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아무도 모른다, 어젯밤의 나

연말 술자리, 난무하는 흑역사의 편린으로 괴로운 적이 있는지? 술 마신 다음 날 몸은 말짱한데 종일 뚜렷한 이유 없이 기분이 안 좋았던 적이 있다면, 당신은 ‘심리적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것. 코스모가 전문가들과 함께 심리적 숙취의 원인과 극복법을 알아봤다.

BYCOSMOPOLITAN2018.12.12


심리적 숙취, ‘Hangxiety’

회사원 정수민 씨(가명, 29세)는 과음한 다음 날, 두통이나 속 쓰림 같은 증상 외에도 불안, 스트레스 등의 후유증에 시달린다. “처음엔 그냥 몸이 안 좋아서 기분도 그런 건가 했어요. 그런데 신체적 증상이 딱히 없을 때도 우울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더라고요. 어젯밤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허언이나 헛소리를 한 건 아닌지 신경 쓰여서요. 대학생 땐 그런 게 귀여운 주사일 수도 있지만 사회생활에선 그렇지 않거든요. 평소 사람들한테 보이기 꺼렸던 제 모습을 드러낸 것도 후회스럽죠. 필름이 끊겼을 땐 불안감이 더 심해져요.” 

정수민 씨처럼 과음 후 특별한 원인 없이 기분이 좋지 않거나 불안과 걱정 등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현상을 일컫는 신조어가 있다. ‘Hangxiety’는 ‘hangover(숙취)’와 ‘anxiety(불안감)’의 합성어로 술 마신 다음 날 스트레스와 걱정, 죄책감 등의 감정에 시달리는 현상을 뜻한다. 우리말로는 ‘심리적 숙취’로 풀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니 처음 보는 남자가 침대 옆에 누워 있거나, 주차장 표지판이 왜 내 방에 있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필름이 끊기는 것, 영화 <행오버>의 주인공들처럼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만이 ‘Hangxiety’는 아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약학대 교수 토머스 캐시는 ‘술 마신 후에 느끼는 불안감이나 걱정을 비롯해 속 쓰림, 심장박동 수 증가, 식은땀, 숨 가쁨, 배탈 같은 신체적 증상’ 등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한다. 


술 마신 다음 날, 기분이 안 좋은 이유 

‘Hangxiety’는 물론 특정한 장애나 의학적으로 정의된 신체 이상 증세는 아니다. 그러나 정신 건강 전문가들은 음주에 뒤따르는 이러한 정신적·신체적 후유증의 개연성을 인정한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인지행동 치료센터의 데브라 키슨 박사는 우리가 이미 술 마신 다음 날 느끼는 불안감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과음하면 평소와 달리 정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누군가의 말이나 지시를 잘못 해석하고, 쉽게 분노하는 그 과정에서 친구나 동료, 파트너, 낯선 사람과 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키슨 박사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뇌의 화학적 변화에서 찾는다.  “술은 우리 몸의 긴장을 완화하는 신경전달물질 가바(GABA)의 분비를 촉진하는 동시에 반대 효과를 내는 신경전달물질 글루타민산염의 정상적인 작동 기제를 방해합니다. 즉 알코올이 제어할 수 없는 글루타민산염의 생성을 초래해 기억과 연관된 뇌의 감각기관을 손상시킨다는 뜻이죠. 흔히 말하는 과음 후 필름이 끊기는 현상, ‘블랙아웃’이 일어나는 게 글루타민산염의 과작동 때문입니다. 과음으로 우리의 뇌 속에서 이러한 작용이 반복되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불안감이 점차 증폭됩니다.” 구로 연세봄정신과의 박종석 원장도 비슷한 의견이다. “술이 뇌의 중추신경계를 억제하고 가라앉히는 작용을 해서 일시적으로 편안함과 차분함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가바라는 물질이 신경안정제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는 초반에만 일어나는 작용일 뿐입니다. 우리 몸이 술에 익숙해지면 금단 증상, 부작용이 나타나기 때문에 중독되거나 의존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박종석 원장은 특히 손이 떨리거나 식은땀을 흘리는 등 ‘금단 증상’과 함께 스트레스 역치도 낮아진다고 말한다. “술에 의존하는 이들이 평소 짜증이나 화를 자주 내고 불면증, 불안감, 안절부절못하는 증상을 보이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또한 알코올이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불리는 코르티솔 분비를 촉진해 스트레스 내연성을 낮춘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깰 때까지 깬 게 아니다 

캐시 교수는 “평소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 사람이라도 과음으로 ‘심리적 숙취’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당신이 연말 분위기에 취해 술을 과하게 마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불안감’에 점점 더 민감해지게 된다는 뜻. 회사원 이상미 씨(가명, 33세)의 사례가 이와 비슷한 경우다. “최근 동남아로 여행 갔다가 알게 된 옆자리 일행과 말이 잘 통해 와인을 왕창 마시고 전날 밤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적이 있어요. 같이 술 마신 애들이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인지, 술집에서 숙소까지 어떻게 왔는지, 

그 낯선 이들이 인사불성이 된 내 모습을 촬영한 건 아닌지, 별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불안하고 자책감도 심하게 들어요.” 

박종석 원장은 의존이나 중독이 아니더라도 과음하는 사람들의 불안 점수와 우울 점수가 높게 측정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알코올 남용·의존증인 사람의 절반 이상에서 우울·불안 장애가 함께 관찰된다. “술이 불안감과 우울감을 야기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술을 마시는 악순환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환자들의 경우 치료가 까다롭고 예후가 나쁜 편입니다.” 최근의 한 연구 결과는 ‘심리적 숙취’의 위험성을 입증하는 또 다른 사례. 영국 배스 대학교 심리학과 크레이그 건 교수팀은 의학 저널 <어딕션>에 “술을 마신 후 시간이 지나 알코올 성분이 혈류에 남아 있지 않아도 숙취로 인한 정신적·신체적 손상은 지속된다”라는 연구 결과를 게재했다. 연구팀이 이와 관련된 19개의 논문을 분석한 결과 숙취가 장·단기 기억력과 정신 운동, 지속적인 주의력을 감퇴시킨다고. “과도한 음주를 하면 술이 깬 후, 즉 체내에서 알코올 성분이 다 빠져나간 후에도 집중력과 기억력이 감퇴하고 심리적·운동적 기능에 종합적인 손상이 일어납니다.” 크레이건 교수의 의견이다. 맥주 한 캔, 와인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고? 안타깝게도 또 다른 연구 결과가 ‘안전한’ 음주량은 없다고 말한다. 의학 저널 <랜싯>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적당한 음주가 심장에 이로울 수는 있어도 신체적·정신적 손상은 물론 암 등 다른 질환의 발병 위험을 증가시킨다. 그래도 술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가? 옆의 지침이 ‘Hangxiety’로부터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 

Keyword

Credit

  • 프리랜스 에디터 류진
  • 사진 Getty 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