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사상검증하는 사회, 타자와 공존하는 법

극과 극의 가치관을 지닌 인물들을 서바이벌 상황에 몰아넣고 공생 가능성을 엿보는 화제의 예능,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 각기 다른 사상을 지닌 이들 사이에서 페미니스트 작가인 하미나는 아침마다 따듯한 차를 내려 모두에게 대접했다. 모의 사회를 겪은 하미나 작가가 서바이벌 쇼에서 승리하기를 포기한 이유, 그리고 그가 그곳에서 이뤄낸 작은 성취에 대하여.

프로필 by 이예지 2024.04.01
얼마 전 웨이브에서 절찬리에 방영된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이하 <더 커뮤니티>)가 종영했다. 이 천재적인 기획의 프로그램은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 측면에서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이들을 한곳에 모아 내외부적인 위협을 가하면서 이들이 어떤 방식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지 관찰하는 정치 서바이벌 예능이었다. 정치인, 작가, 래퍼, 직업군인, 경호원, 유튜버, 운동선수, 모델 등 다양한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이 모였고, 이들의 성장 배경 역시 제각각이었다.

내가 프로그램의 섭외 대상으로 물망에 올라 처음 연락을 받은 것은 지난해 8월경이었다. 두 번째 단독 저서가 한국에서 막 출판되고 소셜미디어를 제외하고는 어떤 홍보 활동도 하지 않은 채로 베를린에서 조용한 일상을 만끽하고 있던 때였다. 짧게 이뤄진 통화에서 제작진은 프로그램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면서 페미니스트로 출연해줄 인물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미디어에서 페미니스트가 너무 소모적으로 재현돼왔는데, 이 서바이벌 쇼에서는 페미니즘 이야기를 제대로 들려주면서도 계급 등 여러 가지 교차성을 보여줄 인물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프로그램에 출연하면 나 역시 한국에서 페미니스트 작가로서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페미니스트 작가.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자리 잡고 싶은 방식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점차 옮겨가던 것도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로서의 자리만 주는 것에, 특히 안티페미니스트와 싸우는 자리만 주는 것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즘은 내가 참고하는 여러 이데올로기 중 하나고 20대 중반에 헌신한 사회운동으로서 중요하지만 그뿐이다. 라벨링은 언제나 한 사람의 총체적인 경험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나는 그것에 저항하고 싶은 마음과, 낙인투성이가 된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팽개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전화를 끊자 마음이 어두워졌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을 말할 때마다, 아니 사회의 주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의견을 낼 때마다 맞닥뜨려야 했던 공격과 적대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 일은 거절해야 마땅했다. 욕받이 무녀가 되는 일 같았다.

며칠 고민해보면서 나는 출연과 관련해 꺼려지는 모든 것이 두려움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람들에게 평가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쟁쟁한 사람들 사이에서 못나 보일 것 같다는 두려움, 사랑받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세상으로부터 숨어 살고 싶다는 마음이 이런 두려움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이건 피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해볼 만한 일이다. 그래서 출연을 결정하게 됐다. 이때가 이 쇼와 관련해 첫 번째로 중요한 순간이다.

두 번째 순간은 귀국 후 촬영 현장에서였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촬영이 시작됐다. 휴대폰을 제작진에게 넘기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한 뉴스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가자 지구가 초토화됐다는 기사였다. 4개월 전만 해도 나는 이집트 다하브에 있었고, 다하브와 가자 지구는 고작 서울-부산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다하브와 베를린에서 지내는 동안 전쟁을 피해 떠나온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쿠르드족 사람들을 만나왔다. 추상적인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사람들이 구체적인 얼굴과 이야기를 가진 개인으로 삶에 들어오면서 나는 아랍 지역 사람들이 얼마나 강한 편견에 시달리는지 알게 됐다. 중동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기존에 알던 세계를 부수는 일이었다. 증오를 증오로 되갚으며 전쟁이 반복되는 것. 피투성이가 돼 모든 것을 황폐화시키는 일이 언제나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을 희생양 삼아 이뤄진다는 것. 그 싸움에 조용히 이득을 보는 권력과 자본이 존재한다는 것. 테러리스트라고 믿는 상대에게도 옳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 이것이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 앞에서 내가 간접적으로나마 목격한 것이었다. 70년 전에 한국도 같은 일을 겪었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사상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두고, 상대를 의심하게 하는 장치(“여러분 중에는 불순분자가 존재합니다”라는 안내)를 마련해두고, 서로를 공격할 수 있게 만들어둔 다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관찰하는 <더 커뮤니티>의 세팅이 내게 쇼 이상으로 느껴졌다는 말이다. 적대의 끝에는 전쟁이 있었고, 그것은 촬영 당시 내게 매우 실제적이었다.

첫날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믿는 머릿속 모델이 승자 독식의 서바이벌이라는 것에 압도됐고, 함께할 사람들을 의심하고 속여야 한다는 것도 큰 스트레스였다. 촬영이 시작된 뒤에야 알게 된 것이 많았는데, 페미니즘의 대척점에 이퀄리즘이 있는 것, 4개의 기준으로 사상이 점수화돼 모두에게 공표되는 것, 이를 기준으로 공격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 등이 그랬다. 동시에 이것이 대중을 상대로 한 예능 방송으로서 고민을 거듭한 결과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한데 모아두기 위해 얼마나 사려 깊게 애써왔는지는 제작진이 만든 세트장 곳곳, 이를테면 책장에 놓인 책 리스트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더 커뮤니티>의 승리 조건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내게는 승자가 되는 것보다 싸우라고 만들어둔 곳에서 싸우지 않는 것, 선입견을 가지라고 세팅해둔 곳에서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것,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문제에 이분법으로 답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도전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첫날 밤 이기는 것을 포기했다. 승리를 위한 페르소나를 따로 만들지 않고 평소대로 촬영에 임했다. 가능하면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먼저 마음을 여는 그대로. 이때가 이 쇼와 관련해 두 번째로 중요한 순간이다.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쇼의 출연진으로서 비평을 할 만큼 거리를 확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가능한 범주 안에서의 진실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얘기뿐이다. 실은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이 아닐까?

<더 커뮤니티>에는 공동체의 본질과 그곳에서의 생존법에 관한 다양한 관점이 있다. 그 관점은 맥락과 역사가 있고, 각각의 출연진은 자신이 밟아온 궤적에 따라 형성된 관점을 토대로 행동하고 발언한다. 때때로 우리가 같은 곳에 있었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같은 것을 경험하고도 다른 것을 보고 기억하며 동시에 (선택적으로) 망각한다.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출연진에 대한 평가는 온라인 커뮤니티마다 크게 다르다. ‘커뮤니티’에 관한 훌륭한 메타 예능인 이 쇼가 가진 미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차이에서 시작해서 그 차이의 연원을 찾아가는 것. 각각의 관점을 살펴볼 기회를 주는 것. 서로 다른 사람을 붙여놓았을 때만 드러나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 <더 커뮤니티>는 보는 사람이 더 크고 넓어질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자신이 믿는 진실이 전부가 아님을 인지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기회다.

Writer 하미나 작가.
<아무튼, 잠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썼고, 함께 지은 책으로 <상처 퍼즐 맞추기>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 등이 있다.

Credit

  • editor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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