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슬로우라이프를 즐기는 부부 |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KOREA)

결혼 3개월 차, 그와 함께 먹을 밥상을 차린다. 벼를 도정해 쌀을 얻고, 그 쌀을 깨끗이 씻어 돌솥에 밥을 안친다. 제철 재료를 조금씩 사다 조물조물 반찬을 만든다. 그의 젓가락이 부지런하게 움직인다. 감사하다. | 라이프,슬로우라이프,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걸음이 느린 한 남자를 만났다 초고속 카메라로 찍어낸 것 같은 그의 슈퍼 슬로모션에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수입이 불규칙한 프리랜서임에도 걱정 따위 없어 보였다. “매사 그렇게 게으르고 천하태평이에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다짜고짜 쏘아붙였다.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의젓하게 답했다. “음, 느리다고 말한 건 하늘 씨가 처음이고요. 그리고 인생은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됩니다.” 무안함과 안식이 교차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된다는 그의 말을 믿고 싶어졌다. 늘쩡거리는 그의 걸음에 발을 맞췄다. 어느새 불필요한 것들에 속을 태우며 매사 조급하게 볶아쳤던 마음도 느른해졌다. 그 사이로 그가 꾸준히 걸어 들어왔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봄이 왔다. 망설임 없이 와서 제멋대로 재능을 펼친다. 유쾌해진 마음으로 몸을 움직여야지. 청소를 해야겠다. 창문부터 열어젖힌다. 다행히 오늘 미세먼지 농도는 안전하다. 벽마다 봄볕이 드리운다. 때도 모르고 자고 있는 남편을 깨운다. “밥 먹어야지.” 긴 잠에 허기가 졌는지 단숨에 일어난다. 물 한 컵 먹이고 먼지떨이와 밀걸레를 쥐여준다. 꼼꼼한 성과를 바란다기보다 참여에 의의를 둔다. 기특하게도 시키는 건 군말 없이 잘해낸다. 그는 먼지만 날리는 정적이 지루했는지 턴테이블에 LP판 한 장을 얹는다. 나긋나긋한 보사노바가 울려 퍼진다. 나는 그새 냉장고를 열어 식재료를 모조리 꺼내고, 선반과 서랍을 세척하고 소독한다. 비릿하게 묵은 냄새가 가신다. 부품과 재료는 모두 제자리로 돌려두고, 포스트잇을 떼어 남은 음식과 재료를 적어 냉장고 문에 붙인다. 그러곤 장 볼 거리를 하나둘 적어 휴대폰 뒤에 붙인다. 폰 메모장을 두고 꼭 종이에 써 다니는 것은 엄마를 보고 배웠다. 지키고 싶은 습관이다. 쓸고 닦느라 뻐근해진 몸을 늘인다. 봄눈 녹듯 사르르 유연해진 마디마디에 마음도 가뿐해진다. “장 보러 가자.”산책하듯 장을 본다걸어서 5~10분 거리에 작은 슈퍼마켓과 농협 하나로마트가 있다. 코앞에 있는 작은 슈퍼마켓은 물건이 영 제값을 하지 못하고, 하나로마트는 늘 찾는 것이 없어 빈손으로 돌아오기 일쑤다. 마을버스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망원시장도 있지만 소분된 양을 사기 어려울 때가 많다. 최적의 선택은 연희동에 있다. 산책도 하고 일광욕도 할 겸 걸어가기로 한다. 연희동에서 꽤 유서가 깊으며 슈퍼마켓부터 꽃집, 잡화점과 제과점, 푸드 코트가 입점해 있는 마켓이다. 채소와 허브, 육류 등 그 종류와 부위가 다양하고 특출나게 신선해 푸드 스타일리스트도 즐겨 찾는다. 최근 연희동에서 ‘마크로비오틱’(자연에 대한 감사를 배우는 라이프스타일) 수업을 들으며 더 자주 가게 된 곳이다. 가격은 제법 나가는 편이지만 먹을 만큼만 소량을 살 수 있다. 재료를 묵혔다 버릴 일이 없으니 낭비와 냉장고 청소 횟수도 줄일 수 있다. 가격이 부담스럽다면 보통 평일 오전에 가거나 마감 시간에 임박해 가면 된다. 오전엔 ‘SALE’ 스티커가 붙은 채소가 많고, 저녁엔 육류 깜짝 할인이 많다. 오늘의 재료는 말린 감태, 양배추, 섬초, 샐러드 채소. 마침 시금치와 달래가 할인 매대에 나왔다. 재빠르게 덥석 집어 카트에 싣는다. 눈치를 살피던 남편은 육류 코너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역시나 할인 딱지가 붙은 소고기 한 팩을 집어 온다. 예상한 충동 구매다. 눈을 부릅뜨고 가격표가 ‘두 번’ 붙은 것(할인가라는 말) 위주로 찾아다니니 생활인이 된 것을 실감한다. 벼를 도정해 밥을 짓는다살 것을 다 사고 집으로 돌아와 장바구니를 풀고 한숨 고른다. 남편은 노곤해진 내 어깨를 주무르더니 커피를 내린다. 달콤한 과자에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벼 포대가 있는 베란다로 간다. 쌀 포대가 아닌 벼 포대다. 겉껍질을 벗기지 않은 상태의 벼. 이것을 나락이라고 하는데, 나락을 그대로 배송받아 집에서 직접 도정을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나락을 도정기에 채워 넣고 작동 버튼 하나만 누르면 정수기에서 물이 나오듯 껍질을 벗은 쌀이 좌르르 쏟아진다. 이 유난은 ‘스댕’ 공기에 담기는 오래된 식당 밥을 못마땅히 여기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제아무리 신선한 재료를 쓴다는 집에 가봐도 쌀은 예외인 경우가 많다. 물론 도정 일자를 내걸고 밥맛에 신경 쓰는 식당이 많아졌지만, 막상 회사와 집 근처에서 찾기는 힘들다. 이 까다로움이 도정기라는 심오한 기계를 들인 계기랄까? 갓 도정한 쌀로 밥을 지으니 무엇보다 밥 먹는 재미가 늘었다. 그날의 반찬이나 국에 따라 도정 정도를 조절해 페어링을 한다. 먹고 마시며 수다 떨길 좋아하는 우리에겐 신선한 쌀로 갓 지은 밥이 또 다른 대화의 반찬이다. 오늘은 아삭한 채소 반찬이 많아 오분도로 도정한다. 오분도미는 쌀눈이 그대로 붙어 있어 더 풍성한 맛이 나며, 차지지 않아 오히려 수분이 많은 채소 요리와 잘 어울린다. 오늘의 메뉴와 딱이다. 미강 가루가 붙은 오분도미는 마른 채반에 걸러 털어내고, 흐르는 물에 쌀눈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살살 문질러 씻는다. 물은 정수된 것을 쓰는 것이 좋다. 쌀을 씻는 첫물은 더더욱. 채반에 대고 박박 문지르면 알곡이 부서지니 손끝에 힘을 빼서 머리카락을 린스하듯 부드럽게 다룬다. 반드시 말간 물이 나올 때까지 깨끗이 씻는다. 작은 돌솥에 한 끼 분량의 쌀을 넣고 적당히 물을 맞춰 밥을 짓는다. 밥이 끓는 소리를 듣고, 구수하게 익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밥이 되어감을 감각으로 익힌다. 그러곤 가만히 뜸을 들이며 기다림을 배운다. “맛있는 밥이 완성됐습니다.” 기계음으로 말하는 최첨단 전기밥솥을 두고, 이처럼 돌솥에 밥을 짓는 이유는 남편과 발을 맞추며 느끼는 여유 섞인 즐거움과 닮았다.찬을 꾸려 식탁을 차린다식탁에 오를 반찬은 풀을 먹여 키운 소고기구이, 달래된장찌개, 양배추감태무침, 섬초무침. 봄나물을 먹고 싶다는 반가운 투정을 부린 덕에 오늘 식탁은 파릇파릇하고 향긋하다. 먼저 채수에 된장을 풀고 모시조개를 넣어 찌개를 끓인다. 섬초는 살짝 데쳐 기본 양념에 조물조물 무쳐놓고 양배추는 결대로 썰어 소금과 우메보시 식초와 함께 말린 감태를 찢어 넣는다. ‘마크로비오틱’ 수업에서 배운 것인데, 아주 참신하고 간편하다. 된장찌개 냄비에 두부를 썰어 넣고 달래를 한 움큼 얹어 바로 불을 끈다. 안창살은 팬에 지지듯 굽는다. 상이 채워질 때쯤 남편은 수저를 놓고, 밥솥 뚜껑을 열어 밥을 설설 섞는다. 찌개와 반찬이 오르고 공기에 밥이 담기니 비로소 저녁상이 완성된다. 그는 늘 밥을 가장 먼저 맛보고 자극이 연한 찬부터 차근차근 입에 넣는다. 난 한 입 늦춘다. 젓가락이 무엇에 안달이 나고 무엇에 왕래가 없는지 살핀다. 내가 해준 것을 다 좋아해주길 바란다면 욕심이지만, 좋아하는 것만 해주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제껏 삶을 품어내지 못하고 성급하게 재촉하며 살았다. 정반대로 느긋한 남편을 만나 친절한 태도로 현재를 살고 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업으로 삼으며 비대해진 삶을 살았다. ‘마크로비오틱’을 통해 줄이고 덜어내며 풍요로워지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벼를 직접 도정한 쌀로 김이 나는 밥을 짓고 공기에 담는 과정까지 꼬박꼬박 주의를 기울이며 정성을 더한다. 이에 더해 찬을 꾸려 식탁을 차리는 것은 나름의 삶의 태도를 실천하는 의식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자연으로부터 얻어진다는 것 또한 새삼 환기시킨다. 식사를 마친 남편은 늘 두 손을 합장하며 잘 먹었다 인사한다. 감사한 일이다. About 김하늘 먹고 마시는 일을 기획하며 먹고산다. 취향이 확실한 사람과 함께 밥 먹는 것을 좋아한다. 외식 브랜드 컨설팅 회사 ‘브랜드테일러스’로 밥벌이를 하다가 밥에 꽂혀 ‘라이스앤컴퍼니’를 창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