욕감, 인격적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 고소인의 사회적 명예를 훼손하였던바, 형법 제307조 2항의 허위 사실 적시로 인한 명예훼손죄에 해당한다.” 실제 고소장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D의 발언은 감정적으로도 언제 곪을지 모르는 생채기를 냈다. 그의 말 한마디 때문에 나는 사람들 앞에서 아무 남자와 쉽게 잠자리를 하는 문란한 여자가 된  듯한 수치심을 느꼈다. 이후 그 자리에서 화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과 함께 불쑥불쑥 올라오는 분노와 모멸감으로 일에 집중할 수도,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좋게좋게’ 해결하지, 꼭 고소까지 해야겠어?

고소는 홧김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이 무례하게 군다고 소장부터 쓰고 볼 만큼 만만한 일도 아니고, 나 역시 문제 제기는 했지만 그렇게 배짱 두둑한 사람도 못 됐다. 그럼에도 법적 대응이라는 큰 결심을 한 이유는,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뒤에서 딴소리를 하고 다니는 D의 태도 때문이었다. 문제의 발언 이후 보름 동안 기다렸지만 그는 사과하지 않았다. D를 찾아가 사과하지 않는 것에 대해 항의했다. 그냥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뻔한 레퍼토리가 이어졌다. 술에 취해 잘 기억하지 못한다며 애매하게 회피하려는 태도에 동료로서 배신감을 느꼈다.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시늉으로 그치기엔 그의 행동이 내게 준 모욕감은 컸다.
그는 한 번의 실수일 뿐이라 여겼겠지만, 이 사건은 그동안 일부 나쁜 어른 남자들 때문에 겪은 불쾌한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회식 자리에서 내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내가 오늘 얘를 집에 보내야겠냐”라며 주색잡기 하는 왕처럼 거들먹거렸던 사진가, 자신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를 지금 머물고 있는 호텔 방으로 갖다 달라고 했던 아티스트, 상담할 때 껌을 주며 이제 우리는 입에서 같은 냄새가 나니 입을 맞춰보자며 억지로 끌어안았던 선생님까지. 말이 됐든 행동이 됐든 삶의 여러 시기에 무례한 사람은 늘 있었다. 대부분은 습관적으로 성희롱을 일삼는, 혹은 자신의 행동이 성희롱이라는 인식조차 없는 사람들이었을 거다. 일부는 TV에 나올 만큼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뉴스 사회면에서 목격한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미투 사건으로 시끄럽더니 사회에서 조용히 묻혔다. 이들을 고발한 피해자 다수는 “그때는 차마 못 했지만 뒤늦게나마 용기를 내게 됐다”라고 입을 모았다. 경중은 다르지만 같은 사람에게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으로서, 처음엔 저들이 좀 더 빨리 목소리를 냈다면 내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잠재적 방관자 중 하나였다. 돌이켜보면 황당한 일을 겪을 때마다 그냥 속으로 욕하고 넘어갔지, 공식적으로 문제 삼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체구가 작고 순한 인상 때문에 만만해 보여 유독 이런 일을 자주 당한다고 생각해 괜히 내 외모를 자책한 적도 있다. 사실 문제는 작은 체구가 아니라, 행동하지 않기에 작은 사람이 된다는 걸 몰랐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좋게좋게’ 넘기는 것만큼 당장 속 편한 일도 없지만, 나는 소리 내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내게 의미 있는 건 사과 자체가 아니었다. 사과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자신이 내뱉은 말의 무게와 응당한 사과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게 중요해졌다. 이후 난 그 일을 인사팀에 정식 회부했고, 회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기 때문에 법적 대응도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다행히 우리 회사는 사내 괴롭힘이나 성희롱 이슈에 민감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 그에게 나와의 접근을 금지했고,  머지 않아 사안에 걸맞은 중징계를 내렸다. 인사팀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D는 이메일로 형식적인 사과를 보내왔는데, 뒤에서는 퍽 억울한 모양이었다. 좁은 업계다 보니 이런저런 말이 들려왔다.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 무섭다”, “막말로 내가 걔를 만졌냐”, “내가 지금은 숨어 지내지만” 등등, 듣고 싶지 않은 ‘TMI’가 전해졌다. 반성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쳤으나, 더 이상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좋게좋게’만큼 당장 속 편한 일도 없지만, 나는 소리 내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았다. 
 

가해자 서사 안 궁금하고요

소송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나를 문제 일으키는 사람처럼 대하는 몇몇 사람의 태도였다. 특히 사건 당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E는 나를 더 괴롭게 했다. 나를 설득할 요량으로 몇 차례 연락해 D의 입장을 대변했다. “D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만 쉬는데, 얼굴이 너무 안돼 보여 걱정되더라”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상처받은지 몰랐다”, “D가 많이 미안해하고 있으니 원만하게 잘 해결하기 바란다”라는 오지랖과 염려 속에 나는 없었다. 궁금하지도 않은 가해자 서사를 쏟아내는 E 때문에 나는 느끼지 않아도 될 죄책감을 느꼈다. 더군다나 사건의 목격자인 그가 나를 몰아세우고 나무라니 극도로 정서가 위태해졌다. 정말로 D에게 가혹하게 구는 가해자가 된 것 같아 밤마다 별의별 상상을 다 했다. 진짜 죽을 맛인 건 난데, 그 와중에 D가 이 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피해자라니. 그런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어 수개월간 심리 상담을 받았고 몸무게도 7kg나 빠졌다. 
그런 ‘피가 마르는’ 피해자의 마음을 알기 때문일까? 최근 박원순 사망 사건은 내게 더 무겁게 다가왔다. 언론에 보도된 의혹이 사실이라면, 고소인은 3년간 마음고생하다 용기를 냈는데 당사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됐다. 나는 상상만으로도 괴로웠던 일이 그녀에겐 현실이 돼버렸다. 까마득한 진실 너머 고소인을 ‘시장 죽인’ 가해자처럼 몰아가는 이들도 존재하는 가운데, 사실을 밝혀줄 당사자는 이제 영원히 말이 없는 것이다. 그 마음을 감히 헤아려보자면,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 속 한 구절처럼 어떤 식으로든 이 “자살은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가 됐다. 그런데 대가라는 것은 상호적인 개념이다. 사람들은 잘못된 것에 대해 잘못이라 얘기할 때,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 역시 많은 걸 잃는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특히 피해자와 가해자를 모두 아는 제3자가 많은 일반적인 사내 성희롱 사건이 더욱더 그렇다. 가해자가 처벌받게 될 경우, 고발하는 피해자와 처벌받는 가해자 사이에 존재하지도 않는 위계가 상정되고 가해자가 핍박받는 것처럼 강자와 약자가 전복된다. 대가를 치르게 된 가해자의 딱한 처지와 절박함에 가려, 그것이 값을 치러야 할 만큼 잘못된 일임을 증명하기까지 피해자가 행한 노력과 희생은 쉽게 잊히고 마는 것이다. 그런 무책임한 연민 속에서 나는 종종 ‘너무한’ 사람이 됐다.
 

정의보다는 정(情), 혼자가 아니지만 혼자

소송할 때 가장 크게 잃는 건 사람이다. 사람은 정의롭기보다는 정(情)의 구애를 받는 동물이다.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내 편이 돼줄 것이라는 기대부터 버리는 게 좋다. 이 상실에 대한 대처법은 남사친에게 배웠다. D의 발언에 대한 남자들의 생각이 궁금해 의견을 물은 적이 있는데, “난 네 친구니까 네 편이지만, 만약 내가 D의 친구라면 나는 그 사람 편을 들 것 같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답 같은 정답이었다. 내 경우 역시 남자라서 그의 편을 드는 사람도 없었고, 여자라고 내 편에 서는 것도 아니었다 . 여성 동료인 F는 승소를 앞둔 이 싸움이 찝찝한 합의로 끝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료들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어우, 저도 여잔데! 힘든 거 왜 모르겠어요”라던 그녀는 우리 팀이 이 사건에 대해 인사팀과 나눈 자료를  D에게 넘겼고, 그걸 빌미로 D가 나를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겠다고 했다. 평소 그녀를 탐탁지 않아 하던 동료들은 “젠더 감수성도 없는 무지한 X”, “자기도 여자면서 어떻게!”라며 분개했는데, 정작 나는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뭘 하든 그녀가 선택할 일이었다. ‘끼리끼리 사이언스’ 하고 말면 그만, 많은 것이 심플해졌다. 특히 나는 이 소송을 미투보다는 한 조직의 수직 관계에서 권력이 있는 사람이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고도 사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대처라 여겼다. 이처럼 사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경우, 제3자가 어떤 가치를 가지느냐보다는 당사자 간의 친분, 회사 내의 이해관계 등 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편’이 갈릴 것이다. 그러니 내 옆에 서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아쉬워하거나 비분강개하지 않아도 된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양자택일하자면 그의 편에 서야 하지만, 뒤에서는 말로나마 위로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내 앞에서는 나를 달래주고 그 앞에서는 그를 토닥이는 것, 그게 사람 마음이다.
또 한 가지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부분이 있다. 혼자가 아니지만 결국 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소송으로 사람을 잃기만 한 건 아니다. 어떤 관계는 더없이 견고해졌다. 몇몇 동료는 회사가 합당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함께 회사를 그만둘 테니, 쫄지 말고 직진하라고 응원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의 역할은 어느 문턱 앞까지만 유효했다. 이를테면 소송 과정 전반을 세심하게 챙겨줬던 남자 친구조차 경찰서와 법원 문 앞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어도, 조사실 안까지는 동행하지 못하는 것이 진짜 현실인 것이다. 어느 선을 넘으면 모든 것이 혼자만의 영역이다. 소송의 모든 과정이 이와 다르지 않으니, 결정적인 순간에 감당해야 하는 무게는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는 걸 깊이 고민해야 한다. 변호사 수임료를 송금할 때 통장 앞에서, 주 2회 1시간씩 30분당 1만8백원의 상담료를 내고 바닥까지 가라앉은 감정을 끌어올리려 고군분투하는 것 모두 내 몫이었다. 진지하게 소송을 고민하고 있다면, 혼자여도 씩씩할 수 있다는 마음의 가드부터 올리는 게 좋다.
 

소송, 해보니까 꼭 하라고는 못 하겠어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진작 알았으면 고소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을 거야.” 소송하는 내내 이 문장을 육성으로 내뱉을 만큼 당황스러운 상황을 마주했다.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알다가도 모를 법 조항도 수두룩했다. 
하나, 가장 놀랐던 건 합의할 때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의 신분증 사본을 교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법적 분쟁까지 한 상대와 주민등록번호는 물론 현 거주지 주소까지 기재된 개인정보를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에 크게 당황했다. 실제로 판결 후 개인 신상이 노출되는 것이 두렵고 꺼림칙해 소송을 고민하다 포기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둘, 대한민국에는 성희롱 죄가 없다. 현행법상 성희롱이라는 죄목 자체가 없기 때문에 고소를 진행할 때는 ‘명예훼손죄’를 적용한다. 
셋, 그런데 이 명예훼손이라는 게 팩트를 말해도 죄가 성립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명예훼손죄는 크게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과 ‘허위 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으로 나뉘는데,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건 전자다. ‘저 사람이 저를 때렸어요’라는 명제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라 해도, 이를 제3자에게 발설하면 내가 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다(아, 개새끼를 개새끼라 부르지 못하다니…). 이 때문에 부당한 일을 당해 피해를 호소했으나, 가해자가 명예훼손당했다고 소송을 걸어 도리어 피해자가 2차 가해를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넷, 소송은 상상 이상으로 돈이 많이 든다. 승소만 하면 변호사 수임료로 쓴 돈을 다 돌려받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점점 더 합당한 판례가 많아지긴 하지만, 그동안 성희롱(명예훼손죄) 재판에 대한 배상금이 높았던 사례는 드물다. 변호사 수임료도 ‘못 뽑는’ 사람이 대부분이다(승소할 경우 소송 비용까지 배상받으라는 조항이 추가되기도 하는데, 이는 변호사 역량). 합의금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종종 “그래도 합의금은 많이 받았지?”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합의금에서 변호사 선임료, 병원비, 법적 서류를 준비하는 데 들어간 비용을 제외하니 쓴 돈을 충당하는 수준이었다. 정신적 피해는 둘째치고 금전적 손실이 없는 나는 그나마 운이 좋은 케이스라 했다. 게다가 승소를 하면 수임료의 일정 비율을 성공 보수로 지급해야 해 또 추가 비용이 든다. 결국 소송을 할 때는 지갑이 든든해야 마음도 든든하다는 게 결론이다. 돈 1천만원은 없어진다는 각오로 시작하고, 이 비용에 연연하지 않는 게 마음 편할 것이다. 하다못해 짧은 녹취록 하나도 증거로 제출하려면 공인 속기사의 인증을 받아야 할 만큼, 말 그대로 다 돈이니까. 
이런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소송을 결심했다면 적어도 남는 게 눈물뿐인 싸움이 아니어야겠다.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 마음 맞는, 그리고 일 잘하는 법률 대리인을 만나는 거다. 변호사를 고를 때는 로펌의 규모나 승률도 중요하지만, 고소인의 인간적 성향과도 결이 맞는 법률 대리인과 함께해야 한다. 긴 분쟁 내내 의지해야 하고,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는 사항을 방어하기 위해 개인의 말과 행동을 세부적인 것 하나까지 공유하며 긴밀하게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변호사의 말투 때문에 상처받을 수도 있고, 일을 처리하는 성향이 달라 서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법의 언어는 인정의 언어와 다르다. 주위에서 감정적으로 하는 조언이 법 앞에서는 무력해질 때가 많다. 법정 싸움에서 믿을 건 정말 변호사밖에 없다.
나는 3명의 변호사를 만났다. 우선 인권 단체에서 무료 법률 자문 봉사를 하는 법조인과 상담했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였는데, 그는 ‘언어적 폭력’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신체적 접촉도 없었고, 지인인데 꼭 문제 삼아야겠냐”라는 식이었다. 나는 다행히 사설 변호사를 알아볼 수 있는 형편이었지만, 만약 영화 〈도가니〉에서 그랬듯 돈 1천원이 아쉬운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대형 로펌의 공세 앞에 피눈물을 흘리겠구나 싶었다(인권 단체를 신뢰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성폭력상담소, 국가인권위원회 등 많은 단체가 무료 법률 상담을 지원하고 있고, 실력 좋고 생각이 건강한 변호사도 많다. 나는 당시 대기 인원이 많아 급히 사설 변호사와 상담했다). 사설 로펌에서 만난 두 번째 변호사는 상냥한 옆집 언니 같아 좋았지만,  내겐 센 언니가 필요했다. 세 번째 변호사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매서운 오라가 느껴지는 ‘환불 프리패스’ 상이었는데, 어딜 가도 내 돈은 절대 안 떼일 것 같은 기개에 신뢰가 생겨 함께 소송을 진행했다.
 
울다가도 빵 한 조각 입에 들어가면 한결 나아지는 것이 사람의 감정인데, 불문율 같은 ‘피해자다움’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이상적인 피해자, 이상적인 가해자란 어디에도 없다. 
 

잃는 게 많겠지만, 적게 잃고 크게 얻을 테니까

“너무 밝게 웃고 다니지 마.” 당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재판과 관련해 ‘피해자다움’이라는 개념이 주목받았는데, 그걸 보고 친구가 진심 어린 조언으로 한 말이었다. ‘슬프고 힘든 티를 내고 다녀야 피해자로서의 진정성이 법정에서도 인정받는다’라는 우려였다. 재판에서는 고소인과 피고인이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은 사적인 사실도 중요 쟁점이 되니 매사에 피해자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지은 비서가 피해 직후 ‘동료들에게 장난을 치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고 안 전 지사에게도 이모티콘을 썼다’라는 걸 근거로, 피고소인은 사건이 합의된 성관계라 주장하기도 했다. 서럽게 울다가도 빵 한 조각 입에 들어가면 한결 나아지는 것이 사람의 감정인데, 불문율 같은 ‘피해자다움’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웃는다고 상처받지 않은 게 아니며, 운다고 또 달라지는 게 있었던가. 좋은 추억도 아닌 사적인 경험을 기사에 녹이는 용기를 낸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피해자가 ‘힘없고 불쌍한’ 모습일 거라는 고정관념에 의존해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라본다. “재밌게 잘 지내던데?” “웃는 거 보니 별로 심각한 거 아닌 것 같던데?” 나는 소송하며 겪는 시련에 힘이 빠질 때는 있었지만 한순간도 당당하지 않은 적 없었다. 동시에 제대로 사과받지 못한 것에 대한 노여움을 한시도 가라앉힌 적이 없다. 지금도 여전히 잊힌 기억이 아니라 시간에 묻어뒀을 뿐이다. 성희롱 소송은 유독 인화성이 좋은 주제다. 자극적인 줄거리만 입에 오르다 묻히고, 피해자가 소송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나 대처법 같은 유용한 경험은 공유되지 않는 것이 아쉽다. 해본 사람만 아는 실질적인 스트레스와 어려움,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져야 할 것이다. 만만하게 보고 소송을 시작했다가 현실적인 난관에 몸과 멘탈이 탈탈 털리는 일이 없어야 하니까. 소송에 따르는 고난을 견뎌낼 체력이 없다면, 행동할 수 있는 자신만의 다른 방법도 분명 있을 테니까. 나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분명 힘든 일이다. 다만 어떤 부분이 힘들고, 어떻게 해야 덜 힘든지, 언제 힘주어 말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목소리에 기합도 들어간다. 그래야 당당한 피해자가 되는 거다. 어디에도 이상적인 피해자는 없다. 
소송을 하는 동안 주위에서 저마다의 언어로 응원을 전해왔다. 그중에는 고해성사 비슷한 경험담도 있었다. 상사 손에 이끌려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 화를 당할 뻔했는데, 문제 일으키는 인상을 남기기 싫어 그냥 넘어갔다는 말. 남초 회사에 다니는데 “너희가 오늘 해야 할 것은 뭐다?”라고 선창하면 “임신!”이라고 후창하는 건배사에 충격을 받았으나, 말 한마디 못 했다는 말. 그래서 후회하는데 나는 용감하다는 말. 그래서 자신도 용기를 낼 수 있겠다는 말이었다. ‘연대’니 ‘선한 영향력’이니 하는 단어는 어딘가 거창해 잘 쓰지 않는데, 이 말 외에는 내가 느낀 감정을 표현할 명사가 없는 걸 보니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가 보다. 그 마음은 내게 그 자체로  목소리를 냈다는 자부심, 그러기 위해 보낸 고단한 시간에 대한 위로가 됐으니 말이다. 어려운 기사를 다 썼다고 하니 마침 친구에게 메시지가 왔다. “다음엔 나도 너처럼 가만있지 않을 거야. 수고했다, 고기 사줄게.” 이제 적어도 2명은 아는 거다. 성희롱 혹은 직장 내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일이 나만 겪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그럴 때는 소리 내어 말해도 괜찮다는 것도 안다. 최소한 동지 하나는 더 얻은 셈이다. 나는 그거면 됐다. 이제 마음 편히 고기 먹으러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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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itor 하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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