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대리, 좀 화가 많은 캐릭터야.” “그 여자 좀 세더라.” 직장 생활을 하면 누구나 한 번쯤 삼삼오오 모여 이런 말을 하거나 듣게 된다. 한편 회사 밖에서는 친구들과 모여 직장에서 겪은 ‘분노 유발’ 에피소드를 성토하며 “나이 먹을수록 화만 느는 것 같아”라는 말을 한다. “살인 한 번이면 참을 인 세 번을 면한다”란 SNS 농담에 씁쓸하게 웃는 현실. 학창 시절 25살에 부임했던 여자 선생님들이 몇 번의 스승의날을 거치는 동안 학교에서 ‘호랭이 선생님’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팅 자리에서 만난 남초 회사의 유일한 여성 임원들을 보면서 ‘많은 일을 겪었겠구나’ 하고 말없이 공감한다. 일터에서 ‘미친×’이라는 별명을 갑옷처럼 두르고 사는 여성 셋에게 그 속사정을 물었다.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이예지(가명, 29세) 씨는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회사에서 ‘예쁘장한데 싸가지 없는 애’란 말이 돈다는 건 다 알고 있어요”라며 운을 뗐다. “예전에 제가 클럽에서 노는 걸 남자 동기가 보고 소문을 퍼뜨린 거예요. ‘회사에서는 그렇게 싸가지 없더니 밖에서는 남자들이랑 잘만 놀더라’ 하는 식으로요.” 클럽에서 노는 게 업무 태도와 직결될 이유는 하등 없지만, 예지 씨는 그가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린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다. 그는 입사 직후 예지 씨에게 호감을 보이며 이것저것 챙겨줬던 동료다. “실은 일부러 회사 사람들하고 거리를 두려 했거든요. 그런데 그는 아마 제가 자신의 호의를 고마워하며 보답 차원에서 마음을 열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예지 씨는 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자신에게 대시한 직장 상사에게 알고 보니 결혼할 여자가 있었던 것. “부담스럽다고 여러 번 말했는데, 끝도 없이 들이대는 거예요. 대차게 거절하기엔 사회 초년생인지라 회사 생활에 불이익이 있을까 싶어 어물쩍 받아주다 보니 어느새 일주일에 세 번은 그와 저녁을 먹고 있었어요.” 처음 하는 직장 생활의 고충을 털어놓다 보니 예지 씨도 어느새 정이 들어 친구에게 그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참 촉이 무서워요. 어느 날 그가 근무 중에 급하게 전화 받는 걸 우연히 봤는데 말투가 어딘가 ‘쎄~’하다 싶은 거예요. 혹시나 싶어 페이스북에서 그의 계정을 찾아봤는데 7년 만난 여자 친구가 있더라고요.” 예지 씨는 아찔한 순간을 겪은 뒤 그와 불편한 사이가 돼 이직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후로는 회사에서는 어떤 사적 인연도 만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차라리 미친 년, 싸가지 없는 년 소리 듣는 게 양다리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한다더니, 딱 그 꼴이라니까요.”
회사가 워낙 남초다 보니 젠더 감수성이 제로에 가까워요. 로비를 지나다닐 때마다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느껴지거든요.
웹 드라마 PD로 일하는 박정민(가명, 31세) 씨는 날이 갈수록 회사에서 표정 관리하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상사는 일을 안 하고, 부하 직원은 일을 못하는데 화가 안 나겠어요?” 최근 정민 씨가 가장 화났던 일은 이렇다. 연출 회의에 사정상 감독이 불참하게 돼 정민 씨가 직접 피드백을 정리해 의견을 전달했는데, 50대 남성인 연출 팀장이 회의 내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회의가 끝난 뒤 정민 씨가 진행 일정이 촉박해 재차 피드백 의견을 묻자 연출 팀장은 “아, 그럼 직접 연출하든가!”라며 버럭 화를 냈다. “아니나 다를까, 나온 결과물을 보니 엉망이었어요. 보다 못해 일일이 화면 캡처해서 피드백 노트를 만들어 연출 팀장에게 전달했죠. 그런데 이번에는 태도가 180도 달라진 거예요. ‘아유, 그거 확인해봤는데 아주 꼼꼼하던데?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정민님이 워낙 똑똑하시잖아’라며 은근슬쩍 자기 일을 떠넘기려 하더라고요.” 정민 씨를 아연실색하게 만든 건 “이제 성격만 좀 고치면 되겠네”라는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평소 일터에서 늘 시니컬한 표정과 말투를 유지하는 정민 씨의 태도를 비꼰 것이다. “최근 회사에 저보다 나이 많은 남자 후배가 들어왔어요. 다른 일을 하다 진로를 바꿔서 아직 1년 차예요. 눈치도 없고 일도 못하는데 늘 능청으로 넘기려는 태도를 보여 제가 칼같이 선을 긋거든요. 게다가 은근슬쩍 제게 말이 짧아지는 경향이 있어 제 속을 긁어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상사들에게는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하고 제겐 ‘수고하셨어요’ 하는 식이에요.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자꾸 듣다 보면 묘하게 거슬리거든요.” 아이러니한 건 그런 후배에게 한마디 따끔하게 혼을 내주고 싶지만 마음껏 그러지도 못 한다는 사실이다. “한번은 일과 관련해 좀 싫은 소리를 한 적 있는데, 제가 말을 마치고 돌아서자마자 뒤에서 낮게 한숨을 쉬면서 욕설을 내뱉는 게 들리는 거예요. 갑자기 좀 섬했어요.” 요즘도 정민 씨는 책상에 앉아 혼잣말로 욕설을 중얼거리는 일이 잦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도저히 화가 풀리지 않아서다. “사실 ‘화 많은 여자’라는 말 자체도 편견이에요. ‘화 많은 남자’라는 말은 잘 안 하잖아요? 여자에게는 보다 높은 수준의 감정 노동이 요구되고, 조금이라도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금방 ‘까칠한 사람’으로 여기는 거죠.”
대기업 영업 부서에서 일하는 장민아(가명, 32세) 씨는 자칭 타칭 ‘프로불편러’이자 다혈질이다. “처음 대리를 달고 영업 부서로 왔을 때 일이에요. 제 전임자는 남자였죠. 고객사 측 직원은 직급이 사원이었는데, 어쨌든 고객사니까 어느 정도 제게 요구할 권리가 있는 건 맞아요. 그래도 고객사 미팅에서 ‘화사하게’, ‘밝고 즐겁게’ 응대해달라고 말하는 건 ‘내가 남자였어도 저런 표현을 썼을까?’ 싶더라고요.” 첫 사전 미팅에서부터 빈정이 상한 민아 씨는 그 이후 줄곧 ‘갑’의 역할을 하는 예의 그 사원과 크고 작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미팅이 있을 때마다 머리를 질끈 묶고 안경까지 쓴 뒤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나간다. 고객사에서는 ‘빙샹’처럼 일을 잘 마무리 짓는 스타일이지만, 이런저런 일이 쌓이고 쌓여 한 번씩은 뚜껑이 열린다. “얼마 전에는 그 고객사 직원이 저희 팀 부장님에게 미팅 관련해 메일을 수십 통 보내더니 급기야 직접 와서 설명을 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사원급 직원이 부장한테 오라 가라 하는 게 말이 되나요? 바로 노발대발했죠.” 고객사뿐만이 아니다. 민아 씨를 화나게 하는 일은 도처에 널려 있다. “회사가 워낙 남초다 보니 젠더 감수성이 제로에 가까워요. 로비를 지나다닐 때마다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느껴지거든요. 정말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쳐다봐요. 그나마 요즘엔 마스크를 쓰고 다녀 마음껏 소리 내어 욕을 하기도 하죠.” 최근에 민아 씨는 친한 남자 동기에게 우연히 자신의 이미지가 어떤지 물었다가 “인권 운동가…?”라는 말을 들었다. “제가 평소에 여성 인권이나 성 소수자 인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 편이거든요. 제 입장에서는 너무 상식적이고 당연한 얘기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남들 눈에는 제가 이미 ‘파이터’가 돼 있는 거예요. 웃기지 않나요?” 민아 씨는 평소에 화를 많이 내는 성격은 아니다. “마음 놓고 ‘진짜’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정작 몇 없어요. 그렇지만 저 같은 캐릭터도 별로 없다 보니 유난스럽게 여겨질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