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규진)재킷 42만8천원 렉토. 톱 가격미정 얼바닉30. 팬츠 가격미정 앤아더스토리즈. 슈즈 가격미정 지안비토 로시. (와이프)원피스 17만5천원 코스. 슈즈 가격미정 지안비토 로시.
규진 씨는 5백 번도 넘는 커밍아웃을 거쳤지만 아내분은 아직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적은 없으시죠.
와이프 생각보다 제가 주변 사람들을 과소평가한 것 같아요. 커밍아웃하면 분명 불편해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의외로 ‘스무스’하게 넘어가기도 하거든요. 다만 직장에서는 좀 더 조심스러워요. 연차가 좀 더 쌓인 뒤에 말하는 게 현명할 것 같아 때를 살피고 있어요.
결혼의 핵심 중 하나는 우리가 커플이란 걸 만고에 알리는 건데 아쉽진 않아요?
규진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 아쉬운 건 없어요. 아무래도 언니가 좀 불편하겠죠.
와이프 거짓말의 범위가 늘어나고 있죠. 하하. 같이 사는 사람이 있지만 혼자 산다고 해야 하고, “비혼주의자니?”라는 물음에도 그렇다고 하면서 어물쩍 넘어가요. 그래도 결혼했다는 사실에 지금은 너무 좋아요.
결혼을 결심하고 2주 만에 프러포즈를 하셨다고요.
규진 언니가 이전 여자 친구들이 사귄 지 한 달 만에 결혼하자고 하는 게 싫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오래 만나다가 나중에 이야기해야겠다 싶었죠. 그런데 어느 날 결혼을 앞둔 다른 레즈비언 커플과 만나 술을 마신 뒤에 언니가 저한테 “규진아, 너는 나랑 어디까지 가고 싶어?”라는 거예요. 아무래도 왜 결혼 얘기 안 하냐는 신호인 것 같더라고요.
와이프 술 마시고 한 얘기라 저는 기억에 없어요. 하하. 돌이켜보면 저도 예전에 규진이가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규진이는 좋은 사람 만나면 결혼하고 싶단 얘기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왜 나한텐 결혼하자고 안 하지?’ 싶었죠.
규진 다른 여친들이 결혼하자고 한 게 싫은 게 아니라 계획이 없어 보여 싫은가 보다 했어요. 그래서 계획이 뭔지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프러포즈 기획서를 썼죠.
규진 씨 블로그에서 기획서를 읽었어요. 동성 부부 혼인신고가 가능한 국가 물색부터 경제적 자립에 대한 부분까지, 프러포즈가 아니라 프레젠테이션이던데요?
규진 고급 호텔 야경을 배경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티파니 목걸이와 디올 가방을 함께 건넸죠. 직장 동료와 선배들에게 수도 없이 컨펌을 받았어요. 특히 이사님이 “규진아, 가방만 주면 안 될 거 같아. 뭘 채워줘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씀하신 게 결정적이었죠. 하하. 또 너무 감성 없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편지도 줬어요.
와이프 좀 갑작스러웠지만 신선해서 좋았어요. 보통은 상견례까지 마친 뒤에 프러포즈하잖아요. 규진이가 생각한 문제점도 딱 맞았고요. 그 전엔 “결혼해”가 단순히 “사랑해”만으로 표현이 부족해서 하는 말처럼 들렸거든요. 그런데 규진이는 ‘내가 이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를 보여준 거죠. 너무 귀여운 프러포즈 기획서였어요.
뉴욕까지 원정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제주도에서 웨딩 스냅을 찍고,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렸죠. 1년에 걸친 결혼 기간 동안 가장 즐거웠던 부분과 힘들었던 부분은 뭔가요?
규진 둘 다 남동생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서, 가는 김에 여행도 하고 얼굴도 봐서 좋았어요. 힘든 부분은 아무래도 부모님에게 얘기하는 과정이었죠. 저는 7년 전에 이미 커밍아웃했고 아빠와는 그럭저럭 연락을 이어가고 있지만 엄마는 결혼식에도 못 오겠다고 못 박으셨어요.
와이프 결혼 이야길 하니까 아빠가 한국 말고 미국 가서 조용히 하고 살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거예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족이니까 받아주겠지 싶었는데 안 되더라고요.
따지고 보면 상견례하고 프러포즈할 상황은 아니었네요.
규진 그게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주변에 결혼하는 친구들 보면 양가 부모님 조율하느라 더 스트레스 받거든요. 하하. 상처받고 울기도 했지만 결혼 준비는 준비대로 했어요. 이미 각자 가족으로부터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독립한 상태라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죠. 내 가족이 싫다 하니 속상하네, 그 정도?
아쉽게도 아직 한국에서는 법적 관계가 아니에요.
규진 신혼여행 마치고 입국하는데 세관 신고서에 동반 가족 체크란이 있더라고요. 제 동반 가족은 엄연히 언니인데 법적으로는 아니니까 0명에 체크했어요. 은행에서 대출 상담을 받을 때도, 아파서 병원에 갈 때도 끊임없이 저희가 법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걸 상기하게 되죠.
둘 다 웨딩드레스 입고 결혼식을 올린 것에 대해 ‘코르셋’이라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규진 여성이 원치 않는 꾸밈 노동을 하는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하지만, 저와 언니가 결혼식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기로 선택한 걸 ‘코르셋’이라 부르는 건 너무 단편적인 비난이라 생각해요. 우선 저는 턱시도로 대표되는 사회적 남성성은 추구해야 하고 드레스로 대표되는 사회적 여성성은 지양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요. 만약 둘 중 한 명이 턱시도를 입고 나머지 한 명은 웨딩드레스를 입었다면 이성애자 흉내 낸다 그랬겠죠? 또 둘 다 턱시도를 입었다면 ‘남성 숭배’라고 비난했을 거예요. 그렇다고 아예 상관없는 트레이닝복 같은 걸 입었다? 아무도 결혼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죠. 성 소수자에 대해서는 정해진 기준이 없어요. 뭘 해도 비난받기 십상이죠.
상처받을 일이 많을 거라 예상했을 텐데, 결혼을 꼭 하고 싶은 이유가 있었어요?
규진 저는 결혼이 제 인생의 야망이었어요. 결혼을 못 할 거라 생각하니까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자란 가정이 끈끈한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엄마랑 저랑 싸우면 아빠는 엄마 편인 거예요. 제가 1순위인 사람이 세상에 한 명도 없는 거죠. 제가 스스로 선택한 제 편을 갖고 싶었어요.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와이프 나를 감정적으로 지지해줄 수 없으면 가족이라 생각하기 힘든 것 같아요. 부모님이 제 존재를 부정하는 말을 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서까지 두 분을 가족이라고 인정하기에는 제 그릇이 큰 것 같지 않거든요. 규진이가 얘기한 것처럼 내가 선택한 가족이라는 사실이 중요하죠. 그런 점에서 엄마, 아빠의 선택도 좀 안타깝긴 해요. 저처럼 귀엽고 노후를 책임질 수 있는 딸을 놓친 거잖아요?
규진 제가 해외에서 오래 살아서 친척들이랑 그렇게 친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결혼한다니까 사촌오빠가 이모랑 다른 사촌들을 설득해서 결혼식에 데려온 거예요. 가족인데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별일 아니라면서요. 많은 생각이 들었죠. 엄마는 제 결혼식에 올 수 없다고 하는데 말이에요.
‘가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뭘까요?
규진 저는 1차원적이에요. 서로를 가족이라 생각하는가?
와이프 사랑하고 존중하면 가족 아닌가 생각해요. 반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해주지 않으면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해요. 내가 사회에서 만났으면 말도 안 섞을 사람이라면 굳이 가족이라고 해야 할까요?
혈연으로 맺어진 각자의 가족과 지금 두 사람이 꾸린 가족이 닮은 점과 다른 점은 뭐예요?
규진 이런 말 하면 사람들이 웃지만 저희가 굉장히 보수적이거든요. 하하. 저희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외도는 용납할 수 없어요. 다른 점이라면 부모 자식 관계와는 달리 저희는 평등하다는 거죠.
와이프 엄마랑 아빠는 절 이해하는 시점이 과거에 머물러 있으니 이해의 폭이 좁아요. 반대로 규진이와 제가 만든 따끈따끈한 가족은 동시대를 함께 나아가는 과정에 있죠.
두 사람은 싸운 적 없어요?
규진 시어머님인지 장모님인지는 모르겠지만, 결혼 과정에서 언니 어머니를 두고 딱 한 번 갈등이 있었을 뿐이에요.
와이프 그걸 겪고나니 저희 관계의 소중함을 더욱 깊이 느꼈죠.
성격이 비슷한 편이에요, 아님 달라서 잘 맞는 편이에요?
규진 사상과 유머 취향은 비슷해요. 〈1박 2일〉보다 〈SNL〉을 좋아하죠. 언니가 에그인헬을 만들어주면 저는 트위터에 “와이프가 계란지옥을 만들어줬다! 지옥행이 보장된 동성 부부에게 어울리는 메뉴!”라고 올리는 식이에요. 하하.
와이프 신혼집 살림 차릴 때는 오히려 성격이 달라서 순조로웠어요. 규진이는 디테일을 다 살펴보고 직접 결정하는 편이고, 저는 누가 선택지를 제시하면 ‘이것만 아님 돼’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규진 직업이 마케터라 기획하고 컨펌받는 일에 이골이 났잖아요. 신혼집 꾸미기도 신제품 론칭하듯 했어요. 하하.
규진 씨 블로그 소개글에는 “왜 아무도 내게 레즈비언으로 잘 사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궁금해하다 그냥 제 얘기를 공유하기로 했습니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성 소수자라서 유독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은 없어요?
규진 소수자가 과잉 대표되는 걸 참 많이 봤어요. ‘트랜스젠더’ 하면 하리수를 떠올리고, ‘게이’ 하면 홍석천을 떠올리죠. 저희를 보고 ‘결혼한 레즈비언 커플은 다 저런가?’라고 생각할 수 있단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블로그를 시작할 때도 개인적인 삶을 지키면서 활동하겠다고 마음먹었죠.
와이프 남들 시선 때문이 아니라도 당연히 부부로서 잘 살고 싶은 마음은 같잖아요. 그냥 우리 둘이 부부로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모색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