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새 시대, 새 농담

무엇이 웃긴가? 무엇이 웃기지 않는가? 나의 농담이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해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것.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 함께, 자주, 더 크게 웃기 위해.

프로필 by 이예지 2024.04.01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이 자주 쓰는 ‘바밍(bombing)’이라는 단어가 있다. 무대에서 코미디 연기를 했는데 관객이 전혀 웃지 않는 상황을 뜻한다. 그 단어를 배우고 나는 내가 ‘바밍’이 두려워 농담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코미디언도 아닌데 누가 내 농담에 정색하는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흘러서, 웃긴 농담이 떠오르더라도 그냥 혼자 웃고 마는 것이다.

남들과 함께 웃기 위한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내가 던진 말로 너를 웃게 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네가 어떤 것에 웃고, 어떤 것에 웃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농담이란 실패할 확률을 떠안은 채 상대와 나의 접점을 추측하는 말하기다. 그래서 농담을 건네야 할 청자의 수가 많거나 웃음을 세일즈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청중이 무엇에 웃지 않는지(또는 웃지 못하는지)에 대한 추측을 하기보단 어떤 기술로 그들에게서 웃음을 끌어낼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텔레비전 코미디 쇼가 꾸준히 ‘비하’와 ‘희화화’ 논란에 시달리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코미디 쇼의 수신자는 ‘불특정 다수’다. 1980년대의 텔레비전 코미디를 생각해보라. 지적장애인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 ‘영구’와 ‘맹구’,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나타나 흑인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던 ‘시커먼스’는 재현 윤리에 대한 고민 없이 웃음을 만들고 그것을 대중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공하는 코미디였다. 그들의 흥행을 지표로 삼게 된 한국 코미디는 시대가 가진 인식론적 한계마저 코미디 장르의 관습으로 만들고, “웃기면 그만”이라는 입막음에 가까운 변론 또한 “개그는 개그일 뿐”, ‘프로불편러’ 낙인찍기 등으로 계승했다.

지난해 부활한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니퉁의 인간극장’은 이제 막 그 계보 위에 이름을 올린 작품이다. 극의 주인공 ‘니퉁’은 한국 남성과 결혼해 농촌에 정착한 필리핀 이주 여성이다. ‘니퉁’은 서툰 한국어 실력을 지녔지만 은어와 비속어만큼은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그는 무뚝뚝한 남편에게 시도 때도 없이 섹스어필하고, 시어머니의 하대에 ‘눈치 없음’을 무기로 맞선다. <개그콘서트> 제작진은 언론 인터뷰에서 “‘니퉁’이란 캐릭터를 통해 가부장적인 시어머니를 희화화하는 것이 작품 의도”라 밝혔지만,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희화화되는 것은 ‘니퉁’의 소수자성일 뿐이다. 고통받는 며느리 신파극이 그 자체로 고발 기능을 하는 시대도 지났고, 국내 이주 여성들의 삶 역시 정착 단계를 벗어났지만 ‘니퉁의 인간극장’은 과거의 코미디 관습에 갇혀 “소수자의 삶을 가시화한다”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질문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니퉁’이란 캐릭터가 가진 문제점은 ‘니퉁’을 연기하는 코미디언이 유튜버 쯔양의 채널에 출연하며 확산됐다. 필리핀 여성 ‘니퉁’으로서 ‘베트남 음식 먹방’에 참여한 코미디언은 촬영 도중 갑자기 의상을 갈아입고 메이크업도 지우고 나타나 자신이 사실은 ‘한국 토박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1천만 명에 육박하는 이 채널의 구독자 중에 필리핀인과 베트남인이 없을까?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니퉁’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며 피부색과 서툰 발음을 흉내 내는 것이 어떻게 ‘코미디’가 될 수 있냐며 분개했다.

‘가시화’는 어떤 문제를 드러내고 인식시키는 과정이다. ‘희화화’는 그 문제를 조롱하고 경시하는 행태다. 이 둘을 의도적으로 혼동하는 코미디를 두고 우리는 ‘나쁜 코미디’라 말한다. 코미디가 ‘다른’ 존재를 가시화하고 ‘다른’ 존재가 겪는 아이러니를 희화화하고 싶다면 가장 쉬운 방법은 그 ‘다른’ 존재에게 그 권한을 양도하는 것이다. 방송인 조나단이 출연한 유튜브 콘텐츠 <힙합 흑수저>는 꽤 괜찮은 예다. 그는 흑인 힙합 뮤지션처럼 형광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치아에 골드 그릴즈를 낀 채 “한국 음식 최고!”를 외친다. 또 ‘흑형’, ‘흑역사’ 같은 말이 나오면 발끈해서 전라도 사투리로 화를 낸다. 콩고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20대 청년 조나단 욤비의 코미디 화법이다. 춤에도 랩에도 재능이 없는 조나단은 타 인종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지만 흑인 음악과 패션에는 열광하는 대중문화를 자신의 몸에 투사하며 본인이 직접 겪는 차별 문제를 농담 속에서 날카롭게 드러낸다.

텔레비전에서 몰락한 한국 코미디는 유튜브에 정착하며 좀 더 자유로운 시도를 펼치는 중이다. 과거의 기준에서 보자면 조나단의 <힙합 흑수저>나 트랜스젠더 크리에이터 풍자의 <또간집> 등은 소수자가 직접 마이크를 들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코미디를 펼친다는 점에서 무척 ‘래디컬’한 쇼다. 그러나 유튜브 코미디에서도 장벽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코미디 전문 레이블 ‘메타코미디’가 만든 유튜브 채널 <메타코미디클럽>은 코미디언 한명이 소극장 무대에서 즉흥 공연을 하면, 객석에서 공연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한 또 다른 코미디언이 그 다음 차례를 맡는 스탠드업 코미디 쇼다. 애청자인 나는 지난 송년 특집 에피소드에서 이전 에피소드에선 볼 수 없던 새로운 호흡을 포착했다. 여느 때처럼 시종일관 낄낄대던 코미디언들이 키 130cm의 저신장 장애를 가진 코미디언 김민석이 등장하자 모두 곤란한 표정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김민석은 그런 반응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준비한 콩트를 최선을 다해 펼친다. 차를 옮겨달라는 전화에 아동용 장난감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고, 가상의 연인에게 키스하기 위해 높은 의자에 올라가는 등 주로 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활용한 극본이었다.

그가 무대에서 내려간 뒤 객석의 모습은 더욱 흥미롭다. “웃어도 돼?”라고 묻는 사람, 고약한 얼굴로 웃음을 참는 사람,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기 위해 컵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개그맨 시험 같이 봤던 형이야”라며 어색하게 화제를 전환하는 사람까지. 장애와 장애인을 대하는 사회의 서툰 태도가 객석을 지배하는 것까지도 김민석의 코미디인 셈이다. 그러다 뒤이어 무대에 오른 코미디언이 연기 도중 말을 더듬는다. 그러자 객석에서 바로 “절었다!”라는 말과 웃음이 함께 터져 나온다. 장애를 직접 마주하는 것은 어려워하지만, 장애 비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쉬운 우리 사회의 익숙한 유머다.

신강수는 코미디언 김민석과 같은 장애를 가진 배우다. 그는 KBS2의 스탠드업 코미디 쇼 <스탠드 업!> 에 출연해 얼굴을 알렸지만, 신강수의 재능이 빛난 곳은 신파적인 배경음악을 삽입한 방송이 아닌 연극 무대 위다. 신강수는 무대를 시작하기 전 비장애인이 절대 다수인 관객에게 유의 사항을 안내한다. “저를 보고 ‘웃어야 돼, 말아야 돼?’ 생각하는 분은 차별과 편견이 가득한 분입니다. 저를 보고 갑자기 ‘너무 감동적이야’라고 하시는 분 역시 이상한 분입니다. 그러니 그냥 봐주세요.” 이후 시작되는 코미디는 ‘웃긴 장애인이 하는 웃긴 장애 이야기’다. 그는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를 연기하며 자학으로 세상을 비웃고, 당사자의 발화만큼 소재적 ‘금기’를 해제하는 강력한 무기가 없음을 증명한다. 이는 장애에 대한 ‘금기’를 만들어 선을 넘네, 마네, 눈치 보는 척하는 코미디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성취다.

사람은 누가 농담을 던지면 웃거나, 웃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보며 웃는가?’와 ‘나는 무엇을 보며 웃지 않는가?’이다. 자신의 웃음에 대해 자문할 때, 우리는 굳이 코미디 극장의 객석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위치와 시점을 자유롭게 상상하며 옮겨보자. 나를 웃기기 위해 나는 어떤 농담을 할 것인가? 내 농담에 절대 웃어주지 않을 사람이 누구일 것인가?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사회의 동료로서, 농담을 단련하는 것은 이제 당연한 절차다.

Writer 복길
여성들이 즐기는 대중문화와 서브컬처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에세이집 <아무튼, 예능>을 썼고, 서브컬처 디제잉 공연 <슬픔의 케이팝 파티>를 기획했다.

Credit

  • editor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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