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그게 사랑이라고 얘기했지만... 사실은 '파트너 폭력'이라고? || 코스모폴리탄코리아 (COSMOPOLITA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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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그게 사랑이라고 얘기했지만... 사실은 '파트너 폭력'이라고?

그건 사랑이 아니야. 대신 ‘파트너 폭력’이라고, 사랑이란 이름의 학대를 일컫는 딱 좋은 표현이 따로 있지.

COSMOPOLITAN BY COSMOPOLITAN 2022.02.10
 

나 컨버스 스니커에 PTSD 있잖아

새 신발을 샀다. 초록색 컨버스 척 테일러다. 점원에게 카드를 건네는 순간까지 구매를 망설인 건 구 남친의 잔재다. 컨버스를 신으면 “너는 컨버스 신으면 안 예쁘다니까? 내가 ‘너는 반스’라고 말했는데 왜 컨버스 신었어?” 하며 진심으로 화내던 남자와의 연애가 무의식에 남긴 조건반사랄까. 컨버스는 하이가 국룰인데, 왜 ‘상의도 없이’ 로우를 샀냐고 펄쩍 뛰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사람 말 참 안 듣지.” 이 남자는 자주 그리고 창의적인 이유로 화가 났다. 그는 출장에서 돌아오던 날, 본인 집에 먼저 도착한 내가 건조대에 널린 빨래를 걷어 개놓지 않아 분개했고, 본인이 싫어하는 친구와의 약속을 깨라는 땡깡을 묵인해 폭발했다. 그때마다 ‘내가 너였으면’, ‘내가 싫다는데’, ‘내가 널 아끼는 만큼 너도 나를’이라는 합당한 비논리가 뒤따랐다. 불편함을 피하기 위한 습관적 사과와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던 피곤한 연애가 진짜 마침표를 찍은 건 잘해보자는 의미에서 그에게 선물한 책 한 권 ‘덕분’이다. 정신분석가이자 심리치료사인 로빈 스턴이 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책으로, 친밀한 관계에서 심리적으로 상대를 조종하려는 정서적 학대인 ‘가스라이팅’을 최초로 규정한 심리서다. 자신의 관심과 사랑에 감히 정신병리학 용어를 적용해 상처를 줬다는 이유로 나는 ‘더 이상은 못 만날 년’이 됐다.
 

가스라이팅이 〈그알〉에만 나오는 얘기는 아니거든

“상대의 행동이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면서도 정확히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몰랐어요.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을 접하니 확 와닿더라고요. 근데 좋을 때는 또 잘해줘요….” 파트너 폭력을 토로하는 여성들의 공통점이다. 나 역시 지난 연애에서 다툰 일보다는 상대에게 사랑받고 의지했던 기억이 더 짙게 남아 있다. 가스라이팅의 가장 혼란스러운 지점이 여기에 있다. 임상심리 전문가이자 〈가스라이팅〉의 저자 스테파니 몰턴 사키스는 “그가 항상 나쁜 건 아니다”라는 대목을 중요하게 지적한다. 가스라이터는 자신의 집착적인 행동으로 연인이 멀어진다 싶을 때 상대를 다시 흡입하는 ‘후버링’을 한다는 것. 지극정성으로 애정 공세를 쏟아부으며 상대가 좋아할 만한 무언가, 상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어떤 계획을 약속하며 연인을 움켜잡는다. 이런 후버링은 연애 초기의 밀당만큼이나 마음을 잡아끌기 때문에 후버링이 반복되면 ‘상처 주고 사과하는’ 상대의 태도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그가 싫어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화가 났을 거야’, ‘내가 참고 사과하면 싸울 일 없지 뭐’ 모두 가스라이팅의 익숙한 패턴이다. 무엇보다도 가스라이팅이 위험한 이유는 피해자 대부분이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책과 뉴스로 접하는 가스라이팅은 주로 ‘매운맛’이다. 현실 연애에서 일어나는 가스라이팅은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올 법한 사건 사고가 아니기 때문에 일상적인 사랑싸움으로 여기고 넘어가기 쉽다. 하지만 상대가 100%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나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감정 폭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맵든 순하든 우리를 ‘쎄~’하게 만드는 심리적 학대는 분명 마음에 건강하지 않은 자국을 남기니까. 누군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상처 주려 할 때, 적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안전 이별’ 검색하는 여자들

경중을 떠나 연인 간의 감정 학대에 촉수를 세워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가스라이팅이 파트너 폭력 범죄의 전조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파트너 폭력이 심리적인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육체적 학대나 이별 살인 같은 강력 범죄로 이어지는 결말을 맞이하기도 한다. 고 황예진 씨가 교제 중이던 남자 친구에게 폭행당해 사망한 마포구 교제 살인 사건, 헤어진 여자 친구의 집을 찾아가 당사자는 물론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일가족을 살해한 김병찬 사건, 그리고 최근 1월 13일 천안에서 20대 남성이 이별을 통보한 동거녀를 흉기로 살해한 사건까지, 지난 1년간 교제 살인으로 여성이 희생된 강력 범죄가 끊임없이 잇따랐다. 가스라이팅을 이별 범죄의 조짐이라 경계하는 것을 유난이라고, 여성이 이별 전에 ‘안전 이별 수칙’을 검색하는 것이 상대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처사라고 가벼이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열흘에 한 번꼴로 교제 살인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더 무서운 건 데이트 폭력이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폐쇄적인 범죄라는 대목이다. 연인에게 학대당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서, 이렇다 할 도움을 받을 기관을 찾지 못해서 등 말 못 할 이유로 연인 간 학대를 ‘둘만의’ 비밀로 쉬쉬하는 피해자가 많은 게 현실이다. 〈코스모폴리탄〉이 2022년 1월 7일부터 11일까지 〈코스모폴리탄〉 웹사이트와 SNS를 통해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응답자 224명 중 47.2%가 파트너 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했으니, 2명 중 한 명은 크고 작은 파트너 폭력을 경험한 셈이다. 경찰이나 한국여성의전화 같은 공적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답한 사람은 그중 무려 90%에 달하며, 64.4%가 “신고해도 안일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12.2%가 “파트너 폭력을 잘 몰랐고, 우리끼리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해서”라고 응답했다.
 
 

사랑을 계속 사랑하기 위하여

연인 간의 폭력이 사적인 영역이 아닌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호해야 할 문제로 확대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많은 전문가가 현상에 대한 올바른 이름을 명명하는 것에서 파트너 폭력에 대한 인식 개선이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108건의 교제 살인 사건 판결문을 분석한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의 저자인 오마이뉴스 이주연·이정환 기자는 연인 간의 폭력 범죄를 ‘데이트’ 폭력이 아닌 ‘교제 살인’으로 호명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데이트’라는 말은 아주 오랫동안 낭만적으로 쓰여왔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트 폭력이라는 말은 가까이 지내던 상대방의 폭력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 심각성을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배우자 간의 폭력은 가정폭력처벌법으로 처벌 가능하지만, 연인 간 폭력에 관한 단일 법안은 없다는 현실도 궤를 같이한다. 제도적인 합의로 이루어진 커플에 국한되지 않고, 누구나 파트너의 위협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파트너 폭력’이라는 개념으로의 인식 확장이 필요하다. 파트너 폭력을 예방하는 대전제는 스스로를 지키며 사랑에 임하는 개인의 마음가짐이다. 로빈 스턴 박사는 가스라이팅의 본질에 대해 피해자 역시 가해자와 정서적 학대에 공동 책임을 진다고 설명한다. 파트너의 학대에 대해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거부하지 못한다면, 피해자 역시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가해자에게 보여주고 인정받으려 애쓰는 비정상적인 관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사랑을 할 때도 가드를 올려야 하냐”는 물음에 그렇다 말하려니 삭막하지만, 어쨌든 현실은 이토록 씁쓸하다. 애석하게도 파트너 폭력의 싹을 알아보는 나만의 리트머스를 정립하고, 호신술을 배우듯 대처법을 익혀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나를 더 사랑하기 위해, 연애를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오랜 믿음을 계속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Check List

침대 위에서 존중받고 있나요?


“너무 공허해요.”
□ “그 사람은 나를 보는 것 같지 않아요.”
□ “너무 공격적이에요. 마치 나한테 화난 것 같아요.”
□ “자기 마음대로만 해요. 난 그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하고요.”
□ “내가 좋은지 안 좋은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 “그 사람이 원하는 게 있는데, 그걸 하지 않으면 미친 듯이 화내요.”
 
*심리치료사이자 〈그 남자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의 저자 에이버리 닐에 따르면 육체적 학대의 전조는 육체적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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