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피로 사회 |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KOREA)

엄마 말마따나 세상 살기 참 편해졌다. 욕망이 실현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몇 초. 터치 하나로 모든 게 이뤄진다. ‘디지털화’가 마냥 은총인 줄 알았더니, 가끔 지옥을 선사하니 문제다. 휴가 중에도 업무 재촉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습관처럼 들어가는 SNS는 종종 자괴감을 양산하는 화수분이 된다. 디지털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질병, ‘디지털 피로’의 단면이다. ::라이프, 디지털, 디지털피로, SNS,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 라이프,디지털,디지털피로,SNS,코스모폴리탄

세상이 좋아져도 너무 좋아졌다나는 SNS를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SNS 계정은 있지만, 마지막 게시물을 올린 게 작년 여름이다. 그마저도 일 년 만의 업로드였나? 아무튼 그랬다. 내가 SNS에 포스팅을 하지 않게 된 데는 무수한 이유가 있지만 그건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그런 내가 아침에 눈뜨자마자 침대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놀랍게도 SNS를 들여다보는 것임을 문득 깨달았다. 주변 사람들의 근황과 밤새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타임라인에 촤르르 펼쳐지니 개인 비서의 브리핑이 따로 없다. 나는 쇼핑을 좋아한다. 하지만 워킹맘의 궤적이란 집과 회사의 무한 도돌이표. 좀처럼 나를 위한 엔도르핀 발산의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하루에도 몇 개씩 도착하는 택배는 부지런히 나의 은행 잔고를 털어간다. 쇼핑 앱의 은총이다. 하루의 마무리는 언제나 ‘캔디크러쉬’. 뿅뿅 터지는 알사탕들과 함께 하루의 스트레스도 퐝퐝 터져나가는 것만 같다. 친목, 뉴스 업데이트, 쇼핑, 스트레스 해소, 이 모든 걸 ‘침대에서’ 가능하게 하는 전지전능한 그 이름 ‘스마트폰’. 아침부터 밤까지, 심지어 변기에 앉아 힘주는 동안에도 스마트폰은 나와 함께다. 어쩌면 애인보다 내 맘을 잘 아는 존재가 돼. 엄마 말마따나 세상 참 좋아졌다. 근 10여 년을 지배한 화두 ‘디지털’과 ‘모바일’ 덕이다. 아마도 우리 세대 남은 평생의 숙제일 이 두 단어. 마치 멈추지 못해 질주하는 ‘설국열차’ 같다고 생각했다. 혹은 들어올 땐 네 맘이지만 헤어나오기란 쉽지 않은 ‘호텔 캘리포니아’ 정도? 한번 디지털의 편리와 속도에 맛들이고 나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이 빠져들고 마니까. 터치, 스크롤, 스와이프만 몇 번 반복하는 새 마치 DNA에 입력이라도 돼 있던 양 익숙해지고 마는 이 ‘요물’ 덕에 말이다. 덕분에 우리의 일상은 더 편리하고 덜 지루해졌다. 터치 하나로 의식주와 관련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 알고 싶은 정보, 먹고 싶은 음식, 듣고 싶은 노래, 보고 싶은 영상, 하고 싶은 게임, 읽고 싶은 책, (엿)보고 싶은 그 사람의 일상까지, 욕망과 실현의 시차는 단 몇 초. 모든 게 거의 실시간으로 이뤄진다. 지식은 개방됐고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맘껏 펼칠 수 있는 미디어가 제공되며 공유 경제의 논리가 부지불식간에 삶에 스며들었다. 그 어떤 유능한 지도자도 쉽게 이루지 못하고 ‘2020 원더키디’도 예측하지 못했던 인류의 미래가, 지금 우리 손끝에서 펼쳐지고 있다. 엄마 말을 또 빌리자면,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 모든 게 오롯이 ‘내 의지대로’ 이뤄지다니!문제는 ‘내 의지’가 아닌 상황들이다. 직장인이라면 그런 상황은 많아도 너무 많다. 디지털의 소통 방식은 곧 ‘업무의 연장선’이 되기 일쑤. 퇴근 후에도 야근 중인 상사의 사소한 궁금증에 메신저로 일일이 답해야 하고 휴가 중에도 메일과 톡은 부지런히 울려댄다. 바로 확인하고 바로 답하지 않으면 또 쏟아지는 재촉 알람. 누구의 잘잘못이랄 것도 없이, 우리는 누구나 쉽게 공범이 되고 또 피해자가 된다. 세상이 좋아져도 너무 좋아졌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쉽고 빠른 만큼 쉽고 빠르게 들볶이며 쉬이 피로해지니, 디스토피아의 단면일 수도, 문명의 이기에 갖는 양가감정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질병의 이름, ‘디지털 피로’ 얘기다. 직장인들의 흔한 뒷담화거리로 회자되는 상사의 시도 때도 없는 ‘메신저 업무 지시’는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이로 인한 피로를 막기 위해 이미 픽사, 구글 그리고 페이스북과 같은 글로벌 기업이 ‘차단된 시간’이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프랑스에서는 2017년 1월에 근로자들에게 ‘차단할 권리’를 허락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직원이 50명 이상인 기업은 업무 시간 이후에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체크하거나 응답하라고 강요할 수 없게 하는 법이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법안이 발의된 지 오래지만, 지금 국회 꼬락서니를 보건대 현실화는 요원한 것 같다.SNS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디지털 피로를 양산하는 화수분 중 하나는 SNS다. 이건 다 같이 까고만 있을 수도, 법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 더 문제다. SNS를 ‘인정 투쟁의 소용돌이’라 정의한 문유석 판사의 말마따나, 그곳에는 저마다의 삶의 방식과 사상을 뽐내며 불특정 다수의 인정을 갈구하는 이들의 휘황한 이미지와 찬란한 텍스트가 넘쳐난다. 한참 들여다보노라면 남들의 삶은 이토록 풍요로운데, 남의 예쁘고 잘난 모습에 무표정하게 ‘좋아요’나 누르고 있는 내 팔자는 왜 이 모양일까 한심하고, 급기야는 서럽다. 회심의 게시물에 ‘좋아요’가 적게 달리기라도 하면 ‘미’, ‘양’, ‘가’로 빼곡한 통지표라도 받은 기분. 그런데 그 부럽고 화려한 SNS 속의 ‘주인공’ 또한 마냥 행복하지 않단다. 얼마 전 SNS계의 울트라초특급슈퍼스타 셀레나 고메즈는 “부정적인 말이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걸 기억하라”라는 멘트와 함께 소셜 미디어 활동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이미 그녀는 몇 번이나 자신의 계정을 지웠다 살렸다를 반복해왔다. 영화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서 아시아계 최초로 주연급에 이름을 올린 배우 켈리 마리 트란은  <스타워즈> 팬들이 올린 외모 비하와 인종차별적 댓글에 시달리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사실상 폐쇄했다. 트란은 한 매체에 “그들의 말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말을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아리아나 그란데와의 애정을 공개적으로 뽐낸 후로 온갖 악플에 시달리던 코미디언 겸 배우 피트 데이비슨도 “인터넷은 사악한 공간”이라며 모든 게시물을 삭제했다. 영국의 인플루언서이자 젊은 사업가로 배우 수키 워터하우스와 ‘팝앤수키’라는 브랜드를 론칭하기도 했던 포피 제이미는 화려한 소셜 라이프의 이면에서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고통받았던 자신의 경험담을 코스모폴리탄 영국판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녀의 사례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라서 경험하는 ‘밀레니얼 번아웃’의 전형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 모든 사례는 분명 극단적이긴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가상의 공간에 빠져 허우적대다 보면 어느새 승자는 사라지고 씁쓸함만 남는다는 사실이다. 분명 나 좋자고, 다 같이 재밌자고 하는 일인데, 실제론 아무도 행복한 이가 없다. SNS라는 공간과 SNS에서의 인간관계에 집착했을 때 벌어지는 일이라지만,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우리의 생활방식이란 ‘SNS 중독’과 자연스럽게 맥락을 같이하기 마련. 마냥 뒷짐 지고 바라볼 남의 일만도 아니다. 국내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1.9%가 일이나 공부를 하지 않을 때 주로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고 답했는데, 이는 2년 전의 같은 조사보다 10% 이상 증가한 수치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51.4%가 디지털 기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며, 디지털 디톡스에 관심이 있다고 답한 사람도 66.8%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게 ‘디지털 피로’가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방증하는 지표다. 얼마 전 애플은 iOS12를 업데이트하며 ‘스크린 타임’이라는 앱 사용 시간 제한 기능을 추가했다. 구글 안드로이드 9의 최신 업데이트에는 ‘디지털 웰빙’이라는 명목으로 앱 사용 시간에 제한을 두는 ‘앱 타이머’ 기능이 포함됐다. 스마트폰 중독과 디지털 피로증이 사회적 이슈로까지 대두되자 IT업계의 두 거대 공룡이 스스로 ‘스마트폰을 멀리하라’는 자충수를 둔 셈이자 자가 처방을 내린 격이다.나는 차단될 권리를 꿈꾼다이쯤에서 다시 내 얘기로 돌아가자면 내가 SNS를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나 또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게 너무 자명해서다. SNS로 활발하게 자신의 콘텐츠를 어필해야 마땅한 시대에, 무려 트렌드의 최전방에서 일하는 잡지사 에디터로서, 누군가는 도태됐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콘텐츠를 만드는 나는 SNS에도 좋은 콘텐츠를 올리고 싶다(직업병 맞다). 피처 에디터로서 내가 경험하는 좋고 아름다우며 즐겁고 새로운 것들, 즉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것들을 선별해 올리려 애쓸 것이다. 남들은 뭘 올려 얼마나 좋은 반응을 유도하는지 취재하듯 바라보는 통에 SNS를 들여다보는 시간은 곧 ‘일 모드’로 전환될 거다. 누군가를 만날 때도, 무언가를 경험할 때도, 이걸 어떻게 ‘멋지게 포장해서’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느라 정작 그 시간에 집중하기 힘들 것이다. 좋은 콘텐츠란 늘 그렇듯 이토록 시간과 노력, 즉 ‘품’이 든다(이건 게으른 나에게 가장 치명적인 점이기도 하다). 그렇게 열심히 만들어도 ‘좋아요’를 구걸하는 온갖 해시태그를 달지 않으면 그냥 일기장이며, 구걸용 해시태그로 범벅한 게시물은 ‘날 좀 봐주세요’ 광고하는 것 같아 낯부끄럽기 짝이 없다(체면을 중시하는 꼰대 기질이 있어 이 또한 치명적이다). 이 모든 과정이 쉴 새 없이 무한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혀온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게시물에 ‘진짜 나’가 담기기란 셀레나 고메즈 정도는 돼야 가능한 일 같은데 셀레나 고메즈도 정작 나가떨어지기만 수차례 반복하니 말 다했다. 어쨌든 나는 그 피로감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러니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택한 최선의 방법은 ‘차단’인 셈이다. 그럼에도 타인이 살아가는 모습과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너무도 궁금해 나는 하루에도 스무 번쯤 SNS 앱을 켜고 들여다본다. 그 어떤 능력자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다. 영혼의 안녕을 위협하는 게시물, 회사의 카톡 테러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건 결국 자신뿐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디지털 디톡스 열풍과 피처폰 사용량의 증가, 그리고 ‘라이트폰’과 같은 ‘덤폰’의 등장이 특히 밀레니얼 세대에게 환영받는 이유는 모두 이런 깨달음에 근거한다.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충분히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실행할 장치를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장치의 본질은 명료하다. 디지털 바깥에 실제하는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주인공은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