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레스 가격미정 미우미우.
캐릭터 노트, 대본, 보조 배터리, 이어폰을 비롯해 촬영할 때 필요한 소품이 들어 있어요. 현장용 가방이라고 할까요? 지방 촬영이 잦은 드라마를 찍으면 짐이 더 늘어나요.
드라마 〈스토브리그〉가 한창 방영 중이죠. 시청자 반응이 뜨거워 현장 분위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아요.
지난해 차기작을 고르면서 시청률은 차치하고 웃으면서 행복하게 촬영하자는 목표를 세웠어요. 다행스럽게도 좋은 동료들을 만난 덕에 그 목표는 이뤘죠. 촬영할 때마다 행복해요. 드라마 방영 전에도 현장 분위기가 좋았던 터라 새삼스럽게 시청률 때문에 더 좋을 일은 없어요. 감독님이나 동료 배우들도 시청률에 대한 언급을 아예 자제하는 분위기예요. 촬영에 여념이 없어 외부 반응을 실감할 일이 없기도 하고요.
〈스토브리그〉는 특히 야구 팬들 사이에서도 디테일이 살아 있다는 평이 많아요. 그만큼 작품의 완성도가 높다는 얘기죠.
작가님이 워낙 오래 준비를 했기 때문에 어떤 오류가 있을지 걱정하진 않았어요. 그저 공부하는 마음으로 대본을 보고 있죠. 또 감독님께서 섬세하게 인물과 인물 신 사이의 간극을 잘 조절해주세요. 제가 그런 성격이 아닌데, 이번 작품에서는 두 분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며 촬영하고 있어요.
드림즈라는 야구팀의 운영팀장인 ‘이세영’은 팀과 야구에 대한 애정이 엄청난데, 연기하면서 공감이 많이 되던가요?
‘세영’은 운영팀장으로서의 자아, 야구 팬으로서의 자아, 딸로서의 자아가 있죠. 어떤 사람과 함께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세영’의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연기에 임하고 있어요. 특히 팀의 운영팀장으로 남자가 대다수인 거친 야구판에서 성장한 ‘세영’은 고인 물이 돼가는 프런트, 윗선에서 하는 파격적인 인사에 강하게 제동을 걸죠. 반면에 엄마와 있을 때는 한없이 편하고 발랄해져요. ‘세영’은 매우 투명한 캐릭터예요. 본인이 느끼는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용감한 사람이죠. 저는 그런 ‘세영’을 잘 보여주고 싶어요.
‘이세영’은 한 회사에서 한 가지 일을 10년 동안 해온 사람이에요. 타성에 젖거나 순수함을 잃을 수 있는데, ‘세영’은 그렇지 않아요. 야구는 물론 팀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커서 한편으론 ‘너무 비현실적으로 순진한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시청자들이 ‘세영’을 ‘드림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드림즈의 팬이었기 때문이죠. 성적이 좋지 않은데도 열광적으로 자기 팀을 응원하는 야구 팬들을 보면서 신기했어요. 성적이 안 좋다고 욕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애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지 궁금했는데, 어떤 분이 그건 모태 신앙 같은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드라마에 명대사가 참 많아요. 그런데 대부분 ‘백승수(남궁민)’의 입을 통해 나와 배우로서 조금 아쉽기도 할 것 같아요.
드라마 구조상 남자 주인공의 활약으로 일이 풀리니 갈증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세영’이 감정적이면서도 이성적이고 맞는 말을 한다는 점에 위안을 삼아요.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남자는 무조건 냉철하면서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성적이라는 클리셰에 대해 감독님과 작가님께 얘기한 적이 있어요. 저도 주체적인 역할을 하고 싶지만, 극의 전개를 위해 당위성이 떨어지는 연기를 할 때 슬펐거든요. 그 얘기를 흘려듣지 않고 사려 깊게 생각해주신 부분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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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수’가 ‘길창주(이용우)’ 선수를 설득하면서 “아무한테도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저는 길 선수가 정말로 절실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막상 촬영할 때는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았는데, 장면을 곱씹어보니 와닿는 말이더라고요. 저 역시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미움받을 때가 많잖아요. 애정이든, 미움이든 어떤 감정도 감수해야겠죠. 그 대사를 들을 때 ‘이게 절실함의 부족과 연결될 수 있는 문제구나’란 생각이 들어 좋았어요.
드라마 초반에 ‘세영’은 ‘백승수’ 단장과 가치관, 신념 부분에서 많이 부딪혀요. 실제로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편이에요?
제 인생에서 2018년은 터닝 포인트예요. 전 인내하는 제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잘 참았다며 격려하고, 그걸 높게 샀죠. 그러던 중 어느 순간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당당한 캐릭터를 연기할 때 해소되는 기분을 느꼈어요. 저는 누군가의 의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은 아니지만, 제 안에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거든요. 이 주제에 대해 메모했던 게 있어요. “외적으로 꼭 흐름에 반대하며 산다든지, 저항 정신이 가득하진 않지만, 내적으로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순응하지 않는 어떤 것들이 있다.” 제가 외적으로 되게 순둥이처럼 보인다고 해요. ‘세상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려 하거나 짓밟으려고 할 때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 않겠다, 나는 나를 지킬 의무가 있다’는 다짐으로 적은 거예요. 예전엔 스스로 보호하는 방법을 몰랐는데, 이제는 경험이 쌓이면서 나를 보호하는 경계가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강인해졌죠.
아역 출신이라 앳된 모습을 벗어나려 애쓰기도 했을 것 같아요.
이미지가 상충됐던 부분은 〈청춘시대〉 전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작품 전까지 저는 단아하거나 청순가련한 이미지였고,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워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청춘시대〉에서 제 나이대의 ‘송지원’을 화끈하게 연기하고 나니 이후에는 어려 보인다고 하는 분도 있어요. 반면에 그 전의 저를 기억 못 하는 분들은 “쟤는 왈가닥 캐릭터밖에 못 할 것 같다”라며 저에 대해 속단하기도 하죠. 저 자신도 제 한계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런 평가가 답답했어요. ‘정말 그 말이 사실일까’ 고민하며 깊이 파고들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고요. 신중하게 고민한다고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최선을 위해 나를 너무 무겁게 짓누르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좀 더 가볍고, 단조로운 삶을 살고 싶어요. 설령 누군가는 평범하다고 얘기할지 몰라도, 제 삶을 위해선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여유가 생긴 건가요?
저 스스로를 도마 위에 올리지 말고, 거리를 두고 나를 관조할 수 있는 태도를 갖자는 게 요즘 저의 생각이에요. 하하.
작품 선택할 때 기획 의도를 중요하게 본다던데, 맡은 캐릭터보다 중요한가요?
둘 다 중요하죠. 아무리 캐릭터가 매력 있어도 기획 의도가 좋지 않거나 반대로 기획 의도는 좋지만 캐릭터가 작품에서 드러나지 못한다면 긴 호흡으로 연기하기는 버거워요. 그래서 기획 의도를 먼저 보고, 이 배가 어디로 가느냐를 확인하고, 그다음에 어떤 선원인지 캐릭터를 확인하죠. 촬영 중간에 배의 방향이 달라지거나 캐릭터를 사랑할 수 없게 되면 힘들거든요.
심리학을 전공했는데, 이 학문을 배우길 잘했다 싶은 순간이 있어요?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저를 너무 잘 알게 돼 우울해진 감이 없진 않지만, 그게 성장통이라는 걸 여실히 느끼며 공부했어요. 그 덕에 20여 년을 살면서 화가 나도 그게 화라는 감정인지 몰랐던 것을 인지했죠. 스스로 억압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화를 표현할 줄 몰랐는데, 그 감정이 결국 온전히 저에게 돌아온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그걸 알고 나니 또 시시때때로 화가 많이 나더라고요? 하하하. 그런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그조차도 포용하는 능력을 길렀어요.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어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겠다 다짐해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버티는 것 같아요. 스트레스 받을 상황 자체를 피하거나,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그 경중을 가볍게 두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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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이 제 길이 아니라 느끼거나, 엄청 큰 상처를 받게 된다면 언제든지 훌훌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럴려면 자립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열심히 살았죠. 지금은 연기자로 현장에서 사람들과 호흡하고, 다양한 삶을 살아볼 때 느끼는 희열이 굉장히 소중하고 크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가 언제 프로 야구단 운영팀장이 돼보겠어요? 다양한 삶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요. 비로소 제가 연기자의 삶에 더 가까워진 것 같아요.
연기가 절실해진 건가요?
글쎄요. 미움받을 용기가 그리 크진 않지만, 전보다 더 진지하게 연기에 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연기는 내 삶’이라고 낭만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연기자는 제게 최고의 직업이란 걸 깨달았다고 할까요?
스스로를 책임감과 의무감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배우 박은빈은 작품에 들어가면 절대 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는 책임감이 있어요. 다행히 인간 박은빈도 천성적으로 모나거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 같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박은빈을 공으로 비유하면 뭔가요? 묵직한 볼링공?
가끔 스트라이크를 치는 볼링공? 하하하. 어쨌든 인간 박은빈은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해서 가족에게 늘 피해를 끼쳤어요. 그 시간만큼 가족들에게 보답하며 살아야 한다는 부채감을 느껴요. 연년생인 오빠는 늘 딸의 촬영장에 함께 오느라 엄마의 보살핌을 많이 못 받았고, 아빠는 그런 엄마와 저를 든든하게 서포트했어요. 엄마는 정말 많은 부분을 저에게 희생하셨죠. 그래서 치기 어린 마음에 옳은 방향이라 믿었던 길을 우회해서 가지 않겠다란 결심을 한 것 같아요. 아니라고 생각되는 길은 굳이 가고 싶지 않아요. 미래를 위해 삶을 꾸리다 보니 스스로를 옥죄고 있긴 해요.
그런 마음을 떨궈내고 싶을 때는 없어요?
“너 그렇게 살면 후회한다”란 말을 들으면 흔들려요. 내가 틀렸다는 말이니까요. 물론 다양한 경험을 해서 연기를 더 잘할 수 있을진 몰라도 제 삶에 도움이 되고, 좋은 길일까란 생각을 하면 아닌 것 같거든요. 사람들 말에 매몰되지 않으려 해요. 물론 해보지 않아서 후회할 순간도 오겠죠. 하지만 원치 않은 것을 했다가 ‘내 신념대로 살걸, 괜히 저 사람 말 들어서 불편하네’라고 후회하는 게 더 싫을 것 같아요. 맞아요, 전 꽉 막힌 사람, 우물 안 개구리일 수 있어요. 하하.
올해로 29살이 됐죠. 싱숭생숭해질 수도 있는 나이예요.
크게 생각하진 않아요. 저희 소속사 대표님이 모든 프로필에서 나이를 빼더라고요. 이유를 듣고 보니 정말 맞는 말 같아요. “배우한테 나이가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