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여행지에서의 하룻밤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를 기대하는 건 너무 순진한 걸까? 낯선 공기, 생경한 풍경, 뜨거운 태양 아래 누군가와 눈빛을 주고받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훌훌 털고자 떠난 여행지에서 누군가를 얻었던 기억에 대해.

BYCOSMOPOLITAN2018.07.19



부산에서의 하룻밤

블라디보스토크는 못 가더라도 부산이라도 가야지 싶은 마음이었다. 어느 금요일 저녁, 일과 관련해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나는 부산으로 가는 KTX에 몸을 실었다. 친구들은 “혼자서 여행?”이라고 의아하다는 듯이 굴었지만 상관없었다.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무작정 해운대로 향했다. 해운대의 밤은 아름다웠고, 기분 좋은 밤바람이 불어왔다. 사람들을 구경하며 맥주를 마시는데 어떤 남자가 옆에 앉는 인기척이 났다. 애써 티는 안 냈지만, 자세를 고쳐 앉고 얼굴 각도와 표정을 가다듬었다. “서울에서 왔죠?” 부산 사투리 억양의 목소리가 훅하고 들려왔다. “어떻게 알았어요?” “예뻐서요.” 뻔뻔하게 나오는 게 과연 경상도 남자였다. 몇 마디를 더 주고받다 그가 회에 소주나 마시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근처 횟집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나이와 직업 알아맞히기 따위의 가볍고 따분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차피 숙소도 안 잡았는데 잘됐단 생각이 들었다.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를 꿈꿀 정도로 순진하진 않지만 낯선 기대감 같은 게 차올랐다. 게다가 외모도 나쁘지 않으니 이만하면 하룻밤 상대로 괜찮을 것 같았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싸구려 코롱 냄새가 코를 훅 찌르는 모텔 방 안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의 옷을 벗기고 키스를 했다. 그와 키스하며 맞은편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본 순간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지만, 그저 이 상황을 온전히 즐겨보기로 했다. 내 가슴을 움켜잡았던 그의 손이 어느새 원피스를 들추며 팬티로 향했다. 그가 팬티도 벗기지 않은 채 능숙하게 손으로 클리토리스를 애무하기 시작했을 땐 나도 모르게 “억!” 하고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자세를 다섯 번이나 바꿨을 땐 설마 이름도 모르는 이 남자가 내 소울 메이트인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어쩌면 이 사람과의 로맨스를 꿈꿨던 것도 같다. 낯선 도시의 생경한 공기 때문인지,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남자와의 하룻밤이라 그런지 거리낄 것이 없었다. 나도 그도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여름밤은 길었고, 우리는 아침까지 세 번에 걸쳐 뜨거운 정사를 나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 남자의 얼굴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고, 크리스 브라운과 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한다는 말만 기억나 헛웃음이 났다.  -28세의 크리스토퍼놀란녀



연하남과의 연애

회사도, 가족도 등지고 떠난 런던에서 머문 지 3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타지에서 혼자 지내니 슬슬 외로움이 밀려왔다. 이럴수록 차려입고 밖으로 나가야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작정하고 짧은 원피스를 입은 뒤 풀 메이크업까지 마치고 길을 나섰다. 퇴근 시간만 되면 금융업계에 종사하는 전문직 남성들이 잔뜩 출몰한다는 뱅크역에 갈 생각이었지만, 지하철이 15분이나 이유 없이 정차하는 바람에 노선을 바꿔 템스 강변을 걸었다. 관광객이 몰리는 런던 아이를 피해 구석으로 들어갔다. 무리 지어 굴리는 스케이트보드의 공명이 느껴졌다. 보드를 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난간에 기대 구경하는데 한 청년이 내 앞에 탁 멈추며 물었다. “스케이트보드 좋아해?” 많아야 25세로 보이는 그가 귀여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냥 보는 거야. 너 엄청 잘 타더라.” 대답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그는 땀에 젖은 티셔츠를 벗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새 옷과 액정이 박살난 아이폰을 꺼냈다. 그가 훌러덩 옷을 벗는 순간 나는 봤다. 귀여운 타투가 그려진 탄탄한 복근을. 나도 모르게 광대뼈가 올라가고 잇몸이 건조해졌다. 마치 청춘 영화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웃는 내 얼굴을 보며 그도 함께 웃었다. 그리고 산산조각난 액정을 들이밀며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물었다. ‘이럴 수가, 이름보다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먼저 묻는다고?’ 예상 나이가 25세에서 22세까지 내려갔다. 펍으로 가는 길에 그는 계속 내 나이를 궁금해했다. 서양인들은 나이 신경 안 쓴다고 누가 말했나. 다 거짓말이다. “몇 살처럼 보여?” 뻔한 질문에 그는 착실히 대답했다. “22살?” “아니.” “23살?” “아니야.” “21살?” “아니.” “오 마이 갓! 설마… 19살?” “나… 32살이야.” 집까지 바래다주는 내내 그 아이는 나를 충분히 웃겼고, 나의 어설픈 영어에 그도 많이 웃었다. 갖고 있던 보드를 한번 타보겠다며 까부니 손도 잡고, 허리도 잡아주는 게 싫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만났다. 발걸음 닿는 곳마다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갤러리와 공원에 갔다가 그의 친구들도 만났다. 친구들에게 자연스럽게 나를 ‘마이 걸’이라 소개하는 걸 보며, 이 정도면 열 살 어린 남자애와 자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날 밤, 런던에서 차로 40분 떨어진 그의 집으로 갔다. 내 벗은 몸을 보더니 그가 나지막이 외쳤다. “할렐루야!” 첫 만남부터 연애가 끝난 시점까지 그는 나에게 놀람과 웃음만 남겼다. 사실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끝까지 알리지 못한 채 연애를 끝내고 말았다. 그래도 괜찮다. 연하남을 만나는 게 더 좋아졌으니까. -33세의 밥 잘 사주는 누나



 실패한 여행과 마리아 

“몇 개 같아?” 헤어진 애인과 유럽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친구는 손가락 두 개를 눈앞에 흔들어댔다. “미친 생각이야. 분명 실패한 여행이 될 거야.” 하지만 예정대로 나는 그녀와 함께 떠났다. 취한 밤, 서로의 침대에 기어들어가 몸을 더듬는 날도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순간의 외로움을 달래줄 여행 메이트로서 서로를 애무했을 뿐, 연애나 사랑 같은 감정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우리는 암스테르담에서 헤어졌다. 그녀는 베를린으로 떠났고, 나는 일주일 뒤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호텔을 떠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그동안 쌓인 한(?)을 풀기 위해 매일 밤을 술에 취해 보냈다. 내가 묵었던 혼성 도미토리에는 국적 불명의 남녀들이 속옷만 입고 생활하는 풍경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중 루마니아에서 왔다는 한 여자가 특히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이름과 달리 매일 밤 새로운 남자를 방으로 데려오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귀국 하루 전, 도미토리 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마리아가 나와 담배를 말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하얀 티셔츠에 속옷 차림이었다. 그녀는 연거푸 담배를 빨아들인 뒤 내게서 맥주를 뺏어 들었다. “실례할게.” 취한 듯 느리고 끈적이는 발음. “네 남자 친구는 어디 갔어?” 내가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직접 만 잎담배를 권했다. 독한 향에 정신이 아찔했다. 우리는 보드카와 맥주를 나눠 마셨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얼마나 지났을까? 등 뒤로 테라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혀를 멈췄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한참 웃었다. “좋은 곳이 있어.” 그녀가 내 손목을 잡아끌었고, 우리는 맨발로 건물 옥상에 올랐다. 바닥을 뒹구는 맥주병,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샌들, 물탱크, 건너편 건물의 네온사인… 가죽이 벗겨진 소파도 하나 있었다. 건물 아래 골목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음악과 술 취한 사람들의 고성을 BGM 삼아 우리는 서로의 몸을 탐했다. 취기와 열기, 소음과 교성이 한데 섞여 난장을 벌였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자꾸만 미끄러졌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암전. 마침내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침대 위에서 속옷만 간신히 걸친 채였고, 반대편 마리아의 침대는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나는 시간에 쫓겨 짐을 챙기고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수속을 밟고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도 모든 게 꿈인 듯 아득했다. 마리아. 성모의 이름을 가진 루마니아 여인. 한국에 돌아와 시차 피로가 모두 가신 후에도 그날 목에 난 생채기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의 뜨거운 여름밤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마리아가 남긴 상처를 가만히 만지곤 한다. -30세의 요셉



황금빛에 젖어버렸어

황금빛이 도시 곳곳에 내려앉은 것처럼 보였다면 그저 그런 과장처럼 들릴까? 해가 진 피렌체의 거리는 그냥 노랗다고 말하면 섭섭할 만큼 황홀한 빛을 냈다. 독불장군도 매료될 아름다운 거리. 아직 춥고 비가 오던 그날, 나는 두오모 앞에 앉아 맥주 캔을 쥐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오래 살면 이 도시의 황홀함에 익숙해질까.’ 아무튼. “그 맥주 한 모금 줄래요?” 여자 목소리였다. 고개를 드니 푸른빛의 눈을 지닌 그녀가 서 있었다. 마침 내리던 부슬비가 그녀의 금발 위로 내려앉아 아련한 빛을 냈다. “저는 이곳 예술 학교에 다니는 유학생이에요. 당신은 여기서 몇 년째 살고 있나요?” ‘그녀의 말은 내가 이 도시와 꽤 어울린다는 의미일까? 흰 셔츠를 입길 잘했군.’ 우리는 대화를 계속했다. 서로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우리는 스마트폰에 담긴 생경한 이미지를 보여주며 말보다 눈으로 이해시켰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스마트폰보다 그녀의 하얗고 가는 팔목을 더 오래 봤던 것 같다. 그러다 그녀의 눈이 내 풀어진 셔츠 안과 목선을 응시하는 걸 느꼈다. 나는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서 말했다. “비를 맞고 얘기하다간 옷이 다 젖을지 몰라요. 괜찮다면 내 숙소에서 마저 이야기할래요?” 그녀는 말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에 도착했다. 곧장 낮에 사둔 레드 와인을 꺼냈고 랩톱으로 영화도 켰다. 그러자고 만난 건 아니지만 안 그러기도 섭섭한 긴장이 우리 사이에 흘렀다. 모르는 척 서로의 손이 스치거나 그녀가 어깨에 기댈 때마다 놓치기 싫은 감각이 풍성해졌다. 목이 마르진 않았지만 와인 한 잔을 금세 비웠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그날 밤을 서로에게 완전히 허락했다는 걸 알았다. 어쩔 수 없이 우린 과감해졌다. 영화는 그녀가 껐다. 생경한 도시에서, 아직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 이럴 줄이야. 더 음란해도 될 것 같은 해방감. 우리의 손길엔 서로에 대한 예의가 있었고 그녀 입술은 기분 좋게 보드라웠다. 그때 내 손은 그녀의 등을 지나 가슴에 닿았다. “하아…” 그녀의 깊은 숨소리가 내 귀에 내려앉았다. 어디가 어떻게 단단해지는지, 그게 못내 예뻐서 혀끝을 댔을 때 그 부드러운 배가 어떻게 경련하는 지 내내 궁금했다. 그렇게 우린 서로를 여행했다. 몇 시간을 뒹굴었을까. 침대가 흥건했다. 뭐가 부족했던 건지 우린 몇 번 더 여행했다. 더는 안 되겠다, 돌아누웠을 때 창문 밖을 봤다. 푸르스름한 빛으로 변한 새벽녘 피렌체의 거리가 보였다. 그날의 난 그 도시에 얼마나 취해 있었나. 나를 적신 부슬비나 와인도 충분히 낭만적이었지만 황홀한 피렌체 밤의 황금빛은 여전히 잊을 수 없다. -27세의 플레이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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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김소희
  • 사진 Anais & Dax/August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