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셔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렇게 기른 건 처음이죠. 인생 최고의 길이인 것 같아요. 기르는 과정은 좀 힘들더라고요.
‘거지존’이라고들 하잖아요. 그 시기를 견뎌내는 게 힘들죠.
아, ‘거지존’이라는 말이 있나요? 처음 들었어요! 지금 그 시기인 것 같은데. 하하. 많은 여성이 “한번 단발로 자르면 다시 기르기 힘들다”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하는 스타일링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머리카락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자라는 것도 아니니까,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런 여러 가지를 공감하게 되는 계기로 삼고 있어요.
촬영 중인 영화 〈외계인〉(가제)의 캐릭터를 위해 머리를 기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어떤 역할인지 소개해줄 수 있나요?
일단, 머리를 길러야 하는 역할입니다. 하하. 영화 〈택시운전사〉 때도 장발 캐릭터였지만, 그때는 동시에 여러 작품을 하는 중이라 가발을 착용했어요. 이번에는 꼭 제 머리로 길러서 임해보고 싶더라고요. 자기 머리로 촬영할 때 제일 자연스럽잖아요. 역할에 몰입하기도 좋고.
〈봉오동 전투〉 이후 1년의 시간이 지났어요. 워낙 다작의 아이콘이기도 했기 때문에 팬들에게는 이 텀이 꽤 길게 느껴질 것 같아요. 스스로도 조급한 마음이 들지는 않나요?
최근에는 “배우 생활을 그만둔 거 아니냐”라는 말도 들었어요. 하하. 조급한 마음은 없는데, 빨리 작품으로 만나뵙고 싶은 마음은 있죠. 팬분들과 소통할 때도 ‘그냥 사는 얘기’를 하기는 좀 뭐하잖아요. “아침에 뭐 먹었어요” 이런 얘기를 하기는 좀 그러니까. “이런 작품을 준비했어요. 기대해주세요”라는 이야기를 드릴 수 있는 시간이 기다려지기는 해요.
복귀작으로 〈외계인〉(가제)을 고른 이유가 있나요?
“어떤 감독님이랑 함께해보고 싶어?”라는 질문의 답에 꼭 빠지지 않는 분이 바로 최동훈 감독님이셨어요. 이번에 기회가 찾아온 거죠. 예전부터 꿈꿔왔던 일이기 때문에, 이번에 같이 작업하게 되니 소름이 돋더라고요.
흥행, 인기 이런 요소에 대한 불안은 없나요?
흥행에 대한 부담을 애써 가지려는 편은 아니에요. 그냥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이 오히려 부담되는 것 같아요. 과정이 좋으면 결과도 좋게 따라오더라고요. 그 과정을 어떻게 더 좋은 과정이 되도록 만들어갈지에 대해 많이 고민하는 편이에요. 영화가 완성된 다음부터는 고민을 덜하는 스타일이죠.
지난 연말 LA에서의 휴식기는 어땠나요?
여행의 일종일 수도 있는데, ‘살아봤다’에 가까운 것 같아요. 특별히 무언가를 했다기보다, 낯선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한국과 좀 떨어져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사진도 많이 찍으러 다니고. 나름대로 가벼운 시간을 보냈다고 해야 할까요?
치열하게 살아온 일상에서 벗어난 상황이, 영화 〈돈〉에서 바하마로 여행을 떠났던 ‘조일현’의 모습과 오버랩되지는 않았나요? 무언가 현실과 조금은 거리를 두고 싶은, 그런 마음 말이에요.
그러게요. 2박 3일, 일주일이 아니라 몇 달의 시간이었으니까요. 제법 길었던 시간만큼 달려온 길을 좀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시간을 천천히 쓰는 연습을 해보기도 했고요.
한국에 오고 나서의 일상은 어떤가요?
코로나19로 많은 것이 달라졌잖아요. 사실 저는 거의 집에 있는 편이기 때문에 일상의 큰 변화는 없는데, 환경에 대해서는 확실히 더 고민하게 되는 때가 온 것 같아요. 전 세계가 멈추게 된 시간이잖아요. 지구의 역사로 봤을 때는 너무나 ‘잠깐’의 시간이지만. 이 잠깐 동안에 자연이 다시 돌아오고 환경이 복구되는 것을 보면서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요. 환경에 대한 목소리를 더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티셔츠, 팬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그런 편이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좀 피곤해해요. “이거 해야 돼”, “저거 해야 돼” 이런 게 많으니까요. 강박까지는 아닌데.
환경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데도 일관된 철학이 느껴져요. SNS를 통해 세계의 환경 이슈를 늘 알리고 있고, 최근에는 그린피스와 함께하는 #용기내챌린지를 통해 플라스틱 감축 운동에 앞장서고 있죠.
#용기내챌린지를 하면서 대형 마트에 ‘용기를 내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굉장히 빠른 시일 내에 롯데마트로부터 “플라스틱 감축 운동에 동참하겠다”라는 답변이 왔어요. 대형 마트의 이런 행보는 아시아 최초라고 하더군요. 이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워서, 진짜 무슨 상 탄 것처럼 지인들과 얼싸안고 기뻐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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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의 영향력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뿌듯하고 감사한 일이죠. 오히려 실질적인 영향력을 느낄 때는 이런 경우예요. 영화 촬영 현장에 밥차가 왔는데, 한 스태프분이 제 팬이라고 하시면서 자기 개인 식판을 직접 챙겨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오빠 때문에 이렇게 하게 됐어요” 하는데, 그때 확 와닿았어요.
인스타그램에 자기만의 감성을 잘 풀어내는 것 같아요. 사진뿐 아니라 글귀도 인상적이에요. 무언가 오래 가슴에 남는 한 문장이랄까요?
예전에는 진지하게 더 많이 고민하고 글을 남기고 했는데, 요즘에는 시간을 많이 들이지는 못했어요. 머리 말리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좋은 생각을 남긴다거나 하죠.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이죠. “흰머리가 늘수록 너와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껴서. 너는 또 어떤지” 같은. 하하. 머리 말리다가 흰머리가 보여 나온 문장이죠. 머리 말리는 게 꽤 오래 걸리잖아요. 드라이어를 들고 머리 말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그럴 때 글로 남기게 되는 것 같아요.
언젠가 이 문장들을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책으로 엮어봐도 좋겠네요.
사진은 재미있게 찍고 있는데, 글은 깜냥이 안 되지만 원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한 번쯤 고민해봐야겠네요. 하하.
뷰티 브랜드 비오템의 모델로 활동하고 있잖아요. 옥외 광고도 늘 화제죠. 배우로서 말고 화장품 모델로서 나를 마주하는 기분은 어떤가요?
옥외 광고에 대한 반응이 굉장히 뜨겁더라고요. 비오템은 신기하게도, 제가 아주 예전부터 사용해왔던 브랜드라 더 자연스럽게 어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평소 좋아했던 브랜드기도 하고, 최근 ‘워터러버 캠페인’ 등 브랜드 차원에서 환경에 대한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것에도 함께 소리를 낼 수 있어 굉장히 즐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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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에서도 자기만의 원칙이 있을 것 같아요. 일단 세안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에요. 아침저녁으로 꼼꼼히 세안을 하고, 기초 제품을 꾸준히 바르는 것에 신경 쓰죠. 제품을 잘 바꾸지 않는 타입이에요. 한번 나랑 잘 맞다고 여긴 제품을 계속 이어 사용하는 편이죠.
즐겨 쓰는 제품이 궁금해지네요.
비오템 모델이 되기 전부터 써왔던 ‘화이트 필’ 제품을 굉장히 좋아해요. 여행지에도 늘 휴대하고 다니죠. 최근에는 포스 수프림 원 에센스로 안티에이징 관리를 하기 시작했고요.
이달 코스모는 20번째 생일을 맞이했어요. ‘스무 살’은 꽤 상징적인 나이잖아요. 준열 씨에게 20살은 어떤 의미였나요?
저에게 20살은 인생의 쓴맛을 본 해죠. 고등학교 때의 저는 ‘철저함’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늦잠도 많이 자고, 지각도 자주 하고 그런 편이었죠. 그 결과 재수를 하게 됐고 ‘아,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라는 걸 느끼게 된 것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만 하면 대학은 누구나 다 가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죠. 매일 재수 학원에 모여 똑같은 밥을 먹으면서 생각했어요. ‘이러다가는 삼수도, 사수도 하겠구나.’
인생의 첫 실패를 20살 때 경험한 거네요.
첫 실패이자, 시작이자, 제 삶의 중요한 기반이 된 시기인 것 같아요. 저는 제 인생의 청춘을 그때부터라고 보고 있어요. 진지하게 저만의 인생 철학을 세워나가기 시작했고요.
그 청춘의 시기 덕분에 배우라는 꿈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네요.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어요. “꿈은 배우다”라기보다는 “배우가 돼서 무엇을 해야 한다”가 돼야 하는 것 같아요. 배우로서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 돼야 하고,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드리는 대변인이 돼야 한다는 꿈을 가지고 있어요. 환경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도 그 일환이죠. 제 작은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분들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나이 들어가고 싶나요?
배우로서뿐 아니라, 어른으로서 말이에요. 자연스러운 거죠. 요즘 보면 부자연스러운 게 너무 많잖아요. 억지로 젊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보기 좋게 늙어가는 어른이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