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카다시안부터 리사까지, F1에 몰리는 이유
루이스 해밀턴으로 시작된 F1 패독 패션은 이제 파리 패션위크보다 뜨거운 런웨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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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마다 뜬눈으로 경기를 찾아보는 포뮬러 원(이하 'F1')의 오랜 팬이다. 2022년엔 F1 그랑프리가 열리는 서킷 중 하나인 이탈리아 몬차에 갔다. 그곳엔 여타 스포츠 경기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레이스 트랙은 거대한 숲에 둘러싸여 수십 분을 걸어가야 만날 수 있었다. 숲 바깥으론 투어 버스와 셔틀버스가 전 세계 팬들을 실어 나르기 분주했고, 입구까지 즐비한 굿즈 숍과 음식점, 각종 체험 존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연습 주행부터 출발 그리드 결정 경기, 본 경기에 이르는 일정이 주말 사흘 동안 이어지니, 한날한시에 열리고 문 닫는 운동장이 아니라 365일 소란한 테마파크에 온 듯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게 있다. 몬차 서킷 개장 100주년을 맞아 사흘간 35만 명의 관중이 몰린 것도, 그로 인해 경기가 끝난 뒤 몇 킬로미터 떨어진 숙소까지 가는 데 5시간이 걸린 것도, 차양 하나 없는 저렴한 야외 좌석을 약 70만원에 구매한 것도 아니다. 바로 공원 안에 위치한, 누군가 타고 왔을 자가용(?)을 위한 '헬기 전용 주차장'이었다. 순간 깨달았다. "클래스가 다르구나." F1이란 무대는 단순히 스포츠 경기장이 아니라 거대한 럭셔리 경험 산업의 장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F1은 속된 말로 '쩐의 전쟁'이라 불린다. 다른 스포츠와의 차이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비단 F1 머신 한 대만 놓고 봐도 알 수 있다. 수백억원에 달하는 차량은 연습 주행 한 번에 박살나기가 부지기수다. 시즌이면 매주 다른 나라에서 그랑프리가 열리는 것도 차이점이다. 팀은 일주일마다 대륙과 국경을 이동하고, 패덕(Paddock)에 차려질 각종 장비와 자동차를 운반한다. 이 기회마저도 11개 팀(올해 1팀이 추가됐다), 22명의 드라이버에게만 주어진다. 원한다고 아무나 F1 세계에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간 후에도 생존이 곧 승리라 여겨지는 '그들만의 리그'다. 그런데 어쩐지 하이패션 세계와 닮았다. 가장 빠른 차와 가장 비싼 가방은 전혀 다른 물건 같지만 그걸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은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아제르바이잔, 싱가포르, 모나코 등 도심을 주행하는 그랑프리가 도시 전체를 관광지화한다면 하이패션 브랜드는 전 세계를 누비며 리조트 컬렉션을 열어 손님들을 몰고 다닌다. F1이 매년 신차를 공개하듯 하우스의 장인들은 공들인 의상을 시즌별로 발표한다. F1의 기술력이 기성 자동차 시장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컬렉션에 등장한 럭셔리 웨어는 한 해 패션의 흐름을 주도한다. 기술 경쟁과 희소성으로 인해 두 업계 모두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이 오간다. 결국 퍼포먼스와 욕망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두 산업은, '상위 1%'의 세계를 동경하고 보이는 것의 힘에 매료된 소비자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서로를 알아본 둘은 자연스레 동화했다. 럭셔리 패션과 F1의 시너지는 사실 새로운 일이 아니다. 다만 둘 중 하나를 앞세우기보다 스폰서십 위주의 분위기에 머물렀다. 우리는 휴고 보스, 타미 힐피거, 푸마 등 많은 패션 브랜드의 로고가 유니폼과 F1 머신에 안착했던 걸 오래 지켜봤다. 레전드 F1 선수인 아일톤 세나의 스타일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오프듀티 룩에 견줄 만큼 사랑받기도 했다. 하지만 F1 패션의 경계는 2007년 맥라렌으로 데뷔해 2013년 메르세데스 이적 후 전설의 기량을 펼친 선수 루이스 해밀턴 전후로 나뉜다. 진주 목걸이와 다이아몬드 팔찌, 각종 럭셔리 하우스의 셋업 룩을 유니폼보다 앞세우고 경기장에 등장하는 그는 패덕을 패션 플랫폼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저 옷만 잘 입는 스타의 등장이라면 이 정도 파급력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그는 미하엘 슈마허와 함께 역대 최다 타이인 7회 월드 챔피언십을 기록한 현역 드라이버이자, 영국 기사 작위를 받은 시대의 아이콘이다. 패션 커리어도 왕성하다. 디올과 타미 힐피거에선 일부 컬렉션의 공동 크리에이터로 이름을 올렸고, 룰루레몬과 리모와의 프렌즈로 활약하며, 2025년엔 멧갈라 공동 의장을 맡았다. 스타 플레이어의 활약과 더불어 2019년부터 매년 새 시즌을 발표하는 넷플릭스 시리즈 <F1, 본능의 질주>, 2025년 개봉한 영화 <F1 더 무비>는 F1의 경기 외적인 서사를 만인에게 알리며 이 스포츠의 인기를 탈지구급으로 끌어올렸다. 해외 스트리밍 사이트를 전전하며 유튜브 개인 방송 해설을 곁들여 보던 시절을 뒤로하고, 2022년부턴 국내 정규 중계를 재개했을 만큼 한국에서의 영향력도 막중해졌다. 같은 고객, 같은 욕망을 공유하는 패션계도 이 흐름에 본격적으로 올라탔다. LVMH 그룹은 지난해 F1과 10년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소속 브랜드인 태그호이어는 공식 타임키퍼 자리에 올랐고, 루이 비통은 트로피 제작을 맡는 한편 모나코 그랑프리의 타이틀 스폰서가 됐다. 세계 최대 럭셔리 패션 그룹이 F1을 선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스포츠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오랫동안 유지한 10개 팀 체제를 깨고 올해 캐딜락이 F1에 합류했다. 미국 시장에서의 폭발적인 성장세가 만들어낸 변화다.
F1 패션의 경계는 루이스 해밀턴 전후로 나뉜다. 어쩌면 지금 가장 흥미로운 패션 위크는 밀라노도 파리도 아닌, 주말마다 도시를 옮기며 열리는 F1 그랑프리일지도 모른다.
할리우드 셀러브리티나 유명 브랜드의 러브콜도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이미 조짐은 보인다. 패덕을 찾는 셀럽 라인업도 사뭇 달라졌다. 첫 마이애미 그랑프리에서 체커 플래그를 흔든 건 NFL의 전설인 톰 브래디였지만, 몇 년 뒤 그 역할을 블랙핑크 리사가 맡았다. 톰 크루즈, 브래드 피트, 데이비드 베컴 등 테스토스테론 향이 짙게 밴 남성 셀럽들이 차지하던 패덕에 티모시 샬라메, 카일리 제너, 젠데이아 같은 팝 컬처 아이콘들이 찾아오고 있다. 모나코 그랑프리에선 특별 제작한 루이 비통 트로피 트렁크를 하우스 앰배서더 정호연이 손수 공개하기도. 구찌는 내년부터 알핀의 타이틀 파트너로 나서 '구찌 레이싱' 플랫폼을 출범한다.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이 지배적인 지금은 차를 잘 끄는 선수만큼 '버즈'를 많이 일으키는 인물도 팀에게 중요해졌다. 해밀턴, 르클레르 등 전문 스타일리스트를 고용한 선수가 대부분일 뿐 아니라, WAGs(선수의 파트너를 통칭하는 용어) 또한 셀러브리티에 준하는 화제성을 가졌다. 르클레르의 아내 알렉산드라 생 믈뢰는 싱가포르 그랑프리에서 치파오를 연상케 하는 로베르토 까발리 빈티지 드레스를 입었고, 몬차 그랑프리에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돌체앤가바나의 룩을 차려입으며 패덕을 패션쇼장처럼 탈바꿈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해밀턴과의 관계를 드러낸 킴 카다시안의 등장은 앞으로 남은 그랑프리의 화제성이 얼마나 치솟을지 기대하게 만든다. 이제 F1의 스타는 드라이버뿐만이 아니다. 패덕은 WAGs와 셀러브리티, 인플루언서가 함께 만드는 거대한 스타일 현장이 됐다. 한편 F1은 패션을 소비하는 단계를 넘어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 페라리에 근간을 둔 패션 브랜드 '페라리 스타일'의 등장이 그것. 2021 S/S 시즌에 론칭한 이 브랜드는 페라리 로고와 컬러를 런웨이로 옮겨 밀라노 패션 위크에서 매 시즌 룩을 공개한다. 모터스포츠의 하이패션화가 성사된 건데, 비욘세와 테야나 테일러 등 많은 셀럽이 착용하며 인기를 얻고 있다. 만약 페라리의 경쟁사이자 F1 팀이기도 한 윌리엄스나 애스턴 마틴의 누군가가 페라리 스타일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면? 뼛속부터 응원 팀이 정해진 야구처럼 팬덤이 형성돼 있는 라이벌 간의 틈새를 '패션'이라는 수단이 이어주는 진풍경을 목도할 수 있게 된다. 이 사건(?)은 모터스포츠 팬들에게 손에 꼽는 쇼킹 모멘트로 여겨질 게 분명하다. 메르세데스의 오랜 후원사인 IWC의 협업 워치나, 메르세데스 뉘앙스를 잔뜩 묻힌 Y-3의 2026 F/W 시즌 룩, 레드불 팀 후원사인 태그호이어의 모나코 워치 역시 패션과 F1의 결혼이 낳은 자식 같은 존재다. 패덕은 어느새 세계에서 가장 빠른 패션 신 가운데 하나가 됐다. 테니스와 골프가 그래왔듯 F1이 스포츠 패션계의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할 날이 성큼 다가왔다. 어쩌면 지금 가장 흥미로운 패션 위크는 밀라노도 파리도 아닌, 주말마다 도시를 옮기며 열리는 F1 그랑프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런웨이의 모델들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드라이버와 패덕의 인물들이다.
1 F1 워치의 상징과 같은 태그호이어 모나코 컬렉션의 신작, 에버그래프!
2 IWC와 메르세데스 드라이버 조지 러셀이 협업한 파일럿 워치 리미티드 에디션.
3 루이 비통이 제작한 2026 모나코 그랑프리 트로피. 오픈을 맡은 정호연.
4 전무후무한 리빙 레전드 드라이버이자 스타일 아이콘인 루이스 해밀턴.
5 패덕 패션의 판도를 바꿀 킴 카다시안!
6 내년부터 알핀의 타이틀 파트너로 F1에 진출하는 구찌.
7 2024년 체커 플래그 기수로 등장한 리사.
Credit
- 에디터 서지현
- 사진 brand·게티이미지·IMaxtree.com
- 어시스턴트 이소혜
- 아트 디자이너 장석영
- 디지털 디자이너 장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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