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의리의 가벼움 |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KOREA)

절대 흔들리지 않는 관계는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불리한 상황에 빠르게 인간관계 손절을 선언한 이들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으려니 입맛이 쓰다. 의리란 무엇인가? ::에세이, 라이프, 컬쳐, 싱글, 다이어리, 의리, 인간관계, 미혼,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 에세이,라이프,컬쳐,싱글,다이어리

‘도로남’이라는 트로트를 들어본 적이 있나? 발표된 지 30년이 다 돼가는 구닥다리 유행가를 굳이 아느냐고 묻는 이유는 300페이지 자기 계발서 한 권을 읽는 것보다 3분짜리 노래를 한 번 흥얼거려보는 게 당신의 인생에 훨씬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노래의 주요 내용은 이러하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님’이 된 사람도 도로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는 게 인생이다. 얼핏 보기에는 아재나 할 법한 시시한 말장난 같지만 가사를 음미해보면 ‘사람은 점 하나 지웠다 찍었다 하는 것처럼 쉬 오고 가기 마련이니 인간관계에 집착하지 말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닌데? 나랑 내 애인은 평생 한눈팔지 않기로 약속했거든?”, “우리도 아니거든! 나랑 내 친구는 지옥이라도 끝까지 같이 가기로 맹세했는데?”라고 목소리를 드높이는 사람이 있다면, 워워~ 흥분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보시라. ‘님’인 척 사근사근히 접근해놓고서 성관계 영상을 몰래 찍어 동네방네 퍼트리는 인간을, 언제는 둘도 없는 친구인 척 우정을 과시하더니 몰카 사건이 터지자마자 실은 ‘남’이라고 선을 긋는 사람들을 말이다.한때는 나도 영원히 변치 않는 관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나에게 그런 환상을 심어주었던 그는 대학 동기인 남자 사람 친구였다. 대학 시절 내내 붙어 다니며 힘든 일이 있으면 돕고, 기쁜 일이 있으면 나누었다. 사랑과 우정, 그 중간 즈음에 끈끈한 20대를 보내던 우리는 “서른이 됐는데 둘 다 미혼이면 그때 결혼하자”라고 농반진반으로 얘기했다. 거친 풍파를 이겨내며 여생을 함께 살아가려면 뭐니 뭐니 해도 서로를 향한 의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서른은 쏜살같이 다가왔다. 30대가 되면 으레 가지게 될 줄 알았던 집도, 차도, 훤칠하고 돈 많은 남편도 내겐 없었다. 그 대신 뒤통수를 치고, 또 치는 사회생활을 겪은 끝에 인간에 대한 불신과 혐오는 한껏 얻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눈물, 콧물을 짜다 지친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말했다. 아무래도 세상에 믿을 사람은 너밖에 없는 것 같다고, 너랑 나 서른이고 둘 다 미혼이라고, 그러니까 우리 이제 결혼하자고. 나의 청혼을 흔쾌히 수락할 줄 알았던 그는 난색을 표하며 답했다. 얼마 전 연상의 여인을 만났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결혼을 준비하게 됐다고,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이 사람을 버리고 너한테 가면 난 결국 배신자가 되는 거잖아. 그건 네가 원하는 내 모습이 아닌 것 같아.” 아, 그는 진정한 의리의 사나이였던 것이다!그 전화를 끝으로 우리는 남이 됐다. 10년 동안 쌓은 우정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 녀석이 야속했지만 한편으론 배우자로서의 신의를 굳건히 지킨 그가 듬직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그의 존재조차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나의 SNS에 반가운 비밀 글 하나가 올라왔다. “잘 지내냐, 아직도 혼자인 모양이네.” 다정하게 안부를 묻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였다. 그런데 글을 읽을수록 이상야릇한 느낌이 점점 짙어져만 갔다. 뭐야, 이 자식, 이거 유부남이 아가씨 꼬시려고 할 때 늘어놓는 쉰내 나는 개소리잖아? 찬란하기만 했던 그와의 추억, 괜찮은 사람이라 여겼던 그에 대한 믿음 모두 한순간에 와장창 깨져버렸다. ‘님’에서 ‘남’이 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놈’이 돼버리는구나. 에라, 이 천하의 나쁜 놈아!About 이주윤글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아동서, 성인서, 가리지 않고 작업한다. <어린이를 위한 마음 공부>라는 순수한 책을 내기도 했지만, <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이라는 희한한 책도 썼다. 어쨌든 간에 잘 읽히는 글을 쓰는 게 인생 최대의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