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읽어야 할 초단편소설, 고민실 작가 신작 ‘해사 수선소’ 독점 공개
유쾌하고 겁 없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1편의 고민실 작가 소설과 1편의 그림을 코스모에서 읽어보세요.
전체 페이지를 읽으시려면
회원가입 및 로그인을 해주세요!
해사 수선소
‘임시 휴무’. 나는 하얀 종이에 적힌 글씨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아는 수선집이라곤 여기 하나뿐이지만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팔뚝에 걸친 기모 바지를 추스르고 골목길을 두리번거렸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끝으로 간판이 더 보이지 않자 한숨이 푹 나왔다.
“그럼 그렇지.”
요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남편 일은 내리막세고, 민하는 번번이 면접에서 탈락하고, 나는 부장까지 달았던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갱년기 증세마저 심해졌다. 작년부터 전조가 있기는 했어도 호르몬제를 먹으면서 나아졌기에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밤에 잠이 안 오거나 우울해진 것도 재취업이 되지 않아 그런 줄만 알았다. 남편이 아껴 쓰라며 잔소리하는 말에 꾹꾹 눌러온 감정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한바탕 쏟아내고도 부족해서 쿠션을 집어 던졌다. 눈이 휘둥그레진 남편 얼굴을 보고 속이 후련했다가 서서히 당혹스러워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놈의 호르몬.”
하루 한 번이라도 바깥바람을 쐬어야 좀 괜찮은데 두꺼운 바지를 든 채로는 돌아다니기 힘들다.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만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좁은 곁길에 세워둔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화분에 가려 끄트머리밖에 보이지 않아도 ‘옷’이라는 글자만큼은 선명하게 드러났다.
얼핏 가정집처럼 보이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기장판에 등을 대고 누워 있던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절반쯤 하얗게 센 머리를 매만지는 수선집 사장에게 바지만 맡기고 나오려다가 황금색 명함을 발견했다. ‘解絲 修繕所(해사 수선소)’. 수선집 사장이 검지로 천장을 콕콕 찌르듯이 가리키며 철학관이라고 말했다.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잘 봐요.”
옷을 여미고 수선집을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스카프를 헤집어 풀었다. 꽃샘추위가 한창인데도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갱년기는 다스릴 수 있는 질병이라고 생각했다. 증세에 맞는 약을 먹고 운동도 좀 하면서 인내하면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열은 몸에만 차오르지 않았다. 가슴속에 열이 들끓기 시작하면 여기서 펑 터지고, 저기서 펑 터졌다. 지나고 보면 별일도 아닌데 그때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다 호르몬 때문이겠지. 정말 다 호르몬 때문이려나.
장을 보고 집에 와서 겉옷을 벗다가 손에 뭐가 잡혀 꺼내보니 황금색 명함이었다. 이상하게도 수선집을 다시 찾아갈 생각을 하자 어디였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명함에는 연락처만 있고 주소가 없었다. 전화를 걸어 길만 물어보려다가 멋쩍어져서 예약까지 하고 말았다. 아니, 사실은 한 번도 그런 델 가본 적이 없어서 궁금했다. 아니, 그냥 뭐라도 하고 싶었다.
다음 날 민하와 같이 집을 나섰다. 내가 우울해할 때마다 민하는 영화를 예매하고, 맛집에 데려가고, 최근에는 꽃구경 계획도 세웠다. 지난 세월 원망스럽고 서러웠던 일들을 털어놓아도 말없이 들어주기만 하는 착한 딸인데 다들 눈이 삐었지. 나는 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손부채질하며 두리번거렸다.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간판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자니 낯선 동네로 건너온 기분이 들었다. 잠시 헤매다가 겨우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을 수 있었다. 수선집은 문 앞에 ‘외출’이라고 적힌 쪽지가 붙어 있었다. 어차피 바지는 집에 갈 때 찾아갈 생각이었다. 나는 수선집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철학관이라는 표시가 어디에도 없어서 긴가민가하는데 문이 열리고 머리가 절반쯤 하얗게 센 여자가 나왔다.
“들어오세요.”
수선집 사장이 철학관 접수도 하나 싶어 잠깐 당황했지만 일단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불상이나 탱화도 없었고, 촛불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았다. 그냥 흔한 가정집 같았다. 식탁으로 우리를 안내한 수선집 사장이 따뜻한 보리차를 내주었다. 사주 보는 사람은 언제 오나 했는데 수선집 사장이 커피믹스를 탄 컵을 가져와서는 맞은편에 앉더니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두 분 같이 보시면 깎아드릴게.”
그럼 그렇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뚱하게 있으니까 민하가 먼저 생년월일을 말했다. 태어난 시각은 모른다고 해서 결국 내가 입을 열었다. 수선집 사장이 낡은 공책을 펼쳐 볼펜으로 끄적거리더니 천천히 읊조렸다.
“자기 밥그릇은 꽉 쥐고 태어났네. 어디 가서 배곯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때부터 귀가 솔깃해졌다.
“초년운이 좋고 지금도 나쁜 운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요. 서른 넘어서 한 번 세게 넘어질 텐데 큰 횡재가 없는 만큼 큰 횡액도 없으니 조금만 버티면 서서히 좋아질 거예요.”
차분한 목소리가 일러주는 말에 민하가 빙긋 웃었다. 가족 사주도 알아야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해서 얼른 남편과 내 생년월일을 말했다. 태어난 시각은 모른다고 했더니 그런 분들이 많으시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가락을 까닥이다가 다시 민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많이 짊어졌어. 엄마, 아빠, 장녀, 막내 역할 다 하고 있어. 그러니 기운이 바닥났지. 그럼 좋은 운이 들어와도 잡지를 못해요.”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민하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려서 깜짝 놀랐다. 항상 씩씩하니 눈물을 잘 보이는 성격이 아닌데…. 수선집 사장은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민하에게 휴지곽을 건네고는 내 컵에 얼음을 넣어주었다.
“힘들죠?”
“뭐가요?”
“갱년기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나는 아직 시원해지지 않은 보리차를 마시면서 얼음을 하나 입에 넣었다.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는 헛소리라도 들어볼 참이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 내가 내가 아닌 것 같고, 여기저기 다 아픈데 누구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 편 하나 없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고….”
유난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친정엄마가 절절히 보고 싶었다. 3년만 더 살지. 아니, 5년. 아니, 10년.
“새로 태어나는 건 힘든 일이야. 알이 깨지는데 당연히 요란한 소리가 나지. 내가 못나서 그런 게 아니라 지금이 그냥 그런 시기인 거야.”
옆에서 민하가 훌쩍거리며 코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음 조각을 깨물었다. 수선집 사장이 다시 일어나더니 손바닥만 한 천과 바늘을 들고 와 내밀었다. 날개를 펼친 새와 꽃이 수놓아져 있는 천에 한 땀 놓으라고 해서 바늘을 찌르고 잡아당겼다. 마지막에 매듭을 지으려는데 눈이 가물가물해 헛손질하자 민하가 도우려는 걸 수선집 사장이 말렸다.
“매듭은 남이 대신 해주는 거 아니야. 맺혀요.”
한 땀이라고는 해도 내가 수놓은 천을 가져가서는 나중에 태울 거라고 했다. 수선집 사장이 내 손을 다독이며 말했다.
“액운도 같이 타서 날아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해요. 인생 짧아. 가진 재주가 많아서 뭘 해도 잘할 텐데 잔뜩 웅크리고 있네.”
그동안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에 겨우 잠들어도 날이 밝으면 청소하고, 요리하고, 세탁기를 돌렸다. 그거라도 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 물 있는 데 가지 말고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거라는 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복채를 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가방을 쌌다.
“제주에서 한 달 살아보는 게 로망이었어.”
남편은 황당해하는 눈치였지만 말리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며칠만 있다 돌아올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숙소를 정하자 민하가 옷가지를 택배로 부쳐주었다. 반나절만 일하는 알바를 구하고 얼마 안 있어 민하가 취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도 없는데 고생 많았네.”
“그게 고생이면 엄마가 더 고생이지. 아빠랑 집안일 하면서 둘이 얘기도 많이 했어. 몸은 괜찮아?”
“괜찮아.”
제주도 물이 잘 맞는지 아니면 그저 그런 시기가 되어서인지는 몰라도 한결 나아졌다. 새 친구도 사귀었다. 석 달을 제주에서 보내고 집에 돌아갔다가 다음에는 부산으로 갔다. 민하의 권유에 유튜브도 시작했다. 누가 얼마나 볼까 싶었는데 의외로 갱년기 증세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서 힘이 났다. 댓글로 노하우를 공유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처럼 잠시 집을 떠나 살고 싶다는 사람들을 상담해주다가 결국 1인 여행사를 차려 에이전트가 되었다.
내가 집을 떠나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떠나보고서야 알았다. 원래도 여행을 좋아했지만 스쳐 지나가는 것과 머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내 등을 떠민 것이 민하의 눈물이었는지, 액땜이었는지, 손등에 남은 손등을 다독이던 온기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조만간 수선집에 과일이라도 사 들고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지금쯤 강진에는 해당화가 곱게 피었을 것이다.
Writer 고민실
Illustrator 엄주
언제나 변함없이 끌리는 주제가 하나 있다. 편견을 어렵지 않게 부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 구순, 여성, 나무, 전기톱, 화가이자 조각가. 모든 단어가 빈틈없이 조화롭다. 이미 자신과 색과 모양대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사람이 여기 있는데, 내가 무엇하러 없는 인물을 만들어 그릴까. 1935년생 1세대 조각가 김윤신이 여기 있다.
Credit
- 에디터 천일홍
- Writer 고민실
- Illustrator 엄주
- 아트 디자이너 김지은
- 디지털 디자이너 이연우
스타들의 다이어트 비법 대공개
#다이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