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노래 속에 숨겨진 불편한 가사들 || 코스모폴리탄코리아 (COSMOPOLITAN KOREA)
Life

사랑 노래 속에 숨겨진 불편한 가사들

그때 그 시절 노래야 그렇다 쳐도, 요즘 가사에서 ‘온라인 탑골공원’의 바이브가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이리버 mp3부터 에어팟 시절까지 훑으며 꼽은 과한 노래, 이상한 노래, 나쁜 노래.

COSMOPOLITAN BY COSMOPOLITAN 2020.02.11
 
 

Type 1 왜 자꾸 엄한 데 꽂혀?

김건모 - ‘스피드’(1996)
널 처음 본 순간 느꼈어
널 이제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중략)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거야
놓칠 수 없어 오 저질러 보는 거야 (중략)
오 그만 오 그만
나조차도 주체할 수 없는 이 기분
이런 맘 이런 내 사랑 날 받아줄 수 없겠니
오 제발 오 제발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아
곱지 않은 그 시선이 날 자꾸만 슬프게 해
→그때나 지금이나 남녀 관계의 적정선이라든가 적정 속도 같은 걸 모르는 남자들이 많다. 첫눈에 반할 때의 떨림은 이해하지만, ‘내 여자로 만들겠어’ 같은 마인드라면 ‘댓츠 낫 오케이’다. 저질러보겠다니, 도대체 뭘 저지르겠다는 건지? 이러니 경계하거나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건 당연하지 않겠나.




 빈지노 - ‘나이키 슈즈’(2012)
산책하기 딱인 온도와
그녀의 발엔 나이키 운동화
I like your style, baby
그녀의 뒤로 늘어선 그림자 속에 묻어가
왜 여자들은 그리 명품에 환장해?
캠퍼스 안의 명품 백
Is that Chanel? Is that Givenchy?
한쪽 어깨로 드는 이삿짐
허나 이 아이는 예외인 듯해 (중략)
조금은 수줍은 듯이 담백한 그 눈빛
화장기 없는 피부, 아침 해에 자연스레 그을린 튤립처럼 아주 선명한 your lips
→내가 꽂힌 그 여자를 칭송하기 위해 다른 여자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건 너무 비겁한 것 아닌가? 오늘은 운동하느라 나이키 운동화 신고, 내일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 샤넬 백 들고 가면 그 여자는 ‘뭘 좀 아는 여자’일까 아닐까? 1990년대든 2000년대든 여자를 묘사하는 데 ‘명품 백’을 언급하는 노래는 한둘이 아니다. 015B의 ‘현대 여성’(1992)이 그렇고, 언터쳐블의 ‘MC’(2010)가 그렇다. 남자들은 왜 그리 명품 백 멘 여자에 기겁하나? 10년이 지나도 그놈의 명품 백 타령은 안 잊혔는데 100년이 지나면 잊히려나. ‘수줍은 듯이 담백’하며 ‘화장기 없는 피부’를 이상으로 꼽는 이 남자의 취향은 뻔하디뻔하다. 이 곡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이키 의문의 1패’.




위너(MINO 솔로) - ‘손만 잡고 자자’(2018)
안간힘 쓰는데 넌 아무것도 몰라 몰라
아는 듯하는데 모르는 척이거나
작은 소녀 그, 그, 그 입술을 치워
난 순수하지 않아 Baby 안간힘
남자의 본능 두근대
악마의 속삭임에 불붙네
시작은 네가 했어 I can’t stop it
그냥 손만 잡고 자자
날 그냥 잠재우고 싶어
사실은 불태우고 싶어
그냥 손만 잡고 자자
인연을 시작하고 싶어
사실은 끝장 보고 싶어
→〈쇼미더머니4〉의 스타이자 독보적인 힙합계 아이콘으로 떠오른 송민호, 아니 MINO에게 늘 궁금했던 것이 있다. 그는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라는 가사에 대해 비판받고 “너무 후회스럽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라고 사과했는데, 그 전에 그게 왜 잘못된 가사인지 이해하긴 한 걸까? ‘인연을 시작하고 싶다’는 내용의 이 노래에 등장하는 ‘남자의 본능’과 ‘시작은 네가 했어’라는 문구가 어쩐지 귀에 익다. 이거, 성 범죄자들이 흔히 하는 말 아닌가? “어쩔 수가 없었다”, “여자가 먼저 꼬셨다”는 그 치졸한 변명들 말이다.
 

Type 2 사귀면 무조건 해‘줘야’ 돼?

검정치마 - ‘강아지’(2008)
모두 다 무언가에 떠밀려 어른인 척하기에 바쁜데/나는 개 나이로 세 살 반이야 모르고 싶은 것이 더 많아
if your lights are blinking and you are running low/come on get filled up so you can drive away/with my love with my love
우리가 알던 여자애는 돈만 쥐어주면 태워주는 차가 됐고/나는 언제부터인가 개가 되려나 봐 손을 델 수 없게 자꾸 뜨거워/반갑다고 흔들어 대는 것이 내 꼬리가 아닌 거 같아/사랑은 아래부터 시작해 척추를 타고 올라온 거야 (중략)
짖어대는 소리에 놀라서 도망가지 마/
무서워서 그런 거야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2018년 ‘3부작’의 첫 번째 편인 〈TEAM BABY〉를 발표하고 검정치마는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9년 그 둘째 편 〈THIRSTY〉를 발매하고 나서는 대중의 뭇매를 맞았다. 수록곡 ‘광견일기’, ‘빨간 나를’의 가사가 성매매를 은유하는 듯한 데다 전체적으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내용이었기 때문. 그런데 10년도 더 전에 발표한 그의 데뷔 앨범 〈201〉을 살펴보면 〈THIRSTY〉의 가사 논란은 이미 예견돼 있었다고 봐도 좋다. ‘지쳤을 땐 내게로 와서 사랑을 듬뿍 받고 가’라는 내용으로 풀이되는 영어 후렴구는 애틋하지만, 이 노래는 음원 사이트에 ‘19금’으로 등록돼 있다. 10년이 지났지만 검정치마의 가사는 달라진 게 없다. ‘돈만 쥐어주면 태워주는 차’는 ‘빨간 나를’(2019)의 ‘천박한 계집아이’가 됐고, ‘강아지’는 ‘광견’이 됐을 뿐이다.




다이나믹 듀오 - ‘먹고하고자고’(2015)
아무도 못 들어오게
문을 잠글게요 baby we lock the door
그런 하루가 필요해 우리에겐
baby we lock the door
하루 종일 먹고하고자고 먹고하고자고
(중략) 맛이 궁금해요 컵케익 위에 체리
(중략) 내 입술은 붓 니 몸은 도화지
내 붓질에 넌 감탄사를 토하지
(중략) 이건 풍경화 난 널 향해 항해하는 배고
넌 나만을 향해 만개하는 도개교 (중략) 난 물고기 헤집고 다니지 너란 연못
둔탁한 소리 난 니 몸속을 파고드는 못
→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연인의 행동 중 하나가 ‘자신과의 성생활을 친구들에게 떠벌리고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구구절절 가사로 써서 노래로까지 발표하다니, 투머치도 이런 투머치가 없다. 성희롱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여성을 ‘컵케익’이나 ‘도화지’ 같은 수동적인 대상으로 묘사한 것도 불쾌하고 남성을 ‘못’에 비유한 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내용은 그냥 연인 사이의 더티 토크로 충분했다.




진보 - ‘해주면 돼’(2019)
고집을 꺾어줘 허릴 꺾어줘/내게 숙여줘 한번만/네 마음을 말해줘 행동을 보여줘/ 나를 사랑해줘 영원히/너와 내가 말이 안 통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서로의 마음에 상처 주면서 어떻게 살아?
그냥 말 한마디만 해주면 돼
끝나기 전에만 해주면 돼
잠들기 전에만 해주면 돼
내게 달려와서 안기면 돼
나를 용서해주면 돼
→‘프로 불편러’ 여성으로서, 한국 힙합은 정말 지뢰밭 같다. 최근 발표된 진보의 신곡을 듣고 있자니 더더욱 그런 편견이 확고해진다. 힙합의 본류는 오랜 세월 억압된 삶을 살았던 흑인들이 자수성가해 자신의 부와 능력을 과시하는 것인데, 왜 한국에서는 그 과시의 대상이 자꾸만 여성이 되는 걸까? 섹스를 은유하는 제목은 식상하고, ‘말이 안 통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라는 문장은 협박에 가까워 보인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의 제목은 〈Don’t Think Too Much〉다. 하지만 ‘스타 프로듀서’급의 아티스트가 7년 만에 정규 앨범을 낼 땐 생각을 좀 많이 했어야 하지 않을까?
 

Type 3 트로피 와이프도 전업주부도 사절

김원준 - ‘너 없는 동안’(1994)
아무런 기대 없이 나간 우리 첫 만남은
너무 쉽게 운명처럼 빨리 이뤄졌지
언제부턴가 가끔 네가 싫증나서 나도
모르게 한눈을 팔고 싶을 때도 있었지
잘빠진 몸매와 외모 너보다 더 잘난 여자
찾길 원한 건 사실이야
난 하지만 욕심일 뿐 내 주제를 몰랐던 건
단지 나의 착각이었어
너의 갖춰진 조건 누군가에게 뺏기긴 싫어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을 세워줘
남들이 얘기하는 그런 흔한 연인은 안 될게 너 없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랄한 멜로디와 깜찍한 율동 때문에 한 번, 김원준이 너무 잘생겨서 두 번 속을 뻔했지만 이 노래는 결국 ‘너 없어 보니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내게 돌아와달라’는 발칙한 내용이다. ‘내 주제를 몰랐던 건 단지 나의 착각이었어’라고 말하는 건, 없이 살아봤단 뜻 아니겠나? 그동안 곰곰 생각해보니 이만큼 ‘갖춰진 조건’의 여자를 ‘뺏기긴’ 싫었던 거고 말이다. 왜냐고? 그녀는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을 세워’줄 수 있는 존재니까.




한동근 - ‘그대라는 사치’(2016)
그림 같은 집이 뭐 별거겠어요
어느 곳이든 그대가 있다면 그게 그림이죠
빛나는 하루가 뭐 별거겠어요
어떤 하루든 그대 함께라면 뭐가 필요하죠
(중략) 무려 우리 함께 잠드는 이 밤과
매일 나를 위해 차려진 이 식탁
나만의 그대, 나의 그대, 내겐 사치라는 걸
→1절까지만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어느 곳이든 그대가 있다면 그게 그림’까지는 소박하고 낭만적이고 다 좋았는데, ‘매일 나를 위해 차려진 이 식탁’을 바라는 건 이 남자의 사치가 분명하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게, 나랑 결혼하자”가 남자의 가장 파렴치한 거짓말임을, 이 노래는 명명백백히 입증한다. ‘그대’가 사치인 게 아니라, 그대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 사치란 것을, 대체 왜 모르나요?
 

Type 4 헤어질 땐 깔끔하게 자르자 쫌!

015B - ‘널 기다리며’(1992)
짙은 눈물 흘리며 떠나 보낸
네가 그리워 쏟아지는 비 맞으며
너의 집 앞에 또다시 기다리지만
(중략) 골목 저편에 아- 너의 모습 보일 때쯤이면/가슴이 떨려 숨어버리지 하루하루
→하루도 빠짐없이 연인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연애 중엔 로맨틱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관계가 끝난 뒤라면 얘기가 다르다. 골목 저편에 매일같이 전 남친의 모습이 보인다면 전 여친 입장에서도 숨어버리고 싶을 듯. 가슴이 떨려서가 아니라 소름이 끼쳐서 말이다. 자매품으로는 쿨의 ‘너의 집 앞에서’(1996)부터 노을의 ‘늦은 밤 너의 집 앞 골목길에서’(2019)까지 끝이 없다.




윤종신 - ‘오래전 그날’(1993)
너의 새 남자 친구 얘길 들었지 나 제대하기 얼마 전/이해했던 만큼 미움도 커졌었지만/
오늘 난 감사드렸어/몇 해 지나 얼핏 너를 봤을 때/누군가 널 그처럼 아름답게 지켜주고 있었음을/그리고 지금 내 곁엔 나만을 믿고 있는 한 여자와/잠 못 드는 나를 달래는 오래전 그 노래만이
→윤종신의 가창력과 담백한 가사의 시너지는 언제 들어도 좋다. 어릴 적엔 자신을 떠난 연인이 미웠지만 지금은 오히려 감사한다는 내용의 가사 역시 솔직하고 건강해서 좋다. 그런데 자꾸 듣다 보니 ‘나만 믿고 있는 한 여자’의 존재가 이 노래의 아픈 손가락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듣기에 이 가사는 좀 괘씸하지 않을까?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도 좋긴 한데 유부남이 자꾸 옛사랑을 불러대면 모양 빠진다. 믿고 옆에 있어줄 때 엄한 생각 말고 잘하라는 말이다.




임창정 - ‘소주 한 잔’(2003)
술이 한 잔 생각나는 밤 같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좋았던 시절들 이젠 모두 한숨만 되네요
(중략) 다시 전보다 그댈 원해요
이렇게 취할 때면 꺼져버린 전화를 붙잡고
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
여보세요 왜 말 안 하니/울고 있니 내가 오랜만이라서/사랑하는 사람이라서/
그대 소중한 마음 밀쳐낸 이기적인
그때의 나에게/그대를 다시 불러오라고 미친 듯이 외쳤어
→ 커트하고. 대체 이 곡이 지난 18년간 노래방에서 몇 번이나 재생됐을까? 그만큼 우리는 술에 취해 옛 연인에게 전화하는 이별의 정서에 흠뻑 젖어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전화 받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봤나? 지겹다 못해 무서울 것 같은데 말이다. 가사 속 ‘나’의 친구 입장은 또 어떻고? 옆에서 소주잔을 뺏든지, 휴대폰을 뺏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하고 싶어질 듯하다. 실제로 전화할 순 없으니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허전함을 채우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마이크를 빼앗고 싶은 심정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고음 파트가 걱정돼서 그러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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