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친이 남긴 건 흑역사뿐일까? 이별이 나를 성장시킨 진짜 이유
엑스가 남긴 것이 ‘아련한 추억’이나 ‘지우고 싶은 과거’ 따위만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총체적으로 나를 성장시킨 밑거름이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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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방 청소를 하다 침대 밑, 케케묵은 먼지 더미 속에서 상자를 하나 발견했다. 상자를 열어보니, 나의 20대가 그대로 펼쳐졌다. 귀엽고 풋풋한 연인들이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 함께 갔던 공연 티켓과 영화 티켓 등 지나간 연애의 잔해가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그중 부치지 못한 편지 하나를 펼쳐 들었다가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게 내가 쓴 글이라고? 고작 20대 초반의 내가 이렇게나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장을 구사했다고? 믿기지 않았다. 하긴, 스물셋의 나와 서른넷의 내가 같은 사람일 리 없지. 이 추억의 증거물들을 보니, 연애가 나를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선명하게 보였다. 돌이켜보면, 연애는 언제나 나를 확장시켰다. 취향적으로든, 인격적으로든. 첫 번째 연애 때는 난생처음 힙합에 빠지게 됐다. 상대가 좋아했으니까. 두 번째 연애 때는 필름 카메라를 배웠다. 함께 출사를 다니고 싶었으니까. 세 번째 연애에서는 맛있는 음식에 눈떴다. 미식가인 상대의 입맛에 맞추다 보니 어느새 전국 맛집을 꿰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상대의 세계를 조금씩 내 안에 들이면서 더 수용적이고, 유연한 사람이 되어갔다. 신기한 건, 이별 후에도 그것들이 여전히 내게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나는 힙합을 들으며 출근 준비를 하고, 어디론가 떠날 때마다 필름 카메라를 챙기며, 맛집이라면 혼자서도 줄을 서서 먹는 어른이 됐다. 그들은 떠났지만, 그들이 내게 열어준 세계는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좋든 싫든, 연애는 우리를 바꾼다. ‘내가 질투심이 이렇게 심했나?’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렇게 너그럽고 배려 깊은 사람이었다니!’ 기특할 때도 있다. 때로는 낯선 나와 마주하게 되기도, 때로는 상대가 꺼내 보여준 내 안의 가능성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연애가 우리를 어떻게 바꾸는가는 각자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연애를 통해 더 성숙해진다.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배운다. 반면 어떤 연애에서는 자존감이 낮아지고, 종종 자기다움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궁금했다. 연애를 시작하고 난 후에 우리의 무엇이 달라졌을까?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시기의 연애를 지나온 4명의 여자에게 물었다.
대기업에서 홍보 PR을 담당하는 A는 얼마 전, 지지부진한 연애를 끝냈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밀양식 국밥을 앞에 두고서 그녀에게 물었다. “2년간의 연애가 네게 남긴 건 뭐야?” A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만의 기준이 생겼달까? 전에는 ‘이런 남자를 만나고 싶다’라는 기준만 있었지, ‘이런 남자는 만나지 말자’의 기준은 딱히 없었거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관대한 편이잖아. 웬만하면 다 맞춰주고, 이해하려 하고. 근데 이번 연애가 끝나면서 깨달았어. 다른 건 다 참아도 내가 절대 못 참는 게 뭔지.” “그게 뭔데?” “회피형은 절대 안 된다는 거.” A는 국물을 식혀가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서로 감정이 안 좋을 때, 나는 무조건 대화로 풀어야 하는 사람이야. 말하지 않으면 안에서 곪으니까. 근데 그는 문제가 생기면 일단 잠수를 탔어. 며칠씩 연락이 안 될 때도 있었고. 처음엔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자책도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냥 그 사람의 패턴이더라고. 불편한 감정 앞에서 도망가는 게, 그 남자의 방식이었어.” A는 이번 연애를 통해 자신이 관계에서 무엇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 처음으로 명확하게 알게 됐다고 했다. “힘든 연애였지만, 덕분에 다음 연애에서는 초반에 분별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걸 배운 것만으로도 이 연애가 내겐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
간판도 없는 을지로의 작은 와인 바. 스타트업에서 기획자로 일하는 B를 만났다. 그녀는 1년간 연애 중인 남자 친구와 내년 가을,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연애는 요즘 어때?”라는 질문에 B는 잠시 와인잔 너머를 응시하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연애가 나를 많이 바꾼 것 같아. 좋은 쪽으로!” B는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연애를 하면 늘 불안했어. 상대의 작은 말투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감정 기복도 심했던 것 같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애정 결핍이 좀 있었던 것 같아. 근데 지금 남자 친구는 내가 어떤 상태든 간에 일단 받아주더라고.” “어떤 식으로?” “내가 예민하게 굴어도 똑같이 예민해지지 않고, 내가 차분해질 때까지 기다려줬어. 처음엔 ‘이 사람 뭐지?’ 싶었어. 내가 감정을 쏟아내도 별 반응이 없었으니까.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알겠더라. 그는 내게 무관심한 게 아니라, 그저 감정의 기복이 적은 사람이라는 걸.” “한마디로 무던한 사람?” “맞아. 그래서 감정적으로 내게 안정감을 줘.” B는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동안 내 연애는 늘 롤러코스터 같았어.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것처럼 좋았다가도 금세 불안했지. 근데 요즘은 이보다 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어. 내가 아무리 감정적으로 굴어도, 이 사람은 바다처럼 잔잔하고 고요해. 그게 내가 이 사람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 같아.”
패션 브랜드에서 MD로 일하는 후배 C를 만난 건 서촌의 한 카페에서였다. 그녀는 1년 전 끝난 연애에 대해 담담하게,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3년 정도 만났는데, 생각해보면 그 시간 동안 저는 점점 작아졌던 것 같아요.” C의 전 남자 친구는 겉으로는 다정했다. 늘 그녀를 데리러 왔고, 아무 날도 아닌데 크고 작은 선물을 내밀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그녀를 깎아내리곤 했다. “연애를 하면서 그 사람이 제게 가장 많이 한 말이, 별것도 아닌 일로 제가 예민하게 군다는 거였어요. 또 나 같은 성격의 사람은 자기 아니면 누가 받아주겠냐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던지곤 했죠.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는데, 계속 듣다 보니까 어느 순간 진짜 내가 그런 사람처럼 느껴지더라고요.” C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 가스라이팅이었는데, 그땐 그걸 몰랐어요. 늘 선물이나 표현도 잘해주니까 절 사랑한다고 생각했죠.
Credit
- 에디터 김미나
- 글쓴이 이봄
- 일러스트레이트 리무
- 디지털 디자이너 변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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