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 다이어리 "주제를 파악해보시오" |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KOREA)

학창 시절 국어 시험에 단골로 나왔던 문제는 다름 아닌 주제 파악. 그때는 곧잘 찍었던 것 같은데, 주제 파악의 대상이 글이 아닌 내가 되니 세상 난해하기만 하다. 어쩌면 인생은 내 주제를 파악하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싱글다이어리, 싱글, 에세이, 문화, 라이프. 컬쳐, 주제파악,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 싱글다이어리,싱글,에세이,문화,라이프. 컬쳐

“네 주제를 알라”는 그 단호한 한마디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갓 사회에 발을 들인 새내기 인턴이었다. 정직원도 아니고, 비정규직도 아닌 그냥 ‘인턴 사원’. 뭔가를 배우는 것 같지만 좀처럼 능숙해지지 않았고, 실수의 연속이었다. 잘못해 상처가 생긴 곳엔 굳은살이 박이기는커녕, 자괴감에 빠져 주눅만 들었다. 모든 게 묵직하고 버겁던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사와 함께 차로 이동하던 중 반대편 차선에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 멋진 외제 차를 운전하는 모습을 봤다. 난 “언젠간 저런 차를 타보고 싶어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상사는 고개를 돌려 실눈을 뜨고 나를 보며 싸늘히 말했다. “네 주제에?” 아마도 그때 처음으로 나의 주제와 분수에 대해 정면으로 맞닥뜨렸던 것 같다. 도대체 내 분수가, 내 주제가 어땠길래 하고 말이다. 그는 왜 나에게 그렇게 말했을까? 그냥 너그럽게 “그래, 열심히 노력하면 할 수 있을 거야” 정도로만 말해줘도 될 걸, “네 주제에?”라니. 내 주제가 어찌됐든, 그렇게 타인이 무작정 단정한 나의 분수를 남의 입으로 듣는다는 것이 몹시 불쾌했다. 어쩌면 그날 나는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이 바라본 ‘나의 주제’를 뛰어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고 말이다.그 후 내가 어떻게 내 주제 파악을 했는지, 내 분수와 한계를 얼마나 뛰어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기타를 치다 음악을 시작했고, 브랜드 매니저가 됐으니 조무래기 인턴 시절보다는 꽤 발전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되돌아보면 나는 내 주제와 분수를 알면서도 그 경계선에서 조금 더 나아가는 걸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지난해 봄, 이번에는 나 스스로 ‘내 주제에’라는 말을 썼다. “네 주제에”가 아니라 “내 주제에”. 호기로움은 온데간데없고, 어느덧 한계와 두려움에 직면한 그런 순간이 다시 오고야 만 것이다. 당시 나와 내 남편은 서로의 프로젝트에 골몰하고 있었다. 나는 선대의 가업을 연계한 침구 브랜드를, 인디 음악 레이블을 운영하던 남편은 아티스트들이 교유할 수 있는 살롱 겸 공연장을 론칭하고자 했다. 각자의 프로젝트였지만 우린 서로의 일을 내 일처럼 돕고 있었다. 남편의 살롱과 내 침구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잡고 제작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 첫 과제였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한참을 헤매다가 남편에게 무겁게 한탄했다. “내 주제에 무슨 브랜드 론칭이야. 못 해, 못 해!”를 외치다 결국 그날 남편과 나는 대판 싸웠다. 이제 와서 못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냐는 남편의 핀잔이 계속될수록 화가 치밀었다. 게다가 남편에게 “야! 너는 그럼 나한테 용기나 좀 달라고!” 하는 잔망스러움이라니. 용기를 구걸하는 나는 정말 밥맛이었다. 그날 우리는 서로가 프로젝트를 간절하게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너무도 원하니 어쩌겠는가? 해야지.결국 하긴 했다. 하긴 했다는 말은 완벽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직도 고쳐야 할 것이 눈앞에 가득하다. 하나 어찌됐건 이 일은 우리의 분수와 한계를 뛰어넘은 역사적인 일임은 확실했다. 나는 내 분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인가? ‘글쎄요’가 정답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감히 내 주제를 계속해서 확장하고 싶다는 바람과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나, 주제 파악 잘하고 있는 거겠지?About 어쩌면 아티스트(이경미)간간이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른다. 회사를 다니다 얼마 전엔 이불 가게 ‘모든 요일의 방’을 창업했다. 종종 남편의 합정동 음악 공간 ‘살롱 문보우’에서 술도 마시고 커피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