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지하철에서 초상권을 지키는 삶 |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KOREA)

혼자를 지키는 삶 by 김누나 | 싱글라이프,혼삶,지하철성추행,도둑촬영,불법촬영

12월의 이른 아침, 천안신창행 지하철 3번 칸에서 나는 혼자였다. 동료들에 비해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탓도 있었겠지만 일 자체가 워낙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라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전선에 나서는 장수가 칼날을 벼리듯 나는 출근할 때마다 검은색 아이라이너로 눈두덩을 시꺼멓게 칠하고 집을 나섰다. 아직 눈썹 문신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고, 나도 지금보다 6년만큼 더 부지런하던 때였다. 평소의 아침 지하철에서는 대방-신길-영등포역을 지나며 그날의 자장가 리스트를 선곡하고, 신도림부터 관악역까지 반쯤 깨고 반쯤 잠든 상태로 리드미컬한 열차의 진동을 느끼다가 안양-명학-금정역 구간에서 뜨는 해를 마주 보며 ‘오늘도 무사히!’를 다짐하는 게 혼자만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 12월의 이른 아침, 천안신창행 지하철 3번 칸에서 나는 요즘 말로 ‘멘탈 붕괴’ 상태였다. 아마 전날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놀았던 탓이었을 것이다. 세수하고 이를 닦고 겨우 선크림을 바를 정도의 시간밖에 없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는 뛰거나 걷지 말라는 방송을 귓전으로 흘리며 달려가 마침 문이 닫히기 직전인 지하철에 간신히 올라탔다. 벌거벗고 지하철에 탄 기분이었다. 지금 당장 다른 무엇보다, 눈썹을 그려야만 했다. 비몽사몽간에 들고 나온 파우치에 눈썹 연필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천만다행으로 당황한 손끝에 눈썹 연필이 집혔다. 오른손에 눈썹 연필을, 왼손에 거울을 들자 열차가 역에 멈춰 섰다.남자 역시 혼자였다. 남자는 영등포역에서 3번 칸에 탄 유일한 사람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내가 앉아 있던 맞은편 바로 가까운 출입문 앞에 있었다. 그는 내 맞은편 왼쪽으로 세 자리 떨어져 앉았다. 뜻밖의 불청객이었다. 그럼에도 입을 반쯤 벌리고 인중을 길게 늘여 파운데이션 퍼프를 두드리거나 립스틱을 바르는 게 아니라면 눈썹 그리는 것 정도야 크게 흉하지 않을 것이고, 신도림 지나 구로역 즈음에서는 마칠 수 있을 것이었다. 눈썹 그리던 손을 늦추고 곁눈질로 남자를 보자, 그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는 출근길 분주한 민얼굴의 여자를 흉하다거나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왼쪽 눈썹을 다 그리고 거울을 든 왼손을 오른쪽으로 옮기는 순간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의 사진 촬영음이었다. 그 아침은 분주하기는 하지만 평온한 출근길이 될 수 있었고, 남자는 건전하고 양식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거나 아무 인상을 남기지 않고 잊힐 출근길의 행인 1이)될 수 있었다. 그때 못 본 체했더라면. 남자는 어느새 휴대폰을 기울여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상황은 명백했다. 남자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라 생각하고 그의 휴대폰 메모리 일부에 나를 저장한 것이다. 양손에 든 것을 무릎에 내리고 남자를 쏘아보았다. 남자는 휴대폰을 다시 자기 몸 앞으로 하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향했다. 졸음이 싹 달아나면서 부글부글 끓는 것이 서서히 올라왔다. 거울과 남자에게 번갈아 눈길을 향하며 재빨리 오른쪽 눈썹을 마저 그렸다. 신도림역에서 꽤 많은 사람이 열차에 탔고 남자가 시야에서 가려졌다. 열차는 조용했고 머릿속은 소란스러웠다.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전쟁을 시작해야 하겠구나’ 생각했다. 기습 공격으로 전쟁을 선포했으니 남자 역시 호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면 명학역에서 보디블로를 날린 뒤 금정역에서 열차를 떠나야 했다. 즉 남자가 금정역 이전에 내려서는 안 됐다. 남자는 부적절한 행동에 창피를 당하고 주변 사람들 역시 잘못된 행동의 호된 대가를 목도하게 될 것이었다. 신도림에서 명학역까지가 그토록 길게 느껴진 적은 그날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명학역에서 출입문이 닫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앞에 섰다. 다가가는 기색을 눈치챈 듯 시선을 슬그머니 내리던 그의 얼굴 앞에 공무원증을 내밀었다.“아저씨, 아까 제 사진 찍었죠? 그거 성폭력 특례법상 카메라등이용촬영죄로 처벌될 수 있는 거 알아요? 휴대폰 제 쪽으로 향하고 있는 거 봤고 사진 촬영음 나는 것도 들었으니까 아니라고 말해봤자예요. 제가 경찰이거든요? 아저씨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도 있지만 나도 출근길이 바쁘고 아저씨도 창피할 테니까 확인하자고는 안 할게요. 당장 지우세요. 알았어요?”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고치고 다듬은 문장을 쏟아내는 동안 남자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내 말이 끝나자 남자는 눈을 피하며 불안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이 손 저 손에 옮기다가, 뭔가를 웅얼대며 마침 금정역에 도착해 열린 출입문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사실 그때 남자가 중얼거리던 것이 미안하다는 이야기였을지, 눈썹 연필을 쥐고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던 내 사진을 지웠을지 아직껏 잘 모르겠다. 다만 그때 깨닫게 된 것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언급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눈썹을 그리는 것이 적절한 행동인지는 논외로 하겠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 누구도, 남자의 행동이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거나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될 흉한 짓인 ‘눈썹 그리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라고 하지 않았으니. 내가 남자에게 그랬듯 남자도 순순히 나의 혼자임을 존중해주었더라면 그 아침의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실제로는 현행 형법상 ‘초상권침해’를 처벌하는 규정은 없고,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신체 부위에 대한 촬영인지 여부에 따라 ‘카메라등 이용촬영죄’로 처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