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서핑의 찐 매력은 무엇? 서핑이라는 스포츠가 가르쳐준 삶의 가치

물과 파도 그리고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세계. 서핑이라는 스포츠에서 발견한 삶의 단단한 가치에 대하여.

프로필 by 천일홍 2025.07.31

서핑을 하던 중, 바다 위에서 소나기를 만난 적이 있다. 일기예보에 없던 비. 서핑을 처음 배우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눈꺼풀과 뺨에 떨어진 빗방울이 살짝 아릴 정도로 불규칙하고 세찼던 비는 곧 잔잔한 리듬을 되찾아갔다. 그때 바다엔 나를 비롯해 20명 정도의 서퍼가 있었는데 여럿 서프보드 위로 토도독토도독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재즈 드럼 소리처럼 들렸다. 서핑을 하기 위해선 파도가 부서지기 직전의 일정한 바다 위 지점까지 나아간 뒤 대기하며 파도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곳을 ‘라인업’이라 일컫는다. 라인업과 해변의 거리는 대략 40~50m 정도 될 것이다. 해변 쪽을 바라보니 옷이 젖어 곤란해진 사람들이 부산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다시 내가 있던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비를 피해 달음질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철썩. 비가 오든 말든 상관없이 파도는 묵묵히 부서졌고, 오히려 이전보다 신이 난 서퍼 몇 명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파도를 쫓아 달려가고 있었다. 서핑과 바다, 물에 관한 좋은 기억이 몹시 많지만, 나는 비에 젖은 이 보드라운 장면을 특히 좋아한다.

서핑 덕분에 내가 물을 무척 좋아한다는 걸 깨닫게 됐다. 아주 최근의 일이다. 실은 무얼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살았다. 아니, 잊고 살았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서핑을 시작하고 심하게 갈증이 난 사람처럼, 바닷물을 다 마셔버릴 기세로 매일 바다에 뛰어들어갔다. 새벽 4시에도 가고 해가 질 때까지 서핑을 했다. 부산 송정 바다에 파도가 없으면 다대포에 갔고, 그래도 없으면 포항 신항만이나 월포해수욕장에 갔다. 그래도 파도가 마땅치 않으면 차를 몰아 영덕에 갔고, 또 언젠가는 양양까지 떠나기도 했다. 아티스트 레지던시 활동 때문에 아이슬란드에서 몇 달 지냈는데 서핑이 너무 하고 싶어 활동이 끝나자마자 곧장 모로코에 가서 한 달 동안 서핑만 하며 지낸 적도 있다. 물속에 있으면 어쩐지 편안했다. 누군가의 전화도 메일도 없는, 오롯이 느낌에 의지하고 맨몸으로 디뎌야 하는 나의 불완전한 세계. 나는 한동안 그곳에서 듣고 싶은 연락 대신 파도를 기다렸다. 어떤 사실은 알아차리고 나면 인생의 경로를 꽤 쉽고 명료하게 틀어놓기도 한다. 좋아하는 것이 명확해졌으니 이제 그곳으로 가면 될 일이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좋은 옷이나 차를 사는 것이 아니라 좋은 마음으로 바다에 뛰어들어갈 수 있는 여유가 근사함의 기준이 됐고, 시간과 돈이 생기면 백화점이 아니라 점점 더 자연을 향해 쏟기 시작했다.

서핑을 시작하고 나서 초반 몇 달은 “서핑한다”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그저 계속 물에 빠져 바보같이 허우적대고 있기 마련이다. 겨우 마음에 드는 파도를 잡아봐야 서프보드 위에서 중심을 잡으려 버티다 결국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다 커서 누군가에게 등짝 맞을 일이 있던가? 풍덩, 풍덩, 꼬로록, 푸웅덩… 파도가 부서지는 곳 아래에서 허우적대다 보면 파도에 뺨도 맞고 등짝도 짝짝 맞는다. 좀 변태 같지만 서핑이 수련으로써 정말 좋은 운동임을 누군가에게 설파할 때 매력 포인트로 반드시 짚는 부분이기도 하다. 신체의 움직임 속에서 과도하거나 혹은 부족한 에너지를 잘 가다듬지 않으면 이렇게 파도에 금세 메치기를 당하기 마련이니까. 오만한 마음이나 쓸데없는 고집 같은 걸 바다에 들고 갔다간 여지없이 함께 고꾸라진다. 그렇게 매일 파도에 쥐어뜯기고 맞다 보면(?) 희한하게도 어떤 자극이나 충격을 통해 몇몇 기억이 또렷이 되돌아오기도 한다. 뿌옇게 멀어졌다가 선명히 가까워진 장면들,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건 유년의 여름. 그곳에서 난 물가에 서 있다. 그리고 몇몇 행복한 기억들도 그 물가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곳엔 젊은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어린 동생도 있는데, 우리는 서로를 향해 시름없이 웃고 있다. 무려 25년 만에 되돌아온 기억. 기억 속 냇가에서 돌을 베고 올려다본 밤하늘엔 별빛이 가득하고, 사랑이 놓여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냇가와 물소리는 나의 오랜 제자리였다.

서핑은 서프보드에만 의지해 맨몸으로 파도를 붙잡아 함께 춤을 추는 운동이다. 파도를 만나기 위해선 자연스레 양 손바닥을 펴고 노 젓듯 물살을 헤쳐가야 한다. 게다가 물에 빠졌을 때 어떻게든 수면 위로 다시 올라와서 숨을 쉬어야 하니 생존과 환희에 집중하게 된다. 제아무리 나쁜 마음을 먹고 있더라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면 본능적으로 수면 위로 손을 뻗는다. 그러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감각, 들숨과 날숨, 생존에 대한 열망 쪽으로 점점 자신을 둔다. 마음의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다. 나도 잠시 마음이 아팠을 때 유난히 자주 바다에 들어갔다. 평소보다 파도가 높은 날엔 몹시 겁도 났지만, 아득바득 버티고 맞섰다. 위치에너지는 운동에너지와 같다. 파도가 높을수록 부서지는 힘도 크다는 뜻이다. 더 높고 날 선 파도에 일부러 뛰어든 적이 많다. 그러나 덤빌 때마다 나는 다시 뭍으로 세게 내동댕이쳐졌다. 땅에서 벗어나려는 나의 최선만큼 바다는 다시 내가 살아가야 할 곳으로 있는 힘껏 되돌려 보냈다. 그런 날엔 온몸에 힘이 빠져서 한참 해변에서 숨을 헐떡거리다가 집으로 되돌아가곤 했는데 사실은 조금 안도했다. 뭍은 바다를 통해 알게 된 나의 또 다른 제자리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몸도 마음도 점점 단단해지는 일 같다. 확실한 직장, 결혼 같은 확실한 관계, 나와 관련한 확실한 것의 정량적 모음을 성숙의 징표로 여겼다. 울음과 웃음 사이의 진공상태를 편안함이라 믿게 됐다. 애써 웃지 않고 울 일도 만들지 않는 것을 지혜라 여기면서, 내 손안에 운 좋게 들어온 작은 무언가를 혹여 놓칠세라 꽉 주먹을 쥔 채 살아가고, 웃음과 울상 사이, 애매한 눈매와 입꼬리를 지닌 채 굳어갔다. 그러나 물과 모래는 움켜쥘 수 없기 때문일까, 서핑할 땐 모든 게 물렁물렁해진다. 세계가 쉬이 흐트러진다. “꽃은 피는 것이 아니다, 찢겨진 허공에서 새어 나오는 것일 뿐”이란 이은규 시인의 ‘별무소용’ 시구를 좋아한다.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잊혀질 뿐. 결점이라 생각해 애써 메꾸어온 빈틈들이 실은 나의 봄이었고 기쁨이었는데 그걸 미처 모르고 살았다. 무르고 흐트러진 허공 사이로, 연약하고 보드라웠던 시절의 마음을 본다.

서핑을 하지 않는 날에도 해변에 가길 좋아한다. 해변에 가만히 앉아서 파도를 관찰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서핑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응원하기도 한다. 언젠가 여느 때처럼 서퍼들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파도를 딛고 일어난 서퍼들이 모두 환하게 웃고 있다는 것. 눈동자에 윤슬이 스민 듯 정말 무구한 표정이다. 며칠 뒤 서핑을 마치고 문득 거울을 보니 나 역시 그들과 조금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아주 오래전에도 내게 이런 표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괜스레 기분이 묘하고 좋아서 거울을 오래 보았더랬다. 그 얘기를 같이 서핑하는 친구들에게 했더니 자신도 마찬가지로 서핑할 때 저절로 웃게 돼서 더 좋아하게 됐노라 고백했다. 알고 있다. 고작 운동 하나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는 없다. 그저 내 하루 중 몇 분을 달리 보내는 것일 뿐이라는 걸. 그러나 내가 바다에 스며든 시간만큼 점점 하루가 달라진다. 서핑을 마친 뒤 습관처럼 쓰레기를 줍게 됐고 바다 위에서 만난 사람과는 반드시 웃으며 인사를 나누게 됐다. 자주 웃게 됐다. 사소한 것에 기뻐할 줄 알게 됐다. 바다의 일이 곧 나의 일이 되고 자연을 향하게 되는, 고작 그 몇 분이 삶의 내용을 차츰 바꾼다. 손바닥을 뻗으면 느껴지는 생생한 파도의 감촉 속에 달라진 미래가 있는 것만 같다.

나를 제자리로 끌어다준 서핑은 나의 사랑, 나의 친구, 나의 열망, 겸손을 가르쳐준 선생님, 어쩌면 오래전 나의 어머니가 아닐까? 그러니 우리, 오늘은 함께 놀지 않을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동이 트는 바다 위에서.


Writer 안수향 | 글과 사진, 가장 좋아하는 것 2가지를 일로 한다. 수필집 <서툴지만 푸른 빛> <오래된 미래> <아무튼, 서핑>을 썼다. 경주에서 소박한 찻집 ‘아차차’를 운영 중이다.

Credit

  • Feature editor 천일홍
  • Writer 안수향
  • Photographer 안수향
  • Art designer 장석영
  • Digital designer 장석영

MOST LIK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