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과 패션이 만나면 이런 게 탄생합니다.
캐릭터의 얼굴에서 공예와 서사, 가상의 기술까지! 패션이 애니메이션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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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이 소수의 취향을 넘어 대중문화의 주요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그 규모와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기도. 일본동화협회가 공개한 최신 보고서를 보면 애니메이션 산업은 최근 몇 년 사이 역대 최대 규모를 거듭 경신하며 빠르게 몸집을 불렸고, 특히 해외시장이 일본 내수를 앞지를 만큼 성장의 중심축도 바깥으로 이동했다. 이제 일본 안에서 주로 소비되던 서브컬처를 넘어 세계 시장을 움직이는 거대한 콘텐츠 산업으로 성장한 셈이다. 스크린에서도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변방의 장르가 아니다. 더불어 OTT의 확산으로 국가와 언어의 장벽까지 낮아졌다. 글로벌 광고·마케팅 기업 덴츠의 조사에서도 전 세계 소비자 10명 중 3명이 매주 애니메이션을 시청했고,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에서는 그 비율이 절반까지 높아졌다. 일부 마니아들만 즐기던 영역에서 벗어나 대중문화의 큰 줄기로 들어온 것이다.
눈치 빠른 패션계가 이런 흐름을 놓칠 리 없다. 사실 패션과 애니메이션의 관계는 꽤 오래전부터 꾸준히 이어져왔다. 초창기 협업은 캐릭터의 얼굴을 빌려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대표적인 예는 2013 F/W 지방시 컬렉션. 리카르도 티시는 디즈니의 밤비를 스웨트셔츠 전면에 그대로 앉혔다. 베이프 역시 2016년 시작한 <드래곤볼> 협업 이후 <드래곤볼 Z>까지 이어가며 익숙한 캐릭터를 베이비 마일로 특유의 그래픽으로 다뤘다. 2020년 롱샴은 피카츄를 르 플리아쥬 위에 얹었다. 물론 이런 방식은 애니메이션과 패션이 손을 잡은 이래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가장 고전적인 협업법 중 하나다. 시간이 흐르면서 패션 하우스들은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의 얼굴 너머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로에베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스튜디오 지브리와 세 차례 손을 잡았다. <이웃집 토토로>를 시작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세계를 가죽 마케트리와 인타르시아, 자수와 크리스털 장식으로 옮겼다. 토토로의 부드러운 질감부터 <하울의 움직이는 성> 특유의 기묘한 판타지까지 손끝의 공예로 되살렸다. 메종이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 애니메이션을 받아들인 셈이다. 2023년 지미추 역시 <세일러 문>의 세계를 단순한 캐릭터 프린트로 소비하지 않았다. 다케우치 나오코의 원작에서 영감을 얻어 캐릭터마다 다른 컬러, 개성, 작품을 상징하는 변신 이미지를 백과 슈즈에 녹였다. 캐릭터를 빌리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작품의 상징과 세계관을 패션의 언어로 옮겨 온 것이다.
Ganni
Ganni
Loewe
Jimmy Choo
Ground Y x JUJUTSU KAISEN
올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제 패션 브랜드들은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는 물론이고 그 캐릭터가 살아온 이야기와 팬덤의 기억까지 통째로 끌어안는다. 최근 공개한 피스마이너스원과 <토이 스토리>의 협업은 꽤 감성적인 지점을 찌른다.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장난감을 자신의 꿈을 가장 먼저 응원해준 존재로 다시 바라보자는 발상에서 출발해 우디, 버즈, 제시처럼 익숙한 얼굴들을 피스마이너스원 특유의 데이지 모티프와 엮어 의류와 액세서리는 물론 피규어와 봉제 인형 등 다양한 수집품으로 영역을 넓혔다. 지난 7월에는 도쿄에서 두 세계를 결합한 설치 전시도 선보였다. 협업의 범위를 옷과 굿즈에 국한하지 않고 팬들이 유년기의 기억을 다시 수집하고 그 세계를 공간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확장한 것이다. 이를 통해 단순히 굿즈를 소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억 속으로 직접 들어가보는 경험까지 제공한 셈이다. 일본 패션 브랜드 하레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을 옷 곳곳에 숨겼다. 2026년 7월 선보인 새 협업에서는 등장인물의 복잡한 심리를 몽환적인 블러 패턴으로 표현하고, 로봇에 탑승할 때 입는 전투복인 ‘플러그 슈트’의 번호와 절개선, 작품 속 방어막인 ‘AT 필드’를 본뜬 단추 등을 디자인에 끌어들였다. 주인공 신지가 사용하는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에서 착안한 라벨처럼 팬들만 알아챌 수 있는 장치도 곳곳에 숨겼다. 캐릭터의 선화와 장면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작품을 상징하는 설정과 소품까지 옷의 디테일로 옮긴 것이다. ‘에반게리온이 그려진 옷’보다 ‘에반게리온의 세계를 입는 옷’에 가까워졌다. 이런 흐름의 정점에는 안리아레이지와 <공각기동대>가 있다. <공각기동대>는 신체 부위를 기계로 바꿀 수 있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인간과 기계,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묻는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이다. 디자이너 모리나가 구니히코는 2026-2027 F/W 컬렉션에서 작품의 약 250개 장면을 하나의 연속된 몽타주로 재구성하고, 작품을 상징하는 디지털 코드를 브랜드 특유의 구형 셔츠와 플레어스커트에 새겼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런웨이에서는 주변 풍경과 동화돼 존재를 감추는 작품 속 ‘광학미채’라는 가상의 기술까지 현실로 소환했다. LED 기술을 활용해 옷이 주변 환경에 녹아들고 몸의 윤곽이 흐려지도록 만든 것이다. 모델의 몸이 배경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지는 순간, 옷은 더 이상 캐릭터의 이미지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에서만 가능했던 세계의 법칙 그 자체가 됐다.
Peaceminusone x Toy story
Peaceminusone x Toy story
Hare
Anrealage
Anrealage
Anrealage
한때 패션과의 협업은 애니메이션이 주류 문화의 문법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처럼 보였다. 지금은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이미 거대한 팬덤과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한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패션이 그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캐릭터를 옷 위에 올리는 데서 출발한 협업은 이제 서사와 감정, 작품 속 기술까지 현실로 옮기는 단계에 도달했다. 안리아레이지가 애니메이션 속 광학미채를 실제 런웨이 위에 구현했다면 그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적어도 캐릭터의 얼굴 하나를 빌려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시대가 왔다. 애니메이션과 패션, 두 세계가 다음엔 어디까지 서로를 넘나들지 지켜볼 일이다.
Balenciaga
Credit
- 프리랜서 에디터 이민정
- 에디터 유재영
- 사진 브랜드·게티이미지·IMAXtree.com
- 아트 디자이너 변은지
- 디지털 디자이너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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