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격적으로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질문부터 먼저 하겠다. “걱정 마, 자기야. 나 피임약 먹고 있어.” 남녀가 몸을 섞다가 결정적인 합체 순간에 누군가 이 말을 내뱉는다면 둘 중 어느 쪽일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이 여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남자도 그 말을 할 수 있다. 말뿐인가, 실제로 피임약을 복용하는 남자는 어쩌면 여자만큼 흔해질지도 모른다. 이 추측은 허무맹랑하지 않다. 사실 최근까지도 남성 피임약 출시가 코앞에 다가왔다는 뉴스가 희망 고문하듯 들려오곤 했다. 그런데 아직도, 여전히 남성 피임약은 약국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떻게 여자가 하는 피임법은 숱한데 남자 피임법은 일회용 콘돔과 영구적인 정관 절제 수술뿐인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 기사를 쓰기 전까지 난 남성 피임법이 이제 막 삽을 뜨기 시작한 불모지의 영역이라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뉴스에서 불치병 특효약이 나온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남성용 피임약 임상 시험 성공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실제로 ‘남성용 피임약’이라는 키워드로 뉴스를 검색하면 온갖 종류의 남성용 피임약·피임법 기사가 나온다. 성욕이 유지되는 남성 피임약, 어깨 등에 바르는 피임약, 정관에 삽입해 사용하는 정자 스위치….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남성 피임법이 있다니! 그야말로 피임의 신세계다. 사실 한국은 남성용 피임약이 상용화되기는커녕 그 존재를 아는 사람마저도 드물다. 실제로 직장인 임두리(35세) 씨는 “남성용 피임약이 있다는 것 자체를 처음 알았어요. 남자가 피임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콘돔, 정관수술 정도로 생각했거든요”라고 말한다. 대학생 유영우(22세) 씨는 “아직 정보는 없지만 보편화된다면 복용할 의향은 있어요. 하지만 부작용이 걱정되긴 해요”라며 우려를 드러낸다.
일부 과학자들은 수백만 개의 정자를 죽이는 것이 하나의 난자를 다루는 것보다 힘들다고 말한다. 제약 회사에서는 남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을(여자들조차 남자들이 실제로 복용할 거라고 믿지 않을) 무언가를 개발하는 데 투자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사회 전반에 걸친 성차별주의, 혹은 남성 중심적 사고의 연장선으로 생식 활동이 여전히 여자만의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말한다. 새로운 남성 피임법이 시장에 등장하는 시기가 늦춰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자들이 새로운 피임법이 나오면 거부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은 사실과 다른 측면이 있다. 남자들 역시 그들만의 피임법을 원한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직장인 최수희(33세) 씨는 “사실 콘돔으로 피임을 해도 상관은 없어요. 그런데 콘돔 없이 삽입하려는 남자가 더 많잖아요. 콘돔도 완벽한 피임법이 아닌데, 자칫 임신을 하게 되면 그 모든 책임은 오롯이 여자가 감수해야 한다는 게 조금 억울해요. 이왕이면 남자가 피임약을 먹거나 발라서 여자를 배려하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미술 강사 최원준(27세) 씨도 “여성도 부작용을 감안하고 피임약을 먹는데, 남자라고 못 먹을 이유는 없죠. 서로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남녀 모두 적절한 피임법을 사용하는 게 공평하다고 생각해요”라며 공감을 표한다.
남성 피임 실험의 선두에 있는 워싱턴 대학교 의과 대학의 의학교수인 존 아모리 박사는 “남자들이 남성 피임약을 원하는 것과 피임약이 정식 약품으로 승인받을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예요”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렇게 남성 피임약이 시중에 나오는 게 어려운 것일까?
여자는 하는데, 남자는 왜 못 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모든 피임법은 3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효과적이어야 하고, 안전해야 하며, 가역적(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이 모든 것이 충족되는 피임법을 오랫동안 연구했다. 미국 국립아동보건 인간개발 연구소에서 피임 개발 프로그램을 주도하는 다이애나 블리스 박사는 한 번의 사정으로 배출된 8억 개의 정자가 제 역할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1974년 엘시마 쿠티노 박사는 목화씨에서 분리한 염료인 고시폴을 이용해 피임의 3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일종의 구강 피임법으로, 목화씨에서 추출한 독성 물질을 사용해 정자 수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 결과 이 피임법은 가역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 개발이 중지됐다. 그때부터 피임 연구가들은 호르몬을 조절하는 방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매주 맞아야 하는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포함해서 말이다. 참고로 이 방법은 효과적이면서도 가역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됐다. 그러나 호르몬 피임법은 부작용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피임약을 복용하는 여성들이 겪는 체중 증가, 여드름, 감정 기복과 같은 부작용을 이유로 남성 피임약 개발은 중단됐다. 1996년 새로운 가능성이 보인 방법은 ‘잇 드러그(it Drug)’로, 남자를 위한 테스토스테론 주사였다. 하지만 실험 참가자들이 체중 증가, 발기부전, 번거로움을 토로하면서 실험은 다시 중단됐다. 10년이 지난 후 테스토스테론과 프로게스테론 주사의 또 다른 임상 시험도 중단해야 했다. 남자들이 근육통, 여드름, 우울증, 성욕 감소를 경험한 후 주사를 거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모리 박사는 “남자들은 성욕 감퇴나 체중 증가와 같은 부작용을 절대 참으려 하지 않아요”라며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약물 실험을 위해 자금을 지원하는 대형 제약 회사는 고객이 관심조차 가지지 않을 약품에 투자하거나 마케팅 및 홍보를 할 의지가 없다. 아모리 박사에 따르면 제약 회사에서는 남성 피임약 개발을 위한 기금 마련은 물론이고 시도하는 것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아모리 박사는 현재 정부의 지원 아래 정자 수를 감소시키는 호르몬 젤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알바니 의학 대학의 생명 윤리학 부교수인 리사 캄포잉글스타인 박사는 남성 피임약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심각한 성차별이라고 말한다. “여자들이 피임약을 먹고 성욕 감소를 경험했을 땐 어느 누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남성 피임약에 부작용이 나타나니 어땠나요? 사람들은 ‘말도 안 돼! 그건 남자라는 존재를 부정하는 거잖아’라고 말했죠.”

남성 피임약이 이처럼 실험과 재실험을 반복하는 동안 여성 피임법은 숱하게 승인을 받았다. 지금은 아주 흔하게 구할 수 있는 피임약처럼 말이다. <피임약의 탄생(The Birth of the Pill)>의 저자인 저널리스트 조너선 이그는 “여자들은 피임약에 대한 수요가 높아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남자들이 피임에 대해 신경을 끄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자들이 심각한 위험에 놓일 수 있는데도 말이다.
1960년에 승인된 ‘에노비드’를 예로 들어보자. 이 약은 저용량 호르몬 피임약의 자그마치 1만 배에 달하는 에스트로겐이 들어 있는 이 약은 혈전과 뇌졸중 같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 여자들은 수년간 이 약을 복용했다. 1974년 여성용 피임 기구인 ‘달콘 쉴드’는 시장에 출시된 지 3년 만에 모두 회수됐다. 이 기구를 사용한 많은 여성이 골반염, 임신 합병증, 심지어 사망에 이르는 심각한 신체상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여자들은 많은 일을 겪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일반적이라 생각하는 피임 부작용에 대해 몇몇 남자들이 불만을 터뜨리는 것만으로 실현 가능한 남성 피임약의 개발은 묵살됐다. 전문가들은 이 모든 것이 1960년대의 성차별적인 신념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당시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자유롭게 섹스를 하기 위해 어떤 것이라도 참을 의지가 있었지만, 피임약의 부작용을 견디거나 건강에 얼마나 해로울지 지켜볼 여유가 없었다. 실제로 쿠티노 박사는 유엔인구회의에서 자신이 개발한 남성 피임법에 대해 발표했지만 여성 관객들의 야유를 받고 무대에서 내려갔다. 당시는 여자들이 자신들의 생식 활동을 통제할 수 있게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이를 남자들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조너선 이그는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로 피임에 대해 남자들은 수동적으로 변했고, 어떤 책임감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게 됐죠. 그래서 여자가 본격적으로 남자 피임법을 고려하기 시작했을 땐 이미 그들의 마음은 떠난 후였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요즘 남자들은 다르다!
많은 제약 회사가 남자들이 남성용 피임약을 복용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거라 여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아니,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리사 캄포잉글스타인은 “요즘 남자들은 예전보다 피임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그들은 관심 없다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하긴 하지만요.”
오늘날 남자들은 정말로 콘돔 이상의 피임법을 원한다. 남성 피임약 연구의 펀딩과 촉진을 돕는 기관인 ‘남성 피임 계획’에서 최근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섹스를 하는 18~44세 남성의 77%는 피임법을 시도하는 데 ‘아주 혹은 다소 관심이 있다’고 응답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는 대부분의 남자가 섹스하기 직전에 먹는 피임약이나 매일 먹는 피임약이라고 답했다. 남성 피임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남자들의 3분의 1만이 발생 가능한 부작용을 걱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자들 역시 자신들이 피임에 관여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면 어느 정도의 부작용은 참을 수 있다고 말한다. 대학생 이경현(25세) 씨는 “누구와 관계를 하든 섹스할 때 갖게 되는 부담감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피임만큼은 불평등하게 여자에게만 책임이 부여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직장인 김현동(37세) 씨 역시 이에 동의하며 “피임은 한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에요. 임신을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모두 두 사람이 노력해야 하는 거죠”라고 덧붙인다. 대학생 유영우(22세) 씨는 현실적인 편리성을 조심스럽게 점친다. “콘돔은 끼는 동안 기다려야 하는 데 반해 약을 먹는다면 그 시간이 절약되니 더 애틋하고 만족스러운 관계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민망한 시간도 줄어들고요.”
정말 때가 됐다. 코스모 독자들 역시 무려 98%가 콘돔이나 정관수술 이상의 남성 피임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대부분의 여성은 모든 섹스 상대가 피임을 정확하게 실천한다고 믿진 않지만, 사귀는 관계라면 100% 신뢰한다고 했다. 만약 새로운 남성 피임법이 상용화된다면 상대에게 요구할 거라고도 말한다.
남자들도, 여자들도 남성 피임법을 원한다. 그러니 과학자들은 구시대적인 성차별적 신념 때문에 주저할 필요가 없다. 아모리 박사와 같은 전문가들 역시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호소하며 생식의 책임감과 위험성에 대한 모두의 생각을 바꾸려 노력한다. 피임에 대해 여자와 남자는 동등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양쪽 모두 중대한 의사 결정자가 돼야 한다. 또한 임신을 예방하는 데 남자들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약국에서 남자 친구가 피임 젤을 사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그가 피임 임플란트를 받을 때 따라갈 수도 있다. 피임 처방전을 그가 직접 받아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반세기 동안 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 당신은 피임에 대한 책임감을 조금 덜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