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예쁘다는 게 뭔데? | 코스모폴리탄 코리아 (COSMOPOLITAN KOREA)

젠더 대폭발 시대, Z세대를 맞이하는 뷰티업계의 바람직한 자세.



1990년대 마몽드 광고 속 이영애는 진갈색 립스틱을 바르고 슈트를 입은 채 회의를 주도하고, 도심을 활보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뷰티 광고에서 당당한 커리어 우먼은 사라지고, 청순하거나 상큼 발랄한 여자 친구 스타일 혹은 아무런 배경 이야기 없이 무균 지대에서 독야청청하는, 즉 외모로만 존재를 드러내는 나른한 여신들이 K-뷰티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다. 물론 여성상의 변화는 뷰티업계만의 책임은 아니다. 인터넷만 연결하면 헐벗은 여자가 등장하는 게임 광고가 창궐하고, 소주병에는 술 권하는 여자 연예인 사진이 붙어 있고, 아이스크림 회사는 아직 1차 성징도 시작 안 한 여자애의 입술을 선정적으로 클로즈업하는 TV 광고를 내보내고, 정부는 외화벌이를 위해 성형외과 광고를 권장하고, 여자 아이돌 지망생 1백 명이 모인 프로그램에 커트 머리는 단 한 명도 없는 나라, 여기는 대한민국이니까.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여성 소비자의 시선에 호소하는 화장품 광고들이 무해하게 느껴진다. 여성 인권이 한국보다 뒤처졌다고 평가받는 일본에서는 최근까지도 결박당한 여자의 팔에 립스틱 발색을 테스트한다는 콘셉트의 폭력적인 광고가 만들어지는 식이었지만, 심지어 그 메이크업 브랜드조차 한국에서는 무리한 설정 없이 연예인 얼굴만 내세우는 광고를 주로 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 앞에 K-뷰티업계의 이런 온건한 전략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시어머니만 1천만 명
요즘 소비자들은 아는 것도 많고 요구도 많다. 예컨대 최근 헤라 화장품 광고에 중성적인 이미지로 유명한 배우 이주영이 출연했는데, 이게 팬덤 사이에서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이주영의 트레이드마크인 짧은 머리, 낮은 목소리, 매니시한 패션은 그대로였으나 그가 등을 노출하고 침대에서 뒹구는 장면이 삽입된 게 문제였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했다, 평소 탈코르셋 이미지 때문에 좋아한 배우인데 이런 광고에 출연하다니 실망이다”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 “저게 어딜 봐서 성적 대상화냐, 설령 성적 대상화라 해도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소구하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기꺼이 제품을 구입하겠다”라는 의견도 있었으며, “화장품 광고라는 것 자체가 여성의 꾸밈을 조장하는 게 목적이므로 반페미니즘적이다”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는 광고의 성 역할을 감시하고 공정성을 따지고 토론하는 게 요즘 소비자들의 문화가 됐다는 방증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시어머니… 아니, 윤리심의위원이 1천만 명쯤 있는 셈이다. 그 와중에 매니시한 화장품 모델이 신선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 건 고무적인 일이다. 한편 여성 모델의 팬덤이 정치적 올바름을 두고 싸우는 동안 남성 아이돌 팬덤은 걸핏하면 자기 스타를 화장품 광고에 써달라며 홍보를 하고, 실제로 예쁘장한 이목구비에 풀 메이크업을 한 남성 연예인들이 그나마 여성 연예 노동자의 황금어장이던 뷰티 광고계를 야금야금 먹어들어간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당신이 뷰티 관계자라면 어느 장단에 춤을 추겠는가? 그건 매우 어려운 결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마냥 회피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장사꾼 입장에서 잊히는 것보다 나쁜 일은 없기 때문이다.

당연한 건 없다
지난 5년여는 대중문화의 격변기였다. 넷페미니즘이 부흥하고 탈코르셋이 논의되고, 성 역할 담론이 맛집 품평만큼 대중화됐다. 급기야 최근에는 한국 사회에서 젠더 다양성이 폭발적으로 가시화되는 추세다. TV 쇼 프로그램에서는 크로스드레서 남성 댄서와 슈트를 입은 걸 그룹이 합동 무대를 꾸려 찬사를 받고(〈퀸덤〉의 AOA),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했으나 흔히 생각하는 트랜스젠더 이미지와 달리 전혀 꾸미지 않은 전직 군인이 뉴스에 등장해 여군에 입대시켜달라 호소하고, 숙명여대에서는 트랜스젠더 학생의 입학을 두고 ‘여자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논란이 벌어졌고, BTS와 전 세계 아미들은 오늘도 화장하고 춤추는 나긋나긋한 남자가 다 게이는 아니라는 사실을 인류에 전파 중이다. 하이패션이나 뷰티 분야의 트렌드세터들은 재빨리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고 있다. 도발적이고 섹슈얼한 광고로 유명한 톰 포드 뷰티는 최근 광고에서 다양한 성별, 인종 간의 키스 신을 선보였다. 패션업계에서 버즈 커트를 한 중성적인 모델들이 인기를 끈 지는 이미 여러 해 됐고 플러스 사이즈나 노년 모델 등을 고용하는 게 ‘보디 포지티브’란 명목으로 유행하고 있다. 남부럽잖게 많은 남성 팬을 거느린 한예슬은 최근 갑자기 고스 룩에 문신을 하고 다니면서 여자의 스타일은 남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스스로 즐기기 위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내놓기 시작했다. 화사의 ‘센 언니’ 룩이나 박나래의 실험적인 패션 역시 사회가 권장하는 미의 기준과는 동떨어졌지만 여성 팬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런 이슈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하다. 여자는 어떻고 남자는 어때야 한다는 식의 단순하고 정형화된 세계관으로는 적응할 수 없는 시대가 온다는 거다.

민낯의 권력
말 만들기 좋아하는 언론은 연일 브래지어를 벗어던지고 메이크업을 거부하는 ‘탈코르셋’이 젊은 세대의 트렌드라고 소개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꾸미느냐 안 꾸미느냐가 아니다. 꾸미고 싶으면 꾸미고 안 꾸미고 싶으면 안 꾸밀 수 있는 자유, 여친 룩이건 그런지 룩이건 남들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시선의 권력을 영구히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방안으로서, 현 시점에서 젊은 여성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제스처가 탈코르셋인 거다. 앞선 사람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짧은 머리에 민낯을 한 여자가 표면적으로는 소수일지라도 그 너머에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거대한 소비자 그룹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뷰티업계가 이런 세대를 포용하고 설득하려면 메이크업이 타인의 시선에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한 주체적인 행위임을, 각자의 개성을 손상시키는 게 아니라 독보적인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작업일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여성상을 고민하고 발굴하고 제시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의 의식은 이미 저만치 앞서갔는데 언제까지 남의 눈치만 보고 망설이고 있을 건가. 과즙 팡팡 여친도, 나른한 여신도, 지금은 벼랑 끝이다.


History of Cosmo

코스모 커버 역시 변하고 있는 중! 인형처럼 날씬하고 예쁘장한 걸이 아닌 플러스 사이즈 모델, 걸 크러시 스타에 이어 젠더 퀴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2020년 1월 영국판 ‘그’ 조너선 반 네스.2018년 10월 영국판 커버 걸 테스 홀리데이.2019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판 커버 걸 쇼 마조지.2018년 12월 한국판 커버걸 이영자.2019년 8월 한국판 커버 걸 화사.
젠더 대폭발 시대, Z세대를 맞이하는 뷰티업계의 바람직한 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