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y

내 몸 긍정을 방해하는 것들

평생함께하고, 죽을 때 비로소 이별하게 될 내 몸을 다른 누구보다 내가 미워할 때가 많다. 너무 미워 꼬집기도 하고, 단식도 한다. 나는 왜 내 몸에 이토록 야멸차고 가혹하게 구는 걸까? 우리가 내 몸 부정을 넘어 ‘극혐’하는 지경에 다다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BYCOSMOPOLITAN2020.06.01
 
 

나는 왜 쇼윈도 운동만 했을까?

초등학교 6학년 때,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열심히 달렸던 기억이 있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야구, 축구, 피구 등을 섞은 일명 ‘막구’라는 게임을 만들어 남녀 구분 없이 운동장을 달리게 했다. 그 전까지 남자는 축구나 농구, 여자는 피구만을 시켰던 여느 선생님과 달랐다. 공을 차며 운동장을 달리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이 시간을 꺼렸지만, 난 내심 막구 하는 날만을 기다렸다(난 당시 친오빠와 실제로 레슬링과 축구, 농구 등을 하며 스포츠 규칙을 몸으로 익혔기 때문에 남자들과 어울려 운동하는 게 익숙했다). 당시 운동신경 좀 있다고 으스대던 반 남자아이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통쾌했다. 날마다 운동장을 뛰며 단련한 그 아이와 비교해도 내가 부족한 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여중·여고에 진학한 이후 난 그때만큼 뛰어놀았던 기억은 없다. 종종 점심시간이면 마음 맞는 친구와 밥 먹고 짬 내 농구를 하기도 했지만, 그 생활이 오래가진 못했다. 마음껏 뛰기엔 교복 치마가 너무 불편했고, 어색했다.
그리고 성인이 돼 자발적으로 했던 운동은 요가, 필라테스, 헬스였다. 대부분 내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살을 떼어내고 싶다는 욕망으로 시작했다. 그야말로 ‘쇼윈도 운동’이다. 그때의 나를 김혼비 작가의 에세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의 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꽤나 팔팔했던 20대 나에겐 건강이란 너무나 막연한 대상이었고, 아름다움은 즉각 눈에 보였다. 그 아름다움의 기준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족쇄라는 것을 알면서도 족쇄의 갑갑함보다는 족쇄의 아름다움에 더 매료”됐다. 그러다 최근에 테니스를 시작했다. 몸 어느 부위에 도움이 되는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운동. 근 20년 만에 처음이었다. 테니스를 치러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즐거웠다. 30분의 수강 시간은 그야말로 ‘순삭’이었다. 이 악물고 운동하며 상상 속에서 트레이너를 몇 번이고 죽였던 PT를 받을 때와 사뭇 달랐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운동을 하고 있었던 걸까?
 

사이즈 차별이 만든 자기 몸 증오

며칠 전 TV 프로그램에서 개그우먼 김민경이 고민을 토로했다. “더 건강하게 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운동을 하는데 많은 사람이 다이어트라고 생각해 얼마나 빠졌냐고 물어봐 부담이 된다”라는 요지였다. 그 프로그램에서 김민경은 남성 MC 2명과 허벅지 씨름 대결을 했고, 가뿐하게 이겼다. 그녀는 운동을 하기 전엔 자신이 이렇게 힘이 센 사람인지 몰랐다고 했다. ‘김 장군’, ‘괴력’이라는 말로 웃음을 안겨준 김민경의 운동신경은 전문가도 인정할 만큼 엄청났다. 실제로 운동은 몸매를 가꾸는 게 아니라 내 몸의 기능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소위 뚱뚱한 몸을 가진 연예인들이 운동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무조건 체중 감량과 연결 짓는다. 사실 연예인들은 체중 감량으로 이미지 변화를 꾀하거나 개인 사업에 이용하기도 한다. 대다수가 그랬으니, 김민경 역시 그럴 거라 생각한 건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운동하는 여성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탄탄한 몸매, 제2의 살결처럼 몸에 착 붙는 레깅스와 스포츠 브라. 운동은 다시금 여성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만든다. 그래서 운동하는 여성은 쉽게 성적 대상화된다. 운동하는 무수한 여성은 그런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코르셋을 잔뜩 조인다. 그러니 여자들은 소위 말하는 과격한 운동을 시도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예쁘고 아름다운 몸을 만드는 데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끊임없이 ‘사이즈 차별’도 겪는다. 키가 몇이든, 체형이 어떻든 상관없이 40kg대 몸무게에 44~55사이즈의 옷을 입어야 아름답다고 여긴다. 똥배, 코끼리 다리, 호빵 등 살찐 사람들을 지칭하는 경멸적인 단어는 여성이 스스로의 몸을 증오하는 걸 자연스럽게 만든다. 그 선입견에 그들의 행복이나 그들이 살찔 수밖에 없는 사정 따위는 생략된다. TV 드라마에서도 예쁘고 날씬한 주인공은 똑똑하고 착하며, 뚱뚱한 캐릭터는 멍청하거나 못되거나 놀림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여자들은 운동을 하면서도 마음껏 운동하는 즐거움, 내 몸에 대해 알게 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부끄럽지만 내가 매달 만들고 있는 잡지 역시 여성에게 마른 몸이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한다. 실제로 외모를 꾸미지 않는 이를 두고 무매너를 운운한 적도 있다. 물론 몇 년 전 이야기지만 말이다.
 

긍정, 다시 또 긍정

친구 K는 최근 오랫동안 콤플렉스였던 알이 꽉 찬 종아리의 근육을 풀어주는 보톡스 주사를 맞았다. 몇 달 후에는 가슴 수술을 할 예정이다. 아침마다 한결 얇아진 종아리를 보면 뿌듯하다며 왜 진작에 맞지 않았는지 후회된다고 했다. 앞뒤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납작한 가슴에 볼륨감까지 생기면 그녀가 가지고 있던 콤플렉스는 모두 타파된다. “왜 그렇게까지?”라는 질문에 그녀는 말했다. “예뻐지고 싶어서.” 나는 그런 그녀에게 요즘 탈코르셋이 대세인데 왜 시대에 역행하는 행동을 하냐고 다그칠 수 없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그녀는 만족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일명 ‘꾸밈 노동’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탈코르셋 운동’에 공감하고 지지한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 편한 옷차림, 쇼트커트, 안경은 어느 순간 ‘탈코르셋’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됐다. 그렇다면 쇼트커트를 하지 않고, 화장을 하며, 예쁘게 치장하는 것은 탈코르셋 운동에 역행하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요즘 때때로 ‘탈코르셋의 역설’에 맞닥뜨리곤 한다. ‘탈코르셋의 코르셋’은 아닐까? 이런 논란은 결국 우리가 당연시 여겼던 것에 의심과 의문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 화장을 하고 싶지 않다면 안 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기듯, 성형수술을 하고 싶은 사람은 그걸 할 수 있는 자유까지 생긴 셈이다. 그 누구도 그런 행동에 대해 비난할 수 없다. 그 덕에 여성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폭이 넓어지고 다양해졌다. 요즘엔 민낯으로 출근했다고 “그 얼굴로 화장도 안 하고 다녀? 양심 없네” 따위의 말을 농담으로라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만약 그랬다가는 큰코다칠 일이 너무 많다. 탈코르셋 덕분에 세상은 달라졌다.
그러니 우리는 관습적인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몸을 사랑할 수 없을지라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세상의 기준에 맞춰 내 몸매를, 내 몸의 한계를 규정지을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내 몸, 그리고 아름다움과 여성성의 기준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페미니스트 작가 나오미 울프의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의 일부로 갈음하겠다. “뻔뻔해지자. 탐욕스러워지자. 쾌락을 추구하자. 고통을 피하자. 마음대로 입고, 만지고, 먹고, 마시자. 다른 여성의 선택을 받아들이자.(중략) 자신의 이상과 대의를 선택하자. 규칙을 깨부수고 바꾸어 우리가 아름답다는 느낌이 확고해지면, 그러한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꾸미고 과시하고 한껏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