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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윤단비가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

“영화는 박찬욱, 봉준호 같은 사람이나 하는 거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감독 지망생 윤단비는 항변하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제가 여자라서 이렇게 섬세한 영화를 만듭니다’라고 증명하지 않아도 수긍이 되는 여성 감독의 선택지가 됐다. 국내외 평단과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첫 장편 <남매의 여름밤>은 그 시작이다.

BYCOSMOPOLITAN2021.03.03
 
드레스 24만 8천원, 셔츠 16만8천원 모두 듀이듀이. 귀고리 5만원대 레이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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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특히 독립영화 장르에서 많은 여성 감독이 주목받고 있어요. 감독 개개인의 개성을 조명하기보다는 필요 이상으로 ‘여성’이라는 키워드 아래 종합체처럼 다루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봤어요. 그냥 ‘윤단비’가 아니라 ‘여성 감독의 계보’, ‘대만 뉴웨이브의 계보’ 등 각종 계보로 묶일 때가 있어요. 어떤 환생 동물처럼요. 하하. 물론 제가 그런 감독들을 좋아하고 영감을 받았기에 제 안에 흡수가 됐을 테니 종합체는 종합체겠죠. 아직까지는 프레임을 바꿔나가는 과정이지만, 그렇게라도 영화계가 프레임을 인식하고 더 많은 여성 감독이 주목받는다는 것 자체도 변화라고 생각해요. 소설 〈1Q84〉처럼요. 
 
여성 감독에게 부여되는 계보 역시 장르적 특성을 고려하기보다는 여전히 ‘여성’으로 국한되는 게 아쉬운 부분이죠. 남자는 남자임을 증명하지 않아도 돼요. 제가 남잔데 영화를 이렇게 섬세하게 만들 수 있고, 제가 남자니까 액션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여자는 자기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순간들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 내가 왜 이 영화를 잘 만들 수 있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 뭔지 존재감을 증명해야 하니 자기 검열이 생겨요.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보다는 미션 하나가 더 부여된 느낌이에요. 그런 미션은 장애물이자 성장하는 원동력이 돼요. 계속 극복해나가려고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여성에게 증명을 요구하는 시대에 자신을 증명해낸 건 칭찬받아 마땅하죠. 주목받는 여성 감독이 늘어나는 게 더욱 반가운 이유예요. 제가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했을 때 저희 아빠가 “영화는 봉준호, 박찬욱 같은 사람들이 하는 거다. 변영주, 임순례 감독님 말고 여성 감독이 또 누가 있냐”라고 하셨거든요. 분명히 많은 여성 감독이 있었지만, 저도 딱히 항변하진 못했어요. 그때만 해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감독님들이 없었는데, 지금은 너무 많은 감독님이 남성성을 갖고 있지 않아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증명해주셨어요. 저도 영화를 찍을 때 그분들이 제 앞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기회가 온 거라 생각해요. 그런 흐름 없이 여성이자 감독인 제가 덜컥 영화를 찍어야 했으면 더 두려웠을 거예요. 
 
여성 감독은 늘 있어왔거든요. 영화계에서 자본의 투입 같은 기회가 남성 위주로 돌아가다가, 여성 감독들에게도 기회가 돌아오게 된 계기는 뭐였을까요? 현장에서 여자 감독에 호응하고 주목받는 경우보다, 영화진흥위원회나 영상위원회 출신 여자 감독이 많아요. 지금도 여전히 도제 시스템 아래 연출부부터 조감독까지 올라가다가 ‘입봉’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여성이 감독이 되는 일이 조금 더 어려울 거예요. 지금은 지원 프로그램도 많고 연출할 수 있는 기회도 늘어났으니, 여성 감독이 더 많이 등장할 수 있는 시기라 생각해요. 
 
여전히 남성 스태프가 더 많은 촬영 현장에서, 여성 리더로서 현장을 리드하는 일상은 어때요? 감독이 현장에서 제일 권위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대신 저는 ‘오케이’를 결정하는 길잡이잖아요. 오케이 사인을 내렸을 때 스태프들이 불안감 없이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영화 촬영 현장은 배우와 스태프가 서로에게 노출돼 상처받기 쉬운 환경이거든요. 저는 그런 환경 속에서 고압적으로 부담을 주기보다는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다정하게 해내고 싶어요. 그렇게 현장의 다정한 보호자가 되고 싶어요. 
 
감독님을 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존재가 있다면요? ‘단군큰모임’이라는 모임이 있어요. 풀어 쓰면 ‘단군 아래 가장 큰 여성 작가 모임’인데, 김하나 작가님이 팟캐스트로 만난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며 ‘큰일’을 도모해요. 김이나 작사가, 수신지 웹툰 작가, 김보라 감독, 은희경·김초엽·이슬아·김금비 작가, 장혜영 의원 등 멤버가 40~50명쯤 되는 것 같아요.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으로 소통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좋은 점은 무신경한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랄까, 타인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는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않아요. 각자의 개성이 분명한데, 서로에게 무해하고 안전한 세계인 거죠. 무심코 어떤 자리에 갔다가 ‘오늘 어떻네 저렇네’ 느닷없이 평가를 받거나 하는 거슬리는 일이 없는 거죠. ‘가만히 있다가 봉변당하는’ 강도가 없다고 해야 할까, 아무도 나를 위협하지 않아요. 멤버들끼리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얘기를 하곤 해요. 이렇게 멋있고 따뜻하고 섬세한 사람들이 있는 세계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이 제게 자극을 주죠. 연대한다는 느낌이 너무 멋있어요. 
 
어떤 큰일을 하실 거예요? 협업을 많이 해요. 장혜영 의원님의 의정 보고서를 만들 때 이슬아 작가님이 글을 쓰고 다른 작가님이 브랜딩을 해주면서 협력하는 식이에요. 각자의 영역이 합체를 하는 거죠. 저는 영화를 할 때 그래픽 툴로 작업하는데, 일러스트 작가와 같이 작업을 할 수도 있겠죠. 이렇게 서로 도우면서 연대하는 게 엄청난 역량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함께 모여서 뭔가를 타도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단단하게 해주고 계속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어요. 
 
영화에 대한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정작 윤단비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한 대목은 별로 없더라고요. 어떤 사람이에요? 같은 질문을 대학교 2학년 때 배우에게 처음 받아봤는데요, 그 사람이 어떤 감독이 한번 만나보자고 해서 만났는데, 영화 얘기는 안 하고 인도 여행에서 생긴 에피소드만 늘어놓더래요. 실은 영화에 출연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야기가 재밌어서 이 사람이 만든 영화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영화에 출연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게 그런 질문을 한 건데, 말문이 막혀서 회의감이 들었어요. 
 
영화는 그렇게 특별한 사연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데 나는 특별한 사연 하나 없구나 싶어서요? 전 항상 제가 특별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예전에 친구에게 히피처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살고 싶다고 하니, “너는 그렇게 못 살걸” 하는 반응을 보이길래 발끈한 적 있었는데 오히려 제가 절 몰랐던 거더라고요. 저는 영역 동물처럼 나만의 방이 필요하고 혼자만의 시간에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거든요. 영화를 만들 때 좋은 건, 나에 대해 더 알게 된다는 점이에요. 내 생각, 진짜 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에서 저도 함께 크더라고요. 그래서 제게는 영화가 삶의 지표나 분기점이 돼요. 
 
〈남매의 여름밤〉은 가족 이야기죠. 단편작 〈생활의 길잡이〉 〈불꽃놀이〉에도 남동생이 등장해요. 실제로도 남동생이 있어요? 영화와는 달리 외동이에요. 할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요. 단편영화를 찍을 땐 주인공을 항상 남자로 설정했는데, 다 찍고 나니 이상하게 솔직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어요. 돌이켜보면 자전적인 이야기로 비치는 것이 싫거나 자신을 드러내는 게 무서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남매의 여름밤〉은 덤덤하고 진솔하게 만들고 싶었죠. 자전적 이야기는 20%도 안 되지만요. 
 
자전적 이야기가 아니라면, 주인공이 사춘기 소년일 수도 있었는데 소녀 캐릭터로 설정한 이유가 있나요? 막연히 사춘기 소녀가 등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걸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갔어요. 여자 캐릭터라면 제가 조금 더 결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요. 시나리오 속 캐릭터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비로소 영화를 찍기 시작했는데, 할아버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주인공인 ‘옥주’의 시각을 빌리기도 했어요. 살아보지 않은 세계에 대해 안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 사람의 감정을 다 안다고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아서요.  
 
〈남매의 여름밤〉은 특별한 서사는 없지만, 진짜 현실의 사람들이 나눌 법한 사실적인 대사들이 기억에 남는 영화예요. 고모 ‘미정’이 남편 얘기를 하면서 “나 괴롭히려고 태어난 요괴 같아”라고 하는 식의 생생한 대사는 어떻게 구상했어요? 제가 세계를 거시적으로 위에서 바라보기보다는 옆에서 바라보는 느낌이에요. 광주 출신인데, 어릴 때 보고 자란 것도 소시민의 어떤 전형이었거든요. ‘요괴 같다’는 대사는 저희 엄마가 아빠에 대해 얘기할 때 실제로 했던 말이에요. 싸우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 너무 웃겨서 기억해뒀죠. 봉준호 감독의 〈옥자〉에서 ‘미자’가 연구소 직원들이 가져온 맥북을 보며 하는 대사를 좋아하거든요. 으레 “이거 맥북이에요?”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레티나 디스플레이?”라고 하잖아요. 엄청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어서 웃긴 포인트죠. 저 역시 굉장히 구체적으로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 일상에서 진짜 할 법한 실감 나는 대사를 쓰고 싶어요. 
 
영화에서  결혼, 한 부모 가족, 노인 문제 등 여러 가지 사회 이슈를 다루고 있어요. 새 작품을 하게 되면 어떤 이슈를 다루고 싶나요? 연애와 가족 이야기요. 
 
또 가족 이야기요? 가족은 세계의 축소판 같아요. 사람이 연애를 할 때도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잖아요. 내가 이런 면도 있고 이런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 성장하는 것 같거든요. 자신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연애와 가족이 결합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둘은 이 사람이 단점도 많고 결점도 많지만 그래도 사랑한다는 점에서 통하잖아요. 아이유가 콘서트에서 “세상이 넌더리가 나도 우리는 사랑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내가 만든 영화 속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윤단비(영화감독) 
SF급 대서사시 꿈을 자주 꾸는 몽상가. 현실에서 그가 만드는 영화는 담담하게 일상을 담아내지만, 그 속엔 분명 가족이라는 세계의 축소판이 있고 평범한 영웅도 있다. 그러니 〈남매의 여름밤〉은 인간사에 대한 SF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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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하예진 / 김예린 / 김지현 / 류진(프리랜서)
  • art designer 박유진
  • photo by 표기식
  • Stylist 엄아름
  • Hair 배경화
  • Makeup 김부성
  • Assistant 김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