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김보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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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 코스. 귀고리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아테네 영화제 최우수 각본상 수상 소식을 봤어요. ‘27관왕’이라는 숫자가 한국 영화 앞에 붙은 적이 있었나? 이런 반응 예상했어요?
시나리오 작업 단계에서 모니터링할 때 영화가 잘될 거란 예감은 있었어요. 다들 좋아하는 장면, 대사가 다 달랐거든요. 시나리오를 읽고 자기 이야기를 하다가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난 적이 부지기수였어요. 극 중 ‘은희’의 엄마 역으로 나오는 이승연 배우님은 시나리오 다 읽은 날 잠을 못 이뤘대요. 슬퍼서. 한편으론 아름답기도 해서. 그런 이야기들이 좋았어요.
‘은희’의 이야기를 언제, 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 궁금해요.
대학원에 다닐 때, 계속 중학교에 다시 다니는 꿈을 꿨어요. 그땐 ‘이걸 영화로 만들자’는 마음보단 ‘나한테 왜 자꾸 이런 마음들이 찾아오지?’ 하면서 친구들과 명상 모임을 갖고 나의 유년기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죠. 그 과정에서 떠오른 감정들, 에피소드가 모아지고 이어지면서 ‘은희’의 9살 시절을 다룬 단편 <리코더 시험>을 만들었어요. 나를 드러내는 일이 참 쉽지 않았는데, 다들 그 짧은 영화를 너무 좋아해줘 힘이 났죠. 관객들이 “은희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까? 너무 궁금하다”라고 많이 물어봐준 것이 <벌새>가 나온 가장 큰 원동력이에요. 지금은 “은희가 30대가 되면 어떤 모습일까?” 하고 물어봐요.
<벌새>를 본 사람들은 아름다운 대사들을 계속 곱씹어요. “난 내가 싫어질 때, 그 마음을 들여다봐. 아, 내가 지금 나를 사랑할 수 없구나”,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이런 언어들은 자신의 경험인가요?
스무 살 무렵부터 명상을 하고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많이 느끼고 배우고 체화한 문장들이에요. 명상에선 ‘바라봄’이라는 행위를 강조하거든요. 바라보면 사라진다. 예를 들어 내가 나를 싫어할 때, 그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면 그 마음이 사라져요. 20대 땐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안 돼 답답했는데, 30대가 넘으니 와닿더라고요. 바라보는 게 처음이자 끝이다, 영화 속에서 ‘은희’에게 이런 말을 해준 선생님 ‘영지’의 대사가 그렇게 나온 거예요.
뭘 바라봐야 할까요? 나를? 남을? 혹은 세계를?
모든 것. 숨을 마시고 내쉬는 것부터 일어나는 모든 감정을 바라보는 거죠. 나를 싫어하는 감정은 항상 찾아오잖아요. 그럴 때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질문이, ‘나한테 왜 또 이런 마음이 들지?’예요. 실은 이것도 자연스러운 감정이거든요. 그냥 ‘또 왔구나’ 하고 바라보면 돼요.
<벌새>가 더 좋은 건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되는 이 세계 ‘은희’들의 이야기 때문이에요. “희미하고 뿌옇던 나의 어떤 순간들을 명료하게 만들어준 영화”, “내 인생에서 스쳐 지나간 여성들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 영화”… 영화를 본 이들 사이에선 신드롬에 가까운 반응 같아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벌새>를 선보였을 때 제가 “‘영화 잘 만들었다’라는 말 대신 영화 보고 그날 밤 일기를 쓴다거나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스토리의 흐름, 인물을 관조하는 앵글, 긴 테이크 등등을 통해 이야기에 ‘공간’을 만들었죠. 그게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니까. 그 속도 안에서 관객들이 자신의 경험과 함께 영화를 완성하길 바랐어요. 그 의도가 이렇게 잘 전달돼 오히려 제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에요.
<벌새>를 보고 영화관을 나섰는데 그날 마주친 여성들이 조금 달라 보였어요. 그저 ‘남’이었는데 ‘우리’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걸 의도했나요?
“편지 같은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라는 얘길 한 적이 있어요. 제가 그런 마음으로 편지를 썼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여성들이 ‘아, 내가 잘못된 게 아니야’, ‘내가 나쁜 게 아니야’,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라는 위로를 받고. 그럼 또 그게 ‘나만 이상한 게 아니야’가 아니라 ‘쟤도 이상한 게 아니고, 얘도 이상한 게 아니고, 우리 다 이상한 게 아니야’ 하는 생각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요.
<벌새>는 무수히 많은 GV를 했고, 감독님은 관객의 반응을 아주 가까이에서 자주 접했어요. 남성들의 다양한 반응 중 짚고 싶은 것은 뭐예요?
기억에 남는 남자 관객들이 있어요.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을 항상 증명해야 하는 것이 힘들었고, ‘여자 같다’는 말을 종종 들은 어떤 분들은 왜 세상이 꼭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나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벌새>가 굉장히 위로가 됐다는 말을 해줬어요.
<벌새>는 잔잔하지만 꽤 강하게 ‘여성’의 삶, 우리가 내야 할 목소리를 알려줘요. 감독님의 세계에 영향을 준 ‘벌새’와 같은 존재는 누구예요?
제 삶에도 ‘은희’의 상처를 쓰다듬어준 ‘영지’ 같은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 ‘영지’들은 주로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여성의 얼굴’이 뭘까요?
경청하고, 서로를 알아주고, 바라봐주는 그런 것.
영화 속에 나온 질문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와 마주했을 때 저는 답을 곧바로 못 찾았어요. 감독님의 답은 뭐예요?
저는 삶에서 아름다운 순간이 되게 많았는데 굉장히 빛나는 순간이 오면 항상 제 안에 어두움을 가져오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 노력하거나. 근데 이제 그러지 않으려고요. 빛과 아름다움이 찾아오면 그걸 허용해주고, 거기에서 도망가지 않으려고 노력하려고요. 그런 나 자신을 바라보고, 행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요. 이제, 정말로.
사람들은 벌써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농염하고 관능적인 30~40대 여성이 아닌, 내가 생각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라고 말한 계획을 보면서, 김보라가 생각하는 ‘여자’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어요.
여성이 미디어의 영향이나 사회적 통념,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때 드러내는 그 민낯의 얼굴들이 너무 아름다워요. 저는 그걸 드러내고 싶어요. 진짜 본질적인 얼굴을 한 여성들. 내 얼굴, 우리의 얼굴을 한 진짜 여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