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가슴 뛰게 하는 지극히 사적인 연애담 4

마음 한편을 간지럽히는 연애들.

프로필 by 김미나 2025.11.21

우연과 상상

그날따라 영화관에 가고 싶었다. 특별히 기대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혼자 조용히 극장 의자에 앉아 어둠 속으로 숨어들고 싶었으니까. 표를 끊고 상영관 문을 열었을 때, 텅 빈 좌석들이 마치 파도처럼 펼쳐졌다. 극장은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작은 만족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예고편이 끝나고 불이 꺼지자, 누군가가 근처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낯선 남자가 자리를 정리하며 앉았다. ‘자리도 많은데 하필….’ 은은한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것도 잠시, 스크린에 몰입하자 가뿐히 잊어버렸다. 스크린 속 장면이 감정선을 끌어올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옆자리의 움직임이 신경 쓰였다. 같은 장면에서 같이 웃고, 놀라고 하다 보니 낯선 상대에게서 괜히 친밀감이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몰입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날따라 누군가와 함께 영화를 본다는 감각이 낯설게 느껴질 만큼 좋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졌다. 사람이라고는 그 남자와 나, 둘뿐이었다. 괜히 뻘쭘해져 서둘러 극장을 나왔다. 이대로 집에 가기엔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어 휴대폰을 꺼내 지도를 켜니, 마침 저장해둔 카페가 근처에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영화관에서 본 그 남자가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까. 하필 카페는 만석이었다.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니, 그가 일어나며 말했다. “여기 같이 앉으실래요?” 잠시 고민하다가 고맙다고 말한 뒤 커피를 주문했다. 배려에 대한 감사로 그에게 줄 피낭시에 주문도 잊지 않았다. 마주 보고 앉으니, 기분이 묘했다. 순간의 정적이 흐른 뒤 자연스럽게 영화 이야기가 시작됐다. 방금 본 장면 중 인상 깊었던 부분, 감독의 전작에 대한 감상, 배우의 연기까지… 서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치다 보니, 마치 원래 알던 사람처럼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같이 카페를 나오는데 그가 오늘 본 영화의 포토티켓을 내밀며 말했다. “기념으로, 이거 가지세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와 헤어졌다. ‘인스타그램 아이디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뒤늦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버스 정류장 쪽으로 향하며 그가 준 포토티켓을 무심코 꺼냈는데, 뒷면에 반듯한 글씨로 그의 이름과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건 또 언제 쓴 거람.’ 피식 웃음이 났다. 그날 본 영화의 제목은 <우연과 상상>이었다.

29세, 그래픽 디자이너 J




남산 러닝 로맨스

지난한 여름이 끝나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혼자 뛰는 게 조금 지겹다는 생각이 들 무렵, 삼삼오오로 달리는 러닝 크루를 봤다. 부러웠다. 그들의 얼굴엔 생기와 활력이 가득해 보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남산 러닝 크루를 검색했다. 그리고 첫 러닝 크루 모임 날이 됐다. 국립극장 앞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서로 친한 듯 웃고 떠들고 있었다. 괜히 왔나 싶어 어색하게 있는데, 딱 봐도 탄탄한 몸매의 남자가 내 옆에 서며 말했다. “처음이시죠? 오늘 제가 페이스 같이 잡아드릴게요.” 그는 크루의 페이스메이커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페이스에 맞춰 함께 뛰며 속도를 조율해주는 역할. 당황하면 헛소리를 하는 나는 “괜찮아요, 저 생각보다 잘 뛰어요”라며 허세 섞인 말을 내뱉었다. 달리기 시작한 지 10분도 안 돼 곧 후회가 밀려왔다. 호흡은 가빠지고, 다리는 무거웠다. 그런데 자존심 때문에 속도를 줄이지 못했다. 죽음의 오르막길에서 내리막길을 향해 가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악!” 소리와 함께 결국 발끝이 어긋나면서 발목을 접질렸다. “괜찮으세요?” 옆에서 달리던 그가 급히 멈춰 내 어깨를 붙잡았다. 다리를 딛자마자 통증이 올라왔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괜찮아요. 조금만 쉬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크루들을 먼저 보내고, 잠시 상황을 정리한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와 등을 내보이며 말했다. “업히세요.”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여요. 골절이면 병원 가야 해요.” 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그의 등에 업혔다. 그러나 문제는 택시가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는 이미 10km를 달린 상태였고, 땀에 젖은 티셔츠 위로 그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몸에 닿는 그의 등 체온이 뜨거워서 민망하다 못해 자꾸만 귀 끝이 달아올랐다. 그의 숨결이 내 옆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게 이상하게 안정감을 줬다. “무겁지 않아요?” 고요한 공기를 깨려고 내가 먼저 물었다. 그는 짧게 숨을 고르며 웃었다. “가벼워요. 생각보다.” 얼굴이 더 화끈거려 대꾸도 못 한 채, 그저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가로등 불빛만 바라봤다. “잠깐만요. 택시가 안 잡히니까 가까운 병원 위치 한번 볼게요.” 순간 그의 팔이 좀 더 조여져 몸이 더 그에게 단단하게 고정됐다.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들릴까 봐 숨을 가다듬었다. “아까 달릴 때 허세 부린 거 후회하죠?” “…완전요.” 솔직한 대답이 튀어나오자,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목덜미 가까이서 울려 퍼졌다. 밤공기는 선선했고, 나는 아픈 발목도 잊은 채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33세, 출판 편집자 M




이상한 소개팅

우리는 메가박스 아트나인에서 처음 만났다. 소개팅 당일에 영화를 보는 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좋아하는 영화라길래 궁금했다. 그가 예매한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키즈 리턴: 재회의 시간>이었다. 영화는 재밌었다. 옆에서 그가 킥킥 웃는 소리에 나도 따라 웃었다. 그는 기타노 다케시가 ‘진짜’ 같아서 좋다고 했다.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가 좋았다. “맥주 마시러 갈래요?” 그가 말했고, 그를 따라 시장통에 있는 어느 술집에 들어갔다. 전혀 이런 곳에 있을 것 같지 않은 근사한 곳이었다. 거리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맥주 두 잔을 시키고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묻고 답했다. “원래 제가 말을 이렇게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닌데, 오늘은 이상하네요.” 쑥스럽게 말하는 그가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술집에서 나와 담배를 피우는데 그가 편의점에서 커피를 3개나 사서 나왔다. “투 플러스 원이래요!” 그게 귀여워서 또 웃음이 났다. “좀 걸을까요?” “좋은 생각이에요.” “제가 자주 가는 산책 코스가 있어요.” 퇴근하고 그가 자주 산책한다는 길을 따라 한강으로 향했다. “여기에 누구랑 온 건 처음이에요.” 나는 계속 웃음이 났고 점점 그가 좋아졌다. 추운 날씨였는데 하나도 춥지 않았다. 결국 동작대교에서 한남대교까지 걸었다. 출출해져 편의점에서 한강 라면을 먹었다. 그는 라면 중에서 삼양라면을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요즘 누가 삼양라면을 먹어요?” “햄 맛이 많이 나서 좋아요.” 나는 자꾸 웃음이 났고, 그가 좋아질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신사동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왔다. 택시 안에서 그가 적어준 음악을 듣는데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집에 도착하면 문자 하나 주세요.” 집에 도착해 씻고 잘 준비를 하며, 잘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는데 갑자기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저는 방금 집에 도착했어요. 근데 저 K씨가 좋은 것 같아요. 좀 이르긴 하지만 우리 만나볼래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분하고 또렷한 말소리로 그가 말했다. 예상치 못한 진지함에 계속 웃음이 났다. 이토록 솔직하고 순수한 고백이라니. 한참을 뜸 들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가까스로 내뱉었다. “좋아요.” 가을이 한창이었다.

34세, 카피라이터 K




초록빛 오로라 아래에서

아이슬란드는 내 오랜 꿈이었다. 푸른 빙하와 끝없이 펼쳐진 설원, 언젠가 꼭 가겠다고 다짐하며 마음속에만 쌓아두던 풍경. 서른을 앞두고 드디어 용기를 냈다. 크리스마스 시즌, 혼자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레이캬비크는 생각보다 더 차갑고 쓸쓸했다. 다들 가족과 연인의 손을 잡고 걷는데, 나만 덩그러니 혼자였으니까. 그나마 빙하 하이킹 투어를 신청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었다면, 이 작은 도시에서 혼자 고립된 채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투어 당일, 집결 장소에 모여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나와 같은 동양인 남자를 발견했다. 그도 혼자인 듯했다. 곧 눈이 마주쳤다. “Are you… Japanese?” 먼저 말을 건 건 남자였다. 한국인이라고 대답하니, 그의 얼굴에 반가운 웃음이 번졌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같은 동양인이 이토록 반가울 줄이야. 그의 웃음에 덩달아 나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이름은 신지. 런던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일본인이었다. 원래는 파트너와 크리스마스 휴가로 같이 오려다 두 달 전쯤 헤어지게 됐는데, 꼭 가고 싶었던 곳이라 혼자 왔다고 했다. 투어 내내 우리는 자연스레 붙어 있었다. 또래에다 관심사도 비슷해 금세 친해졌다. 투어가 끝나고도 자연스레 함께 움직였다. 레이캬비크 도심은 생각보다 볼 게 많지 않았지만, 그 덕에 우리는 오래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작은 카페에서 현지 사람들이 마시는 핫 초콜릿을 함께 마시기도 하고, 밤에는 그가 렌트한 차를 타고 도시 외곽까지 나가 오로라를 보기도 했다. 추위 속에서 목을 빼며 일렁이는 초록빛 장막을 보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감탄했다. 어쩌다 보니 크리스마스도 같이 보내게 됐다. 내가 빌린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소박하게 파스타를 해 먹고, 작은 트리 장식이 달린 와인을 건배하며 우리는 서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레이캬비크로 오기 전 헤어진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땐, 왠지 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어느새 창밖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의 손이 내 손에 닿는 순간, 서로의 체온이 전해졌다. “This moment… it feels like a dream.” 내가 말하자,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I know what you mean….” 잠시 말이 끊기고,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주방 작은 조명 아래, 그의 얼굴이 따뜻하게 빛났다. 그가 내게 다가와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입을 맞췄다. 창밖으로 눈발이 흩날렸고, 레이캬비크의 불빛은 낯설고 아름다웠다.

31세, 프리랜스 번역가 S


Credit

  • Editor 김미나
  • Writer 이봄(프리랜스 에디터)
  • Illustration by LIMOO
  • Digital designer 변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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