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남자, 송해 || 코스모폴리탄코리아 (COSMOPOLITA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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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남자, 송해

1927년생 송복희는 “바다처럼 많은 이야기를 품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송해가 세상의 모든 딸에게 보내는 응원이 담긴 인터뷰,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이들이 전해온 송해의 의미.

하예진 BY 하예진 2021.11.29
대한민국 최고령 ‘현역’ 연예인, 송해. 100세를 바라보는 하얀 머리 아들은 영원한 안녕인 줄 모르고 어머니께 “다녀올게요” 했던 순간을 생의 가장 안타까운 장면으로 꼽았고, 34년 전 가슴에 묻은 아들의 자작곡 테이프를 뒤늦게 재생한 아버지의 얼굴에는 만 가지 감정이 엄습했다. 딴따라, 코미디언, 아버지, 아들, 그리고 40년 넘게 〈전국노래자랑〉을 이끈 일요일의 남자. 94세 송복희 인생의 딩동댕과 땡을 그린 다큐멘터리 〈송해 1927〉이 11월 관객을 만난다. 매주 일요일 낮 12시 10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킨 국민 MC가 무대를 떠나며 관객에게 부치는 헌사가 1시간 22분 29초의 영상에 담겼다. 영화의 진짜 엔딩은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간 뒤에 등장하는 쿠키 영상이다. 녹음실에서 자신이 직접 가사를 붙인 노래 ‘딴따라’를 구성지게 뽑아내는 마지막 장면은 또 무엇이 되어 만나자는 약속처럼 가슴을 두드린다.
하하, 수~고했어요~.
송해가 머쓱한 미소와 함께 스튜디오를 떠나고 진짜 막이 내리면, 그 모든 감상에 앞서 관객의 가슴 위로 ‘송해’라는 이름 두 글자만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송해가 말하다

1927년생 송해의 삶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한국 근현대사기도 합니다. 〈송해 1927〉의 캐치프레이즈 “인생, 땡도 있고 딩동댕도 있는 거지”처럼 무수한 땡과 딩동댕을 겪으셨을 것 같아요. 선생님이 꼽는 인생의 땡과 딩동댕은 언제입니까?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지금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영화배우가 됐지 않습니까. 매 순간이 나에게 딩동댕이지요. 앞으로도 계속 딩동댕을 맞이하기 위해 도전을 멈추지 않을 계획입니다. 내 인생의 땡이라면 유랑 극단 시절 예인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쳤던 시절이겠네요. 당시 건강을 잃고 병원에 6개월 정도 입원하기도 하고, 남산 팔각정에 올라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빌고 또 빌면서 눈 꼭 감고 뛰어내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게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지금 이 자리에 올라 이렇게 많은 사람과 만나는 것을 보니 좋은 일이 있으려고 힘든 일도 있었나 보다 싶네요. 언제나 땡이 있으면 딩동댕도 있는 법이지요.
 
 
40년 이상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셨어요. 출연자와의 자연스러운 교감을 위해 큐카드(대본)를 일부러 안 쓰신다고요. 그럼에도 대화를 이끌어가는 순발력과 유머가 대단하신데요, 부드럽고 따뜻한 송해식 유머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큐카드를 쓰지 않기 위해 사전에 철저히 공부를 합니다. 대본을 몇 번씩 다시 보며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기도 하고….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현장의 장면들을 미리 그려보는 거죠. 〈전국노래자랑〉 촬영을 할 때면 대기실에 있는 출연자들을 미리 찾아가 이야기를 나눕니다. 출연자들이 리허설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따로 불러 의견을 주기도 하고요. 이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는 사람은 같은 무대에 1백 번 서도 1백 번 긴장하게 됩니다. 관객이 단 한 명 있더라도 1만 명이 앞에 있다는 자세로 대하니까요. 나는 매일 하는 일이지만 관객은 매번 달라지거든요. 그러니 그날 관객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무대에 올라야죠. 지금도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늘 긴장하게 돼요.
 
 
예인의 길이 험난해 포기하려 했던 적도 많다고 하셨어요. 지나고 나니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오래 하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든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였나요?
관객들이 좋아해줄 때죠. 세상에서 제일 부자는 사람 부자라고들 하는데 그게 바로 나입니다. 많은 사람이 현장에서 호응해주고, 길에서 마주치면 건강하라며 응원해주고, 관객들이 변치 않고 호응해줄 때면 더없이 기쁘지요. 아무것도 없던 제가 여러분과 살다 보니 이렇게 집중도 받고, 잘 못하는 노래라도 한 곡 부르면 박수 쳐주시고, 무슨 말을 하면 웃어주시고. 제가 어디 가서 이런 큰 보람을 느끼겠어요. 이 보람을 가지고 사는 한 보답을 해야 한다, 한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27년생, 만 94세. 대한민국 최고령 ‘현역’ 방송인이세요. 이순재 선생님조차 ‘송해 선생님’이라 부를 정도로 모두의 ‘선생님’으로 존경받고 계신데요, 송해가 있기 전엔 마냥 꿈 많던 어린 송복희(본명)가 있었겠지요. 송복희의 젊은 날을 떠올리면 어떤 장면이 기억에 남으세요?
마지막으로 북에서 잠깐 피신 나올 때 어머님께 “저 또 다녀올게요” 하고 나왔습니다. 그때 그게 마지막인 걸 알았으면 제대로 된 인사라도 하고 나왔을 텐데…. 그때는 마지막이 될지 몰랐습니다.
 
 
송해의 인생에서 변치 않는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을 때만큼 즐겁고 기쁜 순간이 없어요. 즐겁고 기쁘다는 건 만족을 느꼈을 때 드는 감정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일을 원 없이 다 하고 끝내기보다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있을 때 내가 하고픈 일을 새로 찾아보고 싶어 하는 게 사람 마음이지 싶어요.
 
 
선생님은 여전히 꿈꾸고 계신가요?
지금도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데 더 이상 무슨 바람이 있겠습니까. 그저 건강해서 끝까지 여러분 앞에 꿋꿋하게 서는 것이 제가 누릴 수 있는 복이자 꿈이라 생각합니다.
 
 
송해 개인의 삶에서는 두 딸의 아버지자, 할아버지시죠. 국민 MC 송해를 국민 할아버지로 여기고 응원하는 수많은 아들딸, 손주들도 있고요. 코스모 독자인 2030 딸들에게 전하고 싶은 덕담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딸들아, 환경에 굴하지 말고 꿈을 펼쳐라. 지금은 나 때와는 달리 여성들에게 기회가 많아지고 그들의 역할이 중요해진 시대지요. 자신의 꿈을 정확히 설정하고, 주눅 들지 말고 꿈을 펼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송해로서는 3세부터 115세까지에게 ‘영원한 오빠’이고 싶어요. 그게 제일 편합니다.
 
 
국민 MC, 사람 송복희를 떠올릴 때 사람들이 ‘송해’라는 이름을 어떤 의미로 기억해주었으면 하나요?
송해라는 이름은 북을 떠나 남으로 배를 타고 오면서 바다 위에서 지은 이름이에요. 딴따라의 꿈을 펼치기 위해 남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겪기도 했죠. ‘힘들어도 늘 꿈을 위해 살아온 사람’, 그리고 또 ‘바다처럼 많은 이야기를 품었던 사람’으로 송해를 떠올려주었으면 합니다.
 
 

송해를 말하다

송숙연(송해 둘째 딸)
어릴 적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실 때 항상 과자나 먹을 걸 사다주셨어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지만 그게 기억에 많이 남네요. 2018년에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종종 저희 집에 놀러 와서 식사하고 가세요. 아침에 누룽지 드시면 속이 편하시다며 숭늉에 찌개와 밑반찬 곁들여 드시는 걸 좋아하세요. 요즘은  아버지가 많이 늙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연세가 많으시다 보니 집을 나설 때 화장실 불을 켜놓고 나가시더라고요. 뭔가 비뚤어지면 꼭 제자리로 정리하시는 성격이라 예전에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거든요. 그럼에도 여전히 아버지는 강하신 분이세요. 자기 관리를 잘하시고요.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세요. 그냥 그 자리 지키시면서 버팀목처럼 계신 것 같아요.
 
 
윤재호(〈송해 1927〉 감독)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선생님이 돌아가신 아들의 노래를 생애 처음으로 듣게 되는 신이었어요. 생전에 가수를 꿈꿨는데 선생님이 반대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둘째 따님이 보관하고 있던 자작곡 녹음 테이프를 발견해, 1987년 이후 처음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셨죠 모든 스태프가 촬영 장소부터 조명, 미술 세팅까지 신중하게 준비했어요. 그날 선생님이 많이 우셨고, 저희 제작진도 눈물을 참기 어려웠습니다. 선생님의 가장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던 순간이었지요. 선생님 당신께는 자신도 모르고 살았던 이야기를 통해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됐던 것 같고요. 우리 모두 살아가면서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도 하고, 과거의 실수를 통해 현재를 깨닫곤 하잖아요. 작품을 만들면서 송해 선생님과 그런 감정을 함께 경험하고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신재동(〈전국노래자랑〉 악단장)
송해 선생님은 타인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자애롭지만 스스로에겐 무서우리만치 철저한 분, 홀로 북을 떠나 남녘땅에 오셨기에 때론 한없이 고독하고 외롭지만 늘 힘이 넘치는 음성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시는 분, 인생을 살면서 배우고 싶은 영원한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분입니다. 연예인으로서는 연기력, 음악성, 가창력을 두루 갖춘 만능 탤런트라 감히 말하고 싶고요. 어려서부터 악극단을 거치며 다진 연기력과 타고난 음악적 재능, 뛰어난 노래 실력, 그리고 재치 넘치는 위트와 순발력으로 출연자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탁월한 진행자시니까요.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이 완벽한 희극인이세요. 선생님과 함께한 추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 전북 진안에서 있었던 이야기인데요, 그때만 해도 송쌤의 술 타임이 최고조를 이루던 시기였지요. 여의도에서 출발해 오후 3시 반쯤 진안에 도착하자마자 읍내 시장에서 조촐한 안주로 시작한 술자리가 새벽 2~3시를 넘겼습니다. 술과 졸음에 지친 단원들이 하나둘씩 도망가기 시작했고, 이를 눈치챈 송쌤이 숙소에 찾아와 일일이 방문을 여셨죠. 방문이 잠겨 있자, 프런트로 내려가 마스터키를 입수하고는 숙소 방을 뒤져 옷장 속, 화장실 욕조에 숨어 있던 단원들을 몽땅 다시 집합시켰습니다. 빈속에 그냥 자면 속 버린다고 새벽 우동 한 그릇씩 챙겨 먹이시려고요.(웃음)
 
 
승희(오마이걸 멤버)
송해 선생님과의 추억 한 조각을 나눌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처음 송해 선생님을 뵌 건 2007년 〈전국노래자랑〉 인제 편에 출연했을 때예요. 그때 선생님의 온기와 향기,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제게 ‘정선아리랑’을 부르게 하시고는 “함께 짝을 지어서 공연을 다녀보자~”라고 장난도 먼저 걸어주셨고, 민요도 함께 따라 불러주셨죠. 선생님은 참가자들의 가족이자 친구이자 때론 연인으로 무대 위의 모든 순간을 함께해주세요. 14년 전 누구보다 떨렸을 꼬마 승희가 무대에 선 10분 동안, 선생님은 그 누구보다 제 노래를 사랑하고 응원해주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함께해주셨습니다. 전 그 기억을 소중히 안고 지금도 무대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어요. 송해 선생님과의 추억이 든든한 씨앗이 돼 지금의 ‘오마이걸 승희’를 싹틔우게 해주었죠. 앞으로도 선생님께서 전 국민의 ‘일요일의 남자’가 돼주시길 소망하고, 늘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송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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