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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카리스마, 문소리

문소리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엄마가 돼도 배우임을 포기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만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영역을 확장시킬 뿐. 문소리가 쌓은 20년의 시간은 이토록 견고하다.

BYCOSMOPOLITAN2020.08.23
오늘 제주도에서 올라오자마자 촬영장에 왔어요. ‘시차 적응’하느라 힘들었죠? 
하하. 제주도에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밥 해 먹고, 돌고래 보면서 사니까. 모드를 바꾸는 게 쉽지 않네요. 제주도에 간 지 4주 됐어요. 8월 말까지 있을 것 같아요. 애가 10살인데, 더 크기 전에 셋이서 추억을 만들어보고 싶어 갑자기 내려가게 됐어요. 부산 출신이라 바다도 좋아하고, 걷는 걸 좋아해요. 애도 코로나19 때문에 학교도 못 가고, 학원도 안 보내니까 집에 내내 있었거든요. 저희 엄마가 시니어 모델을 하는데, 7월 말에 패션쇼에 서게 돼 너무 바쁘셔서 애를 맡기기도 좀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일에 집중하시라고 제주도에 내려간 거죠.
 
어머니가 모델 일을 하시다니! 자랑스러울 것 같아요.  
네. 저랑 달리 엄마는 다 큼직큼직해서 포스가 있어요. 즐겁게 하고 계시죠.
 
오늘 촬영 콘셉트는 〈코스모폴리탄〉 초대 편집장인 헬렌 걸리 브라운에게서 모티브를 얻었어요.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갈 수 있다”라는 말을 남긴 걸로 유명하죠. 여전히 유효한 말 같아요? 
그럼요. 착하지 않은 걸 나쁘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어떤 틀에 갇히지 않고 다양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대가 왔잖아요. 우리 딸도 개성을 갖고 주관 있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선 나도 딸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난해가 데뷔 20주년이었죠. 〈코스모폴리탄〉보다 먼저 20주년을 맞이했는데, 기분이 어땠어요?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인생이라는 건 내려갈 때도 있고 올라갈 때도 있죠. 어느 배우나 그렇지만, 저는 전보다 더 확장된 느낌이 들어요. 연출도 공부하고, 연출한 영화가 개봉도 했으니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며 즐길 수 있는 폭이 넓어졌죠. 그래서 좋아요. 예전에는 캐릭터만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보다 더 넓게 영화판을 즐길 수 있게 됐으니까요.
 
반박할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감이 있는 배우예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어요?
아뇨. 청순하거나 귀여운 배우라는 틀에 갇혀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아 다행이에요. 주관이 뚜렷한 감독님들의 강렬한 작품을 하면서 많은 걸 배웠기 때문에 작품 안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었죠. 더 겁없이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고요.
 
인터뷰를 준비하다 어제 영화 〈바람난 가족〉을 봤어요. 그 영화에 출연할 당시 나이가 29살이었죠. ‘문소리라는 배우는 어린 나이에 참 대담하고 파격적인 선택을 잘했구나’ 싶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 영화도 이미 한두 번 거절하고, 고민도 많이 했어요. 엄청 어렵게 택한 작품이에요. 어차피 배우를 하려면 이런 산은 한 번 넘어야 한다고 생각해 받아들였죠. 주변에서도 쉽지 않을 거라고, 큰 싸움이 될 거라고 했어요. 당시에 이 작품을 해야 할 이유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쓴 노트가 있는데,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훨씬 많았죠. 그런데 그 이유를 보면 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것이 요점이었어요. 사실 장 담그다 보면 구더기가 생길 수도 있고, 그 부분만 걷어내고 먹기도 하잖아요. 우선은 장을 담가봐야 하는 거니깐, 처음부터 두려워서 안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싶은 마음에 결심한 거죠. 불안하긴 했지만 잃을 게 없어 안 돼도 상관없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그걸 겪고 나니 확실히 더 성장할 수 있었죠.
 
재킷 59만5천원 문초이. 반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재킷 59만5천원 문초이. 반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그 마음은 지금도 유효한 것 같아요. 필모그래피를 보면 비중이나 역할을 가리지 않고 작품에 임하는, 한 명의 용감한 배우가 보이거든요.
어떤 작품이든 내 마음에 들고, 그 안에서 놀 수 있으면 상관없어요. 그런데 작품이나 캐릭터가 구태의연하다는 생각이 들거나 늘 보던 거라면 흥미가 생기지 않아요. 옆에서 “이거 잘될 거야”라고 해도 발동이 안 걸려 주저할 때가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런 리스크를 두려워하기보단 극복하는 과정에서 흥미를 느끼고, 창의적인 뭔가가 더 필요한 일에 스릴을 느꼈던 것 같아요.
 
지금의 문소리가 연기를 했다면 더 잘했을 것 같은 작품은 없어요?
일단 저는 제가 출연한 영화를 잘 안 봐요. 신마다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고, 마음이 복잡해져요. 나한테 다 좋은 기억이지만, 당시의 고통이 새삼 느껴지고, 부족한 점도 보이고요. 당시의 문소리니까 그렇게 연기를 하지, 지금 하면 달랐겠죠. 근데 더 잘했을 것 같단 생각은 안 해요. 〈바람난 가족〉에서 애 엄마 역할을 했어요. 사실 결혼 전에 애 엄마 역할을 꽤 했거든요? 결혼해 애를 낳고 보니 그때 내가 좀 몰랐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다르게 연기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한편으론 뭘 몰라서 그렇게 연기할 수 있었겠구나 싶고요. 연기라는 게 늘 그래요. 내가 알 만한 때엔 그 역할이 안 들어오고 뭘 잘 모를 때 하게 되니까. 참 어려워요.
 
예전 인터뷰에서 전문직 역할이나 멜로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드라마 〈라이프〉에서 의사 역할을 했으니 이제 멜로가 남았군요.
영화 〈오아시스〉가 멜로이긴 했죠. 하하. 진짜 지독한 멜로를 찍고 싶어요. 이제 사랑에 대해 뭔가 개념이 잡혔달까. 예전엔 사랑이 뭔지 모르고 그냥 연애를 했던 것 같거든요. 사랑보다 일이 더 중요했으니까요. 지금은 사랑이 얼마나 인간에게 필수적인 요소인지 알아서 훨씬 폭넓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짜 사랑은 뭔가요?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인간이 밥 안 먹으면 못 살고, 공기가 없으면 숨을 못 쉬듯이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걸 느껴요. 결혼한 지 14년째인데 남편에게도 이 사람의 어떤 면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걸 느껴요. 연애보다 훨씬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한 게 사랑인 것 같아요. 저는 불자지만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을 점점 더 확고하게 믿게 돼요.
 
할리우드계 여성 영화인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우먼 인 할리우드〉를 보며, 한국판을 만든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에 문소리가 절대 빠지면 안 된다고도 생각했고요.
한국 영화계에서 여배우의 삶 등 많은 생각이 들지만, 이를 잘 녹여 창의적인 일로 바꿔 발전시켜보고 싶어요. 일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일이 노는 것보다 더 좋을 테니까요. 우리는 감성을 가지고 창의적인 일을 해야 해요.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를 만든 이후로 영화를 기획하거나 제작, 연출 등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다 보니 창의적이고 실천적인 일을 하다 보면 더 탄탄하고 단단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번 영화 〈세 자매〉 프로젝트도 그 일환이죠.
 
이창동, 박찬욱, 임상수, 홍상수 등 데뷔 초부터 쟁쟁한 감독들과 작업했기 때문에 신인 감독들이 지레 겁먹거나 어려워할 것 같아요. 
신인 감독들과 일하는 건 내가 더 어려울걸요? 하하. 어떻게 해야 그들이 나를 대하는 게 안 어려울지 고민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몰라요. 감독이 편하게 자기 것을 펼쳐야 하는데, 내가 어려워 말을 못 할까 봐 걱정되거든요. 사실 그 시나리오에 한해선 감독이 전문가예요. 배우인 저도 고민하지만 감독에 비하면 새 발의 피죠. 가끔 옛날 감독님들 만나서 “감독님! 왜 그래? 나 이런 거 싫은데!”라면서 어리광도 부리고 싶고, 그때가 그립기도 해요.
 
일찍 거장 감독을 만나 배우로서 득도 크겠지만 독이 됐다 여겼던 순간은 없었어요? 
전혀요. 배우가 아닌 사람으로서도 감독님들한테 많이 배웠어요. 지금도 많이 의지하고요. 다만 아쉬운 건, 그분들이 너무 빨리 늙어 속상해요. “오십견 때문에 힘들다”, “치매인지 기억이 안 난다”, “눈이 침침하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한창 더 작업하셔야 하는데 말이죠.
 
어린 연차의 배우들을 인터뷰하면, 마치 입을 맞춘 듯이 좋은 배우이기에 앞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얘기해요.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한 가지 타입은 아니었음 좋겠어요. 제멋대로 생기고, 제멋대로 연기하는, 다양한 배우가 넘쳐났으면 해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찾아가는 과정은 좋지만, 한 가지 답을 정해놓고 그것만 좇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찾아가는 중이고, 종국엔 진짜 멋진 나를 찾는다 믿고 노력하는 건 배우로서 당연한 거죠. 저도 늘 찾아 헤매며 노력하는 중이에요. 그걸 모험처럼 즐겨야 그 과정이 나한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일정 기간 다양한 삶을 살아보며 인생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배우는 정말 좋은 직업이란 생각을 할 때가 많아요.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그러면서 자기를 잃어버리는 사람도 많아요. 이 세계, 저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 게 재미도 있지만, 그만큼 정신이나 마음이 약해지기도 하죠. 뭐가 진실인지 헷갈리기도 하고요. 체질에 맞으면 굉장히 재미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연예인이 아니라도 멀티 페르소나를 갖고, 다양한 얼굴로 사는 사람도 있죠. 그래서 자기 중심을 잘 지키는 게 더욱 중요한 것 같아요.
건강한 몸과 마음이 중요해요. 시간을 정해놓고 운동한다는 게 아니라 일상 자체가 건강한 삶을 말하는 거예요.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느끼는 순간 삶이 더 건강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걸 모르고 일탈을 꿈꾸거나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건 가짜 행복이라 생각해요. 제주도에서 전 매일 산책하고, 밥 해 먹고, 저녁에는 셋이서 각자 일기를 쓰는 ‘쓱싹쓱싹 타임’으로 하루를 마무리해요. 그 시간엔 그림을 그리거나 편지나 일기를 써요. 뭘 하든 상관없이 쓱싹쓱싹 소리만 들리면 되죠.
 
일, 결혼, 출산, 육아 등을 모두 겪었고 겪는 중이에요. 다른 삶을 사는 여성이자 먼저 다양한 경험을 한 여성으로서 〈코스모폴리탄〉 독자들에게 인생 선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제 주변 사람들은 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요. 이혼한 친구도 있고, 강아지 키우며 사는 친구도 있죠. 가정이 있고, 시어머니 기일이 되면 절에 가는 삶을 사는 여배우는 저밖에 없어요. 하하. 그런데 어떤 삶을 살든 대화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저 사람 저렇게 사는 거 보니 괜찮네?”가 돼야지 “왜 저렇게 살아?”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부터 갈등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코스모폴리탄〉이 창간 20주년을 맞았는데, 과거 못지않게 미래를 고민하게 됐어요. 꽤 오래전부터 ‘종이 잡지의 위기’라는 말이 나왔거든요.
E북이 등장하면서부터 출판업계에서 나온 얘기죠. 하지만 여전히 저처럼 종이 책만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TV가 처음 나왔을 때도 극장이 사라질 거라고 했지만 지금까지 성행하고 있고요. 물론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극장을 못 가니 OTT 플랫폼에 치여 또 극장이 사라질 거라 말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그 형식이 주는 감성은 너무 크거든요. 같은 내용이어도 어떤 형식이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20년 후에도 〈코스모폴리탄〉과 같은 잡지는 더 멋지게 발전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때도 〈코스모폴리탄〉에서 문소리의 화보 인터뷰를 볼 수 있을까요? 
60대가 돼 백발을 휘날리며 촬영하면 좋겠네요. 하하.




20살의 문소리에겐 괜찮지만, 지금의 문소리에겐 용서되지 않는 일이 있다면요?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니는 거? 하하. 지금은 안 되죠. 혼인 관계가 있으니, 웬만하면 사고 안 치려고 해요. 하하. 어릴 땐 품위를 지킬 필요가 없었어요. 누가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었는데, 지금은 그걸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된 것 같아요.
 
멋있는 여성을 정의한다면요?
최근에 미국 최초의 여성 판사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그분의 엄마가 “숙녀가 되고, 독립적인 사람이 돼라”고 그랬대요. 그 말은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였어요. 화를 낼 에너지를 영리한 방식으로 풀어내면 더 훌륭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죠. 사실 제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해요. 언젠가 딸에게 사춘기가 올 텐데, 그때를 대비해 몰래몰래 편지를 쓰고 있어요. 나중에 딸이 사고 치거나 방황하면 책상에 쓱 올려놓으려고요.
 
꼰대는 되고 싶지 않지만,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을 담은 행동인데요? 
맞아요. 하하. 그냥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걸 편지로 남겨놓자 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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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Feature Director 전소영 Photographer 주영균
  • Stylist 김선영
  • Hair 혜나/청담순수
  • Makeup 최수경/ 청담 순수
  • Assistant 김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