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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가 왜 거기서 나와?

혈액형보다, 별자리보다 확실하다고들 말한다. 나이, 직업, 사는 곳, 부모님 뭐 하시노 제쳐두고 MBTI 유형으로 그 사람의 장점과 관심사는 물론이고 치부까지 알 수 있다고 말이다. MBTI의 토대 이론을 만든 심리학자 카를 융은 절대 예상하지 못했을, 2020년의 MBTI 열풍을 들여다봤다.

BYCOSMOPOLITAN2020.02.06
20년이 지났지만 선명하게 기억한다. ENFP, 나의 MBTI 유형. 가고 싶은 대학은 있어도 진로에 대한 고민은 사치처럼 느껴지던 고등학생 시절, 검사 결과지에 찍혀 있던 알파벳 네 글자. 어떤 영어 단어의 머리글자였는지, 어떤 성향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운명의 상대 이니셜처럼 뇌리에 콕 박혀 있었다. 얼마 전 지인이 MBTI를 아는지 물었을 때, 0.5초 만에 답한 걸 보면 말이다.
 
“요즘엔 성향을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의 성격유형으로 이야기한대. 누군 INFP고 누군 ESTJ라면서, 혈액형이나 별자리 말하듯이 말이야.” 그러면서 요즘엔 쉽게 온라인으로 알 수 있다며 무료 성격유형검사 링크를 보내주었다. 총 검사 시간은 12분 내외. 결과는 기억과 같았다. 유형의 이름은 ‘재기발랄한 활동가’. 스크롤을 내려가며 특징을 읽는데,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다. 역시 나는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라니까. ‘매력적이며 독립적인 성격’에 ‘창의력에 발동이 걸리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 이건 뭐 부정할 수가 없지. 신나서 읽다가 주의 사항에 한풀 꺾인다. ‘직관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사람들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는 경우 오해…’. 줄줄이 맞는 말이군. 그런데 MBTI가 뭐였더라? ENFP는?
 

그래서, MBTI가 뭐였더라?

스위스의 심리학자 카를 융은 인간의 행동이 종잡을 수 없을 것처럼 보여도 실은 아주 질서정연하고 일관된 경향이 있으며, 사람들의 다양성은 정보를 수집하는 인식 또는 정보를 조직하고 결론에 도달해 판단하는 특징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융의 ‘심리유형론’을 토대로 미국의 캐서리 브리그스와 그녀의 딸 이사벨 브리그스 마이어스가 고안한 ‘자기보고식’ 성격유형지표가 바로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다. 마이어스-브리그스 모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처음 이 연구를 시작했고, 20여 년에 걸쳐 기록한 사람 관찰 기록 카드만 무려 6만 장. 여기에 캐서린 브리그스의 외손자인 피터 마이어스까지 참여해 집안 3대에 걸쳐 70년 넘게 진행된 연구 개발의 결과가 MBTI다. 행동이 변할 수는 있어도 사람의 기본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는 심리유형학을 두고, 인간의 성격은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있다는 이견이 나오지만 MBTI는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진단 도구이며, 〈포춘〉 선정 주요 500대 기업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MBTI는 인간 성격의 4가지 기본 측면에 바탕을 두는데, 각 영역마다 상반된 선호 경향이 있다. 에너지의 방향이 외향(E)인지 내향(I)인지,  정보를 감각(S)으로 인식하는지 직관(N)으로 인식하는지, 의사 결정을 사고(T)적으로 하는지 감정(F)적으로 하는지,  생활 양식에서 판단(J)이 더 중요한지, 인식(P)이 더 중요한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성격유형 ENFP를 풀어 쓰면 외향형, 직관형,  감정형, 인식형인 것.
 
SNS 앱을 켜고 검색창에 MBTI를 쳐봤다. 성격유형을 캡처한 인증은 계속해서 올라오는 중이고, 아이돌 그룹 멤버들은 물론, 심슨 가족과 해리 포터 같은 가상 캐릭터들의 유형 정리가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또한 유형별 특징을 상황으로 짧고 굵게 설명한 글들이 오늘의 유머처럼 빠르게 퍼지고 있는 중. MBTI 유형별 약속에 늦은 이유와 반응, 한마디로 우울하게 만드는 법, 손절당하는 이유, 지나다가 부딪쳤을 때 반응, 나를 좋아하는지 확인하는 방법, 글 쓰는 장르,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 이것은 가히 MBTI 세계관으로 바라본 인간 세상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혈액형이 다른 넷이 술을 마시다가 B형이 갑자기 뛰쳐나가자 A형은 자기 때문인가 걱정하고 O형은 분위기를 정리하고 AB형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혈액형별 반응’ 이야기가 미니홈피를 타고 퍼지던, 나쁜 남자와 ‘츤데레’ 사이의 B형 남자 친구가 이상형으로 등극했던 21세기 초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혈액형을 묻는 질문을 몸서리치게 싫어한다. 누군가는 세상 사람을 혈액형을 믿는 사람과 별자리를 믿는 사람으로 나누지만 나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내 별자리 정도는 알고 있어 잡지 마지막 장을 펼쳐 이달의 운세를 보긴 해도, 사람들이 말하는 별자리별 성향은 전혀 모른다. 지구 상의 많고 많은 사람을 몇 개 되지도 않는 그룹으로 묶는다는 건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MBTI는 믿느냐고?
 
“MBTI 진단은 별자리, 혈액형과 절대로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완벽한 소통법〉의 저자이자 ‘소통과 공감’의 유경철 대표는 MBTI 유형을 혈액형이나 별자리 같은 분류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다. “MBTI는 성격심리학에서 연구한 진단입니다. 한국에도 심리유형학회가 있으며 그 회원 수도 상당하죠. 별자리, 혈액형 같은 추정과 절대로 비교할 수 없어요.” 한국MBTI연구소도 홈페이지에 검사 유의 사항으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MBTI는 개인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유희 도구가 아닙니다. 국제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출판되는 심리 검사 도구로서 저작권과 상표권이 등록돼 있는 표준화된 정식 도구이며, 전문 사용 자격 교육을 받은 사람에 한해 사용이 제한돼 있는 전문적 도구입니다.” 참고로 MBTI 진단을 인터넷에서 무료로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법이며, 국내 저작권은 (주)어세스타(mbti.career4u.net)에서 관리하고 있다.  
 

MBTI가 왜 이렇게 인기지?

이쯤 해서 드는 의문은, 어째서 지금, MBTI가 이처럼 화제인가 하는 것이다. 한국MBTI연구소의 전미선 선임연구원은 이런 관심이 전에 없던 현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교사, 공무원, 종교 계통, 상담 분야에서는 필수적으로 쓰는 도구니까요. 사람이 있는 곳엔 MBTI가 있다고 말할 수 있죠. BTS와 같은 유명인의 발언을 비롯한 미디어의 영향력도 있지만, 요즘 사람들이 자신을 파악하려는 노력이나 문제의식이 커진 게 지금과 같은 현상을 만든 것 같아요.” 유경철 대표는 과거엔 심리 상담이나 기업의 워크숍, 학교의 진로 상담에서만 사용할 수 있어 대중화되지 못했지만, IT 기술의 발달과 스마트폰의 대중화가 MBTI에 대한 관심을 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외국에 비해 국내 기업의 MBTI 활용이 많지 않은 편이었어요. 입사 시험에 포함될 경우 참고일 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죠. 자기 보고식이기 때문에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으로 왜곡해서 작성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엔 누구나 인터넷에서 쉽게 간편 진단을 하면서 결과의 정확성에 놀라고 타인과 비교하면서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SNS상에서 화제인 MBTI 유형 이야기는 한번 보기 시작하면 중간에 스마트폰을 놓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웠다. ‘MBTI 유형별 성격 정리 팩폭’ 같은 제목의 글을 읽을 땐 뼈를 맞는 듯 웃펐고, MBTI 유형 간 궁합 지수표를 볼 때는 사람이 나쁜 건 아닌데 왠지 마음이 가지 않았던 이들의 유형을 슬쩍 확인하고 싶은 맘이 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MBTI 유형으로 친구와 애인 사이는 물론이고, 직장에서 함께 일할 때 상극이거나 좋은 궁합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전문가들은 답변을 거부했다. MBTI는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는 도구로 활용해야지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갈등을 유발하는 데 쓰여선 안 된다고 말이다. “상반된 유형끼리 함께 일하게 됐을 때, 처음에는 소통이 어렵고 일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 결과물은 같은 유형끼리 했을 때보다 좋은 경우가 오히려 많죠.” 유경철 대표는 전 직원이 MBTI 검사 후 각자의 유형을 자리에 붙여두거나 인트라넷에 올려 다른 팀원과 함께 일할 때 참고해 좋은 효과를 보는 기업도 있다고 했다. “MBTI로 어떤 조직이 좋은지는 말할 수 있어요. 다양한 유형이 뭉쳐 있는 조직이 좋은 조직입니다.”
 

MBTI 활용법

MBTI는 분명 흥미로운 도구이나 술자리에서 잠깐 해보고 웃고 넘길 심리 테스트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MBTI에 익숙해질수록, 모든 성격유형이 타고난 장단점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좋거나 나쁘거나, 똑똑하거나 둔하거나, 건강하거나 허약한 유형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전미선 선임연구원은 타성에 젖은 채 경쟁 사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MBTI를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언제 유능감을 느끼고 행복한지 알 수 있어요. 긍정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도 있죠.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되면 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도 강점이고요. 시의적절하게 가면을 쓰고 행동하되 나로 돌아와서 충전하면 사람 간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어요.”
 
문득 한집에 살고 있는 남자의 MBTI가 궁금해졌다. 10년을 치열하게 싸우다 결혼했지만 여전히 때때로 나를 절망하게 만드는 ‘친애하는 나의 적’. 옆방에 있는 그에게 톡을 보냈다. “MBTI 뭐야?” 잠시 후 돌아온 답은 “ISTJ. 근데 왜?”  이제야, 실마리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