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 스틸컷
그럼에도 사람들은 ‘서른’이란 단어에 안달복달하며 유난이었다. 생애 가장 젊었던 시절이 끝나버린 것처럼, 인생의 ‘대유잼’ 시기는 다 지나버린 것처럼.
나의 서른은 9개월 전에 끝났다. 서른에 나는 코스모폴리탄에서 피처 기자로 일하고 있었고, 돌이켜보면 그 즈음 나는 스물셋부터 눈물 콧물 흘려가며 하던 일이 조금 익숙해지고 편해졌다.
선배들의 신경질을 적당히 받아낼 줄 알게 되었고, 당장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엔 힘을 쏟기 보단 시간 뒤에 숨어 기다리고, 무엇보다 일에만 쏟던 열정을 삶 전반에 고루 배분했다. 물론 매달 반복되는 일이 고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된 육체 노동으로 인한 체력 저하나 스트레스로 인한 위궤양 같은 건 모름지기 대한민국의 노동자에게는 디폴트 값 같은 거라 넘겼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안정’이라 부를 만한 어떤 균형이 자리 했던 때가 아닐까 싶다. 촬영 스트레스에 남몰래 화장실로 달려가서 얼마 먹지도 않은 걸 토해내거나 상사나 동료가 던진 말 한마디에 마음을 써가며 동동거리는 날이 줄었다.
오만하지만 나의 삶은 예견이 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던 일을 계속 할 테고 만나던 사람들을 만날 거고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겐 같은 말로 나를 설명 하겠지. “아, 그러니까 잡지사에서 일하는데요.. 아..만나봤던 연예인 중에 가장 예쁜 연예인이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엉엉 울고 싶어졌다. 너무 뻔해서, 내 삶은 이제 그 똑같은 삶을 견디는 것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모처럼 내 삶에 깃든 안정이, 예측 가능한 내 미래가 지루했다. 내가 어떤 능력과 가능성을 지닌지도 모르면서 당장의 안정감을 이유로 지금의 현실에 나를 묶어 버린 것 같았다.
이런 말을 하면 혹자는 “서른은 현상 유지를 해야 하는 때”라고 했다. 지금껏 배운 것을 써먹거나 후배에게 가르쳐주고, 그걸 토대로 자산을 모으는 나이. 그러니까 회사 그만둬야 할 이유 찾을 시간에 하던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또 다른 이는 “고작 서른이면서 앓는 소리 하지 말라”고도 했다. 그에게는 “당신이 서른일 때 누가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떤 기분이었냐”며 명치를 치고 싶은 걸 참았다.
아 몰라. 다 됐고, 나는 나의 가능성을 재평가 받고 익숙해진 사고를 뒤바꾸고 새로운 자양분이 되어줄 계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공교롭게 그 즈음에 서른을 맞았다.
직장인이 지루함을 타개하고 싶을 때 가장 쉬이 선택하는 건 보통 퇴사 또는 이직이다.
이 말이 시시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노예 DNA’가 생각보다 뿌리 깊게 박힌 이 땅의 직장인들이 퇴사 후에 ‘세계일주’, ‘파리 한달 살아보기’와 같은 선택지를 고르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나에겐 용기도 돈도 없었다.
그저 지루한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희미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의지만 있었을 뿐.
일단 회사에 ‘3개월 후 그만두겠노라’고 알렸다. 내가 세운 이직의 기준은 단 하나. ‘지금 몸담은 업계가 아닌 전혀 다른 영역의 회사에 취직할 것’.
사람들은 ‘지금껏 경력이 있으니(나는 7년차 기자였다)’ 혹은 ‘잘 팔리는 연차이니 금방 취직할 것’이라고 했지만 업계에서만 이직을 반복했던 내가 다른 시장에서 내가 어떻게 보일지 알 수 없었다.
그 후엔 참 안 괜찮은 행위들이 반복됐다. 이력서를 쓰고, 자소서(자기소개서)를 쓰고, 사람인을 포함한 다섯 개 구인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등록하고, 쥐꼬리만 한 연봉을 조금이라도 늘려보겠다고 복잡한 연봉계약서를 눈이 빠지게 들여다봤다 (당신의 연봉 계약서가 지나치게 복잡하다면 그건 회사가 기본급을 낮추기 위해 온갖 항목들을 끌어다 놓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가끔은 “새로운 업계로 이직하시는 건 이직하시려는 회사에서도 리스크를 감당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연봉을 낮추셔야죠” 라는 헤드헌터의 개뼉다구 같은 소리를 들어야했다. 취준생들이여, 이 말에 속지마라. 종종 취준생들의 불안감을 이용하는 회사의 프락치에 가까운 헤드헌터들이 있게 마련이다.
동시에 서른을 ‘시집 갈 나이’라 여기는 시골 사는 부모님에게는 그만뒀단 말도 못해서, 휴가를 쓴 척 하는 연기력을 요하는 시기였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사회 생활에 어느 정도 인이 박였다 생각하여 잊었던 것들이 있었다. 나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나를 증명하는 건 여전히 짜증나고, 싫고, 일정 부분은 아픈 일이라는 것.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천우희가 쓴 소설 제목은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지만 실상은 ‘서른 되어도 하나도 안 괜찮았다’.
결론적으로 나는 나에게 준 기한 안에 취직을 했다. 표면 상으로는 길지 않은 시간이라 징징대기 낯부끄럽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3개월이 될지, 6개월이 될지, 3년이 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한 시간이었다.
취직은 하고도 문제인데, 또 다시 3개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시기를 보냈다. ‘오피스 용어를 알아듣지 못해 네이버 검색에 열을 올리던 시기’ 쯤으로 그 시간을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어찌 저찌 내 삶은 재편됐다. 새로운 사고를 지닌 사람들을 만나고(물론 이 중엔 짜증나는 게 더 많다. 가령 흡연 구역에 서 있는 ‘유일한’ 여직원인 나를 훑는 아저씨들 같은), 추석엔 마감 걱정 없이 고향으로 내려가는 차표를 끊을 수 있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고민을 하는 시기. 가끔은 전혀 새로운 사고와 사람으로 인해 내가 한층 더 풍성해진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
‘자, 이만 나의 성공적인 이직 체험기를 마친다’라고 건방을 떨기엔 결국 내가 만든 이 계기도 유효기간이 있음을 안다. 나의 삶은 또 언젠가 변화를 필요로 할 거다. 그럼 그냥 또 어떤 방식으로든 계기를 만들면 된다. 삼십대는 그런 나이니까.
혹시 당신이 지금 하려는 일에 서른이란 나이가 혹은 고정관념이 혹은 그 무게가 걸림돌이 된다면 확실히 말해줄 수 있다. 서른은 뭐든 그만두고 뭐든 새로 시작해도 좋을 나이라고.
물론 변화를 꾀하는 과정은 아프다. 단언컨대 해봤다고 해서 괜찮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분명 답을 찾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서른이라 이젠 못해’라는 사람에게 ‘서른이니까 지금 해야 해’라고 말하고 싶다. 서른이라, 서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