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갔다가 첫눈에 반한 직원 B에게 대출을 신청하는 척 데이트 신청을 했다. 내 초미의 관심사는 사복 입은 B의 모습이었다. 늘 은행 유니폼을 입은 모습만 봐왔기 때문에, 사무실을 벗어난 그녀의 평소 모습은 어떨지 궁금했다. 첫 데이트 날, B는 스키니 진에 오픈토 하이힐을 신고 나타났다. 문제는 오픈토 슈즈 안의 발끝이 불투명한 살색 판타롱 스타킹이었다. 오픈토의 매력은 오픈토 사이로 보이는 페디큐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녀의 오픈토 힐 사이로 어색하게 삐져나온 스타킹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이미 한번 깨서 그런지, 신발 가장자리를 따라 발등에 덕지덕지 붙인 반창고도 어찌나 초라해 보이던지. 어쩌면 오픈토 사이로 삐져나온 건 스타킹이 아니라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었을지도. -
그래도내가실적많이올려줬잖아, 30세
유럽 여행에서 만난 P와 나는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서로를 잊지 못했다. 그녀는 대구에, 나는 서울에 살았는데 전화로 사랑을 이어오다 결국 장거리 연애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날은 P가 처음 서울에 있는 내 자취방으로 찾아온 날이었다. 처음으로 둘이서 함께 밤을 보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먼저 씻으러 간 그녀를 기다리며 나는 온갖 설레는 상상에 도취돼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익숙한 사운드가 들려왔다. “착착착착착착착 크와아아아아아앙 퉤에에에에엑 우워어어어어에에엑!” 두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가 가글하며 양치할 때 들리는 바로 그 소리였다. 연이어 파워 세수 ASMR도 이어졌다. “푸확푸확! 퍽퍽퍽퍽퍽퍽퍽!푸르르!” 그녀는 손에 비누를 묻히는 중인 듯했다. “찝찝찝 찝찝찝.” P의 파워 세수는 절정에 다다랐다. “푸확 푸~ 푸르르 어푸푸푸푸푸푸 어푸푸푸푸푸푸 크으으으응 쏴아아~” 무드를 와장창 깨는 소리에 나는 옛말 하나를 떠올렸다. ‘원래 딸은 아빠를 많이 닮는다.’ -
딸은아빠를많이닮는다잖아, 27세
아이돌 연습생 출신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회사 후배 D는 우리 회사의 아이돌이었다. 그녀에게 대놓고 대시하는 남자 직원도 더러 있었지만 D는 “사내 연애는 사절”이라며 도도하게 선을 긋곤 했다. 범접할 수 없는 여신 같았던 D에 대한 환상이 깨진 건 연말 회식 때였다. 회식 장소는 룸 형태의 고깃집이었는데, 하나둘씩 신발을 벗는 중 마른 오징어 냄새 같은 군내가 올라왔다. 냄새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롱부츠를 벗고 있는 D가 보였다. 하루 종일 통풍이 되지 않는 롱부츠 속에서 홍어처럼 한껏 숙성된 고린내가 풍겼다. 스타킹을 신은 탓에 시큼한 발 냄새까지, 고기 향을 압도하는 충격적인 냄새가 났다. 이렇게 D에 대한 환상은 깨졌다. 애인이 롱부츠를 신은 날엔 신발을 벗지 않게 하는 게 남친의 센스라는 교훈만 남긴 채. -
너도사람이구나, 34세
블라인드 사이로 비치는 따사로운 볕을 맞으며 눈을 떴다. 쌔근쌔근 잠든 여친 C의 모습이 예뻐 턱을 괴고 누워 한참이나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는 아침부터 로맨티시스트라도 된 것처럼 C의 머리를 쓰다듬고 귀 밑으로 삐져나온 잔머리를 매만졌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로 손을 가져가는 순간 손끝에서 볼록 튀어나온 뭔가가 만져졌다. 평소엔 긴 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는데, 목에 오서방같이 커다란 점이 있었던 것이다. 난생처음 보는 큰 점에 눈이 휘둥그레진 찰나, 점을 뚫고 나온 털 한 가닥이 눈에 들어왔다. 겨드랑이 털처럼 유난히 길고 꼬불한 털이 메마른 사막의 한 줄기 꽃처럼 피어 있었다. 순간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은 것같이 잠이 확 깼다. 내겐 너무 예쁜 그녀지만, 가끔은 돼지 꼬랑지 같은 그 털이 보일 때마다 두 눈을 질끈 감게 된다. -
그녀는츄바카, 29세
A와 나는 남매 같은 연인이다. 가족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것까진 좋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선을 넘기 시작했다. 내가 남자로 보이기는 하는 걸까? 별안간 머리가 간지럽다며 내 손을 자기 머리로 가져가 두피를 긁는 것이었다. 문득 키 차이가 꽤 나는 남친의 코 높이에 자신의 정수리가 닿는다며, 두피 냄새 방지 스프레이를 뿌리던 여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엔 귀여워서 한두 번 머리를 대신 긁어줬는데, 점점 더 수위가 높아지는 게 문제였다. 한번은 밥 먹고 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고 말해줬더니 내 손톱으로 자기 이에 낀 고춧가루를 빼는 것이었다. 치아 사이사이에 고춧가루가 낀 채 활짝 웃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깨는데, 내 손톱에 낀 그녀의 ‘이똥’을 보니 빈정이 확 상했다. 나는 지금 ‘여자니까’, ‘여자답게’ 같은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아니 나의 사랑을 지켜달라는 것일 뿐. -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2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