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코스모 단독 공개! 김멜라 작가의 초단편 소설

Fun Fearless Female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한 편과 그림 한 편이 도착했다.

프로필 by 김미나 2025.03.07

꼭 너 같은 피클병 뚜껑


그날 밤 소희는 물러설 수 없었다. 피클병 앞에 무릎을 꿇기 싫었다. 낮에는 회사 일에, 밤에는 허덕이는 체력에 소희는 매번 항복을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피클병까지 날 우습게 본단 말인가. 벌써 삼십 분째 소희는 꽉 닫힌 병뚜껑과 씨름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수건과 고무장갑이 널브러져 있었고 소희는 벌겋게 달아오른 손을 털며 숨을 씩씩댔다. 평소 같으면 인터넷에 ‘피클병 뚜껑 따는 법’이라고 검색했을 테지만, 그때 소희는 연인과의 동거를 막 끝장낸 터였다. 한마디로 사리 판단이 온전치 않은 울분의 상태. 소희는 단방에 적을 압도하고 싶어 장도리를 손에 쥐었다.



“굉소희, 정말 굉장해!”



헤어진 애인은 자주 비아냥거렸다. 굉장히 여성스럽고 굉장히 현명해서 굉굉장히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바로 너라고. 평소에도 반어법을 껌처럼 질겅거리던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굉장히’는 ‘안’이라는 부정어 대신 쓰인 연막이었다.



“주둥이를 콱, 조사버릴 테다!”



소희는 세숫대야 안에 드러누운 죄인의 통짜 허리를 노려보며 가차 없이 장도리를 휘둘렀다. 연달아 날아드는 쇠붙이에 유리병이 비명을 내지르며 깨졌다. 소희는 짜릿한 승리감에 전율했으나 쾌감은 잠시, 달짝지근한 식초 냄새가 코를 찔렀고 사방으로 튄 유리 파편이 타일 바닥에서 반짝였다. 소희는 어두침침한 화장실 조명을 올려다봤다. 수명이 다해 깜박거리는 전등이 비웃듯 소희를 굽어봤다.



‘굉소희, 역시 굉장해. 이제 목욕은 못 하는 거 알지?’



그날 새벽, 소희는 노래방에서 캔맥주를 홀짝이며 곡소리인지 발라드인지 모를 고음을 토해냈다. 일정치 못한 보폭으로 집으로 가다 길가에 엎어졌고, 가까스로 귀가해 엉망이 된 몰골로 거실 바닥에 쓰러졌다. 다음 날 오후 숙취에 시달리는 소희에겐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불 나간 욕실에서 샤워하다 발바닥에 찰과상을 입을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불러 전등을 갈 것인가. ‘부를 사람이 누가 있지?’ 소희는 야구모자를 뒤집어쓰고 동네 철물점으로 달려갔다. 닫힌 셔터문에는 “주일에는 쉽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염치 따윈 내팽개치고 소희는 간판에 적힌 번호로 구조를 요청했다. 한참 만에 전화를 받은 여자가 걸걸한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 자기네 집 웬수가 술병으로 앓아누워 출장 수리를 못 나간다고.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내일 머리 못 감으면 죽어요.”



소희는 다시금 삶의 주도권을 잃은 채 애걸했다. 여자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놈에 거, 밸것도 아녀. 집에 도라이버 읍서유?”



사투리가 심한 여자는 소희에게 직접 전등을 갈아보라고 권했다. 자신도 산속 기도원에 와 있어 당장은 가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사정 따윈 들리지 않는다는 듯 소희가 콧물을 훌쩍이며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자 주인은 마지못한 말투로 자물쇠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가게에 들어가 새 전등을 가져가라는 거였다.



“제가 그래도 돼요?”


“안 되면, 전화 끊어줄규? 들들 볶아칠 땐 은제구 넘의 형편까정 봐주네? 오지랖 부리다 가게가 털리믄, 것도 다 주님 뜻인가 보다 할텡께 문 따고 들어가봐유.”



이 은혜는 뼈에 새기겠다는 말과 함께 소희는 셔터를 열고 들어가 원격으로 조종하는 주인의 말에 따라 새 전등을 챙겼다. 수화기 너머에선 우렁찬 찬송가 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돈은 어디에 둘까요?”



땀범벅이 된 소희가 물었다.



“낭중에 오다가다 주든지 말든지.”



집으로 간 소희는 전 애인이 남기고 간 공구 세트를 꺼냈다. 묵직한 전동 드릴을 손에 쥐자 마치 권총을 쥔 것처럼 입과 눈꼬리가 씰룩였다. 소희는 철물점 여자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욕실로 향했다.



“밸것도 아녀. 도라이버로 구녕 열고, 흰 거는 흰 거, 끔정 거는 끔정 거, 브라켓에 맞촤 전선을 끼고….”



“브라… 브라요?”



소희는 반사적으로 가슴에 찬 브래지어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 시절 소희는 전등을 바꾸려면 먼저 두꺼비집 스위치를 내려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어매, 핵교를 어서 나왔나 두꺼비집도 모릉가 비네. 워치게, 시방 내가 금식 삼일 찬데 산 타고 내려가 손으로 짚어줘유?”



다행히 전동 드릴은 즈잉즈잉 잘 돌아갔다. 공구 세트에 들어 있는 설명서를 보니 좌우 변환 버튼을 누르면 쉽게 나사를 풀고 조일 수 있었다. 소희는 팔뚝까지 전해오는 알싸한 진동을 느끼며 콧바람을 거칠게 내쉬었다. “밸것도 아녀, 밸것도 아녀.” 주문처럼 그 말을 중얼대며 나사의 ‘구녕’을 찾았다. 그리고 생애 최초로 전등갓 너머의 세계를 마주했다.



이름하여 ‘밸런타인데이 독립선언’. 소희는 우연히도 2월 14일에 스스로 화장실 전등을 교체한 일을 그렇게 기념했다. 엎드려 절 받기로 얻어먹는 초콜릿 대신 힘겹게 맛본 그 작은 성취감이 소희의 눈과 손을 거듭나게 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손수 전등을 갈아치운 소희는 집의 하드웨어 시스템에 관심이 갔다. 1차 목표는 공구 세트 안의 연장을 하나씩 사용해보는 것이었다. 소희는 줄자를 꺼내 창문의 길이를 재고 금속용 드릴 비트로 창틀을 뚫어 어여쁜 커튼봉을 달았다. 현관에 자동 센서 조명을 달고 녹슨 수건걸이를 세련된 애플그린색으로 바꿨다. 덜렁거리는 싱크대 문짝을 바꿀 땐 철물점 스승님께 전화해 조언을 구했다. 사장님은 “밸것도 아녀”라는 추임새를 넣으며 헐렁이는 나사 구멍에 이쑤시개를 채워 고정하는 팁을 알려줬다.



꿍꽝꿍꽝, 주말마다 소희는 집을 손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철제 선반을 층층이 조립해 바닥에 나뒹굴던 자잘한 생필품을 깔끔하게 수납했고 화장실과 싱크대 수전도 교체했다. 꾀죄죄했던 집 안의 이목구비가 점차 땟국물을 씻고 새사람이 되어갔다. 소희는 몽키스패너와 렌치가 주는 무게감에 친숙한 안정감을 느꼈다. 갈팡질팡 들썩이는 가슴을 따스한 누름돌로 지그시 눌러주는 기분이랄까. 안 쓰던 근육을 움직여 팔과 옆구리가 결렸으나 화한 파스 향마저 어쩐지 향긋했다. 곧장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변화가 소희의 도전에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해 경칩 무렵, 소희는 창문마다 해사한 면아사 커튼을 달고 창가에 화분을 들여 바질과 루콜라 모종을 심었다. 노르딕 패턴의 식탁보로 멋을 내고 새빨간 냄비 세트도 마련했다. 헤어진 애인이 중고 거래로 샀던 식기는 몽땅 치워버렸다. 이제야말로 소희가 집의 안팎을 온전히 핸들링하는 기분이었다. 구부정하게 주눅 들었던 등과 어깨가 자연스레 펴졌고 손아귀의 힘도 세졌다. 그 손으로 뚱땅뚱땅 집 한 채를 지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새 소희는 번화가의 액세서리 가게보다 해머 드릴이 진열된 철물점의 단골이 되어갔다.



“사장님, 저는요, 전동 드릴만 있으면 노후 걱정은 없을 것 같아요.”



그해 여름, 팥빙수를 포장해 철물점에 놀러 간 소희가 스승님께 말했다. 스승님은 혀를 찟, 하고 차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만, 술 퍼먹구 속만 쎅이는 서방보담 낫것지.”



알고 보니 스승님은 집 고치는 일로 현장밥을 먹은 지 삼십 년이 넘은 베테랑 기술자였다. 빙수의 콩가루를 음미하시며 스승님이 말했다.



“내 손으로 고쳐감서 사는 집치구 망한 집구석은 못 봤응께. 현실적으루다 여자들도 못질부터 배워야 혀. 해보믄 밸것두 아니잖여. 안 그류?”



문득 소희는 사장님의 그 기술을 세상에 나누고 싶었다. “밸것도 아녀” 그렇게 다독이며 가르쳐준다면 다른 여자들도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사장님, 저랑 비즈니스 해보실래요?”



그리고 몇 년 뒤, 국내 최대 온라인 집수리 교육업체를 운영하게 된 ‘굉소희’ 대표는 성공 비결을 묻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우린 단순한 집수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삶의 주도권을 쥐는 자신감을 선사하는 거죠. 아시잖아요. 서로 도우면 ‘밸것도’ 아니에요. 과거에 저는 피클병 뚜껑도 못 땄는걸요.”



공구 근육이 알알이 박힌 팔뚝을 내보인 굉소희 대표가 자신을 차버린 전 애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Writer 김멜라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그려내는 페미니즘 소설가. <환희의 책> <멜라지는 마음> <없는 층의 하이쎈스> 등을 펴냈다.


Illustrator 윤예지 비록 멈춰 있는 그림이지만, 내 삶을 내가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나가는 Fun Fearless Female의 희열과 에너지가 분출되는 모습을 포착했다.


Credit

  • Editor 김미나
  • Writer 김멜라
  • Illustrator 윤예지
  • Art Designer 진남혁
  • Digital Designer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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