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내 나는 연애도 아름답다 |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KOREA)

단맛에 짠맛을 더하면 궁극의 달콤함이 되는 걸 아는지. | 사랑,연애,싱글다이어리,이나은,코스모폴리탄

4만 1500원이 부족했다. 22살 겨울 늦은 밤, 속초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남자 친구 몰래 통장 잔액을 확인하는데 ARS 음성이 낭랑하게 말했다. “고객님 계좌의 잔액은 천.삼.백.원. 입니다.” 서울행 버스 티켓 두 장을 끊기 위해서는 4만 2800원이 필요했고, 나에겐 1300원이 있었다. 남자 친구 군 입대 3일을 남겨둔 날, 즉흥적으로 당일치기 속초 여행을 왔는데 올라갈 차비가 부족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친은 돈이 있었겠지만 내가 없었다. 시한부 커플처럼 매일 붙어 다니느라 모아둔 알바비는 다 썼다. 자취생이었던 내 생활비도 바닥을 쳤다. 여행비를 남친이 더 많이 써서 죽어도 돈 없다는 말은 못 하겠고. 화장실에서 몰래 친구에게 전화해 5만원을 빌린 뒤 당당하게 티켓 두 장을 끊어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설상가상 서울에 도착하니 버스와 지하철이 다 끊겨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단 걱정하는 남친을 안심시키고 먼저 택시를 탔다. 남은 돈 딱 8500원어치만 타고 가다 “세워주세요!” 외치곤 뛰어내려 마냥 걸었다. 그 추운 새벽에 콧물 닦아가며 한 시간을 걸어가는데도 왠지 뿌듯했다. 사랑하는 남친에게 통장 잔고는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고 자위하며. 남친의 군 입대 날, 옷자락을 붙잡고 눈물 콧물 짜던 내 손에 그는 편지와 함께 8만 7000원이 든 봉투를 쥐어줬다. 매일 데이트하느라 부담됐을 텐데, 자신에게 남은 돈 전부를 넣었으니 적으나마 생활비에 보태 쓰라는 편지 내용…. 다 알고 있었다. 서로 수입이라곤 고작 알바비가 다라는 걸. 그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기에 아등바등 눈치 게임을 하며 사랑했다. 근사한 밥을 사주고 싶을 땐 일주일을 삼각김밥만 먹으며 돈을 모았고, 선물을 해주고 싶을 땐 인터넷을 뒤져 특별한 도시락을 싸주거나 시간과 정성을 들여 직접 만들어 선물했다. 계산을 해야 할 땐 관심 없는 척 영수증을 흘끗 보고는 머릿속으로 계산하느라 바빴던 것도, 데이트 날짜를 알바비 입금날 이후로 잡는 것도 다 알면서 모르는 척했다. 돈은 없지만 서로에게 뭐든 해주고 싶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모르는 척, 기쁜 마음으로 주고받았다. 시간이 흘러 안정적인 수입이 어느 정도 생긴 지금, 데이트 비용을 하루에 얼마 쓰는지 가늠조차 않고 쓴다. 잔고가 얼마 남았는지, 상대방이 더 쓰진 않았는지 머리 굴리고 눈치 볼 필요는 없어졌다. 지금은 상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훨씬 많아졌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의 우리가 마냥 가엾지는 않다. 커피 두 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카페에서 노는 법도 터득했고, 가까운 곳을 가도 여행처럼 특별하게 느끼는 법도 그때 알았기 때문에. 돈이 없는 만큼 색다른 방법으로 서로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고민한 수많은 시간이 ‘로맨틱함’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속초고속버스터미널 4만 1500원이 잊히지 않듯. 짠내 나던 그때의 연애는 어쩌다 보니 내 생애 가장 로맨틱한 추억이 됐다. 달달한 단맛에 소금의 짠맛을 더하면 궁극의 단맛이 난다고 한다. 지금 짠내 나는 연애를 하고 있다면, 어쩌면 달콤함의 극치를 맛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죽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사랑해도 좋다. 나는 말하지 못했지만, 상대방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것도 좋을 듯하다. “우리는 지금 생애 가장 로맨틱한 연애를 하고 있는 거야.”About 이나은 나이에 맞는 자연스러운 글을 쓰며 살아가고 싶은 20대 작가. 웹 드라마 메가 히트작 <전지적 짝사랑 시점>의 각본을 쓰고 직접 연출했으며, 에세이 <전지적 짝사랑 시점>을 출간하는 등 다양한 글을 쓰려 한다.